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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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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번역, ‘상처의 신발’을 신는 일
글 정은귀 ㅣ 번역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195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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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의 10번째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Sorrowtoothpaste Mirrorcream)』이 2014년 3월에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김혜순 시인의 벌써 4번째 영역 시집이다. 2008년 1월에 나온 『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Mommy Must be a Fountain of Feathers)』, 2011년 11월에 나온 『전세계 쓰레기여, 단결하라!(All the Garbage of the World, Unite!)』, 그리고 2013년 10월에 나온 『돼지라서 괜찮아(I’m O.K, I’m Pig)』의 뒤를 이어 지난 해 3월 『슬픔치약 거울크림』이 출간되었으니, 김혜순 시인은 아마 고은 시인 다음으로 영미 독자들에게 꾸준히 번역, 소개된 시인이 아닐까 싶다. 시인으로서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김혜순 시인의 시를 지속적으로 번역해 온 최돈미라는 번역가가 있어 이처럼 활발한 번역, 출판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필자 또한 김혜순 시인의 시를 좋아해서 기회가 되면 한두 편씩 영역을 한 적이 있는데, 김혜순 시인의 시는 영어로 옮길 때 원어의 리듬감을 잘 살려낼 수 있는 시라서 번역을 할 때 묘한 재미가 있다. 번역을 하다보면 원시가 더 좋아지는 시가 있고 싫어지는 시가 있는데, 김혜순의 시는 단연코 전자에 속한다. 이번에 『슬픔치약 거울크림』을 펴낸 출판사 액션북스(Action Books)는 규모는 비록 작은 출판사지만, 적어도 김혜순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과 사유의 무늬를 잘 알고 거기 주목한 출판사가 아닌가 싶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이 시집의 번역지원 심사에도 참여했던 인연이 있어서 출판된 영역 시집을 원 시집과 나란히 놓고 다시 세심한 애정으로 읽었다. 거침없는 리듬으로 기존의 의미망을 파괴하며 파열음을 내는 언어, 기존의 지배적인 상징질서들이 만들어놓은 시적인 전통과 결별하면서 자신만의 질서로 단어들을 재배치하는 시인의 시는 상처 가득한 삶을 견디는 신발을 신는 일과 흡사하다. 상처의 신발을 신고 걷는 일이 시인의 시 쓰기라면, 시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 또한 상처를 더욱 덧내는 투명하고 연약한 신발을 신고 걷는 일에 다름 아닐 터, 그래서 영역된 시집을 읽는 일 또한 그런 신발을 함께 신고 가는 길이기도 하다. 최돈미 씨의 번역은 늘 그렇듯, 그 색깔이 단정하다. 비교적 충실하게 신발 바꿔 신기를 잘 하고 있다. 움직임의 폭이 무척 큰 시인의 사유의 결을 충실하게 잘 따라가는 편이다. 우리 일상을 에워싸는 칙칙하고 거대한 감수성을 매번 날렵하게 치고 나가는 시인의 도발적인 상상과 고발, 직시를 비교적 잘 살려내고 있는데, 여전히, 아쉬운 부분은 눈에 띄고 또 가끔은 아주 큰 오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령, “나는 죽을 아이를 생산한 몸”(「아침 인사」)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성의 환희와 절망에 대한 실로 비감한 응시이다. 즉, 언젠가는 죽게 될 필멸의 운명을 끈덕지게 이어가고 있는 모성의 몸으로서 자신을 이보다 더 솔직하고 비감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이를 역자는 “I am a body that produced a dead infant”라고 옮겨 놓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필멸을 이어가는 모성의 몸을 그만 “이미 죽은 아이를 낳은 몸” 즉 아이를 사산한 것으로 축소시켜 버린 셈이다. 엄청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이나, 엄마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나 모두 “죽음의 탯줄”에 매달려 생을 간신히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더듬어 나아가는 일 혹은 언어의 망망대해를 건너는 일일진대, 이러한 근원적인 슬픔이 이 시집을 관통하는 주된 사유일 터, 이를 되새김질하는 중요한 대목이 간간이 오독으로 도드라진다. 대체로 성실하고 잘 된 번역인데, 아쉬운 몇몇을 이야기하는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번역이 어차피 상처의 신발을 신는 일이라면 그 상처를 되새김질하면서 더 좋은 번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리뷰어의 몫이겠다. 가령, 「안경은 말한다」에서 “눈 뜨고 그냥 있다”라는 첫 구절에서 “그냥 있다”는 시 전체에서 무척 중요하다. 바로 몇 줄 뒤에 “저 화덕 위의 키조개가 뭘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있다”가 나오고, 그냥 있는 안경의 이미지가 시 전체에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눈 뜨고 그냥 있는 존재, 무언가를 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안경이지만 또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모든 것을 보기 위하여 눈을 감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눈 뜨고 그냥 있다”라는 표현에는 그만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안경의 운명적인 존재론이 “본다”와 “그냥 있다”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킨다. 눈 뜨고 “그냥 있다”에서 도드라지는, 수동적인, 허나 필연적인 존재가치로서의 “있다”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하는데, 번역에서는 그걸 살리지 못했다. 시에서 “반복”은 무척 중요한 방법론이기에 한국어 원시에서 반복되는 구절은 번역에서도 될 수 있는 한 반복해서 살리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어서 좀 아쉽다. 시를 가르치는 필자는 번역은 말을 옮기는 작업이기 이전에 섬세하고 정성 어린 해석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하곤 한다. 우리 살아가는 삶의 하루하루가 설익은 밥알을 삼키는 일, 혹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여기저기를 딛는 일, 상처의 신발을 딛고 선 잠깐의 그 영토 위에서 우리 존재의 비의가 완성되고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면, 번역 또한 그 잠깐의 영토 위에 상처의 신발을 딛고 서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영어라는 새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이 상처의 신발이 디딘 그 잠깐의 영토에서 낯선 밥알을 꼭꼭 잘 씹어 삼키는 새로운 독자를 많이 만나기를 바란다.
※ 영역 『슬픔치약 거울크림』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최돈미 씨의 영역으로 미국 액션북스에 출 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