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글 이근배 ㅣ 시인, 1940년생
시집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장편서사시 『한강』,
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시선집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 등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 나라 찾는 일하겠다고 / 감옥을 드나들더니 / 광복이 되어서도 / 집에 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 스승 면암(勉庵)의 뒤를 이어 / 조선유림을 이끌던 / 장후재(張厚載) 학사의 셋째딸로 시집와서 / 지아비 옥바라지에 /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 겨우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몇 해 전 잡지사의 막무가내 청탁을 받고 쓴 내 보잘 것 없는 졸시 「자화상」의 한 대목이 보여주 듯 내게 있어 아버지는 여늬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 선준(銑濬)공은 충남 당진에서 이름난 한학자 이각현(李覺鉉) 공과 안동 김 씨 사이의 장남으로 1911년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어려서 글읽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신동소리를 들었다 한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 각현 공이 당대 거유 순암(順庵) 장후재(1878-1946) 학사의 동갑나기 3녀를 며느리로 맞겠다고 청혼하자 순암 선생이 한번 데려오라 하고 시험을 친 후에 허락하였다 한다. 순암 공도 23세 때 면암 앞에서 『논어』를 강하고 풀이할 때 틀림이 없다하고 “살아서도 의리에 순하고 죽어서도 의리에 순하라”는 뜻으로 순암(順庵)이라 호를 주시었던 일에 비추어 그 시험에 합격한 16세 소년의 공부에 짐작이 간다.
한학과 더불어 신학문을 익혔던 아버지는 결혼 후 온양에 나가 사무직 등에 일하면서 지하 독립운동에 참여, 사상범으로 체포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네댓 살 된 큰손자인 나를 데려다 당신의 품에 재우며 천자문을 읽혔고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송산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 / 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김씨는 / 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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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자화상」의 첫머리다. 충청도 산골짜기에서 양반, 상놈을 따질 때 할머니는 은근히 당신이 명문 가문의 딸임을 내비치셨는데 왜 어린 손자에게 누구의 외손자요 누구의 손자인 것을 자주 일러주셨을까? 애비 없이 자라는 손자가 두 선비집안의 혈통을 잘 지켜 장차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않도록 일깨우신 것이리라.
내가 국민학교 4학면 때 아버지 어머니는 누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고 이듬해 할아버지는 행길 건너에 집과 논밭을 마련해서 분가를 시키셨다. 광복 후에도 남로당 지하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아버지를 할아버지가 겨우 석방 시켜 비로소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단란을 꿈꾸는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를 부르며 듬뿍 사랑받는 날이 오기도 전에 ‘삼팔선이 터졌다’는 일요일 아침의 심상찮은 소식이 예기치 못한 광풍으로 몰아쳐 어머니에게서는 지아비를, 나와 두 누이에게서는 아버지를 빼앗아 갔다.
인민군이 어디쯤 내려왔는지 / 아직 전쟁바람도 안 불고 / 태극기가 우리나라 깃발이던 어느 날 / 이웃집 재집이와 나는 / 재 넘어 사는 명룡이 아버지가 / 집모퉁이 콩깍지동 속에서 꺼내주는 / 종이 깃발을 품속에 안고 돌아왔다
- 시 「깃발」에서
1950년 6월 26일 아침 송산국민학교 조례시간에 홍맹선 교장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 했을 때 손을 든 학생 가운데 5학년 반장으로 앞에 서 있던 나를 교장선생이 지목, “삼팔선이 터졌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와!” 하고 전교생의 웃음소리가 터졌었다. 그날로부터 2주일 쯤지났을까? 아직 당진까지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재 너머에 가서 콩깍지동에 숨겨둔 깃발을 품에 안고 돌아온 일이 있다. 처음 보는 인공기이지만 남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 분단, 전쟁……, 이 질곡과 수난의 시대에 이 땅의 사람들 누군들 고통과 상처를 비켜갈 수 있을까마는 나는 더욱 혹독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들어선 꼴이었다.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공깃발이 거리에 나부끼던 그날은 아버지가 기다리던 날이었겠으나, 김구 선생 친필 서명본 『백범일지』를 받을 만큼 유림 대표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할아버지는 붉은 완장의 첫째 표적이어서 피난을 가야 했고 할아버지 댁은 붉은 압류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어있었다.
학교에서는 ‘김일성장군노래’, ‘인민항쟁가’, ‘적기가’를 가르치고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여성동맹……, 온갖 이름의 단체들이 새 세상을 만난 듯 깃발을 들고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마땅히 영웅(?) 대접을 받아야 할 아버지는 당진지역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던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사 피신을 확인하고는 당신의 지하운동 본거지였던 온양으로 떠났다.
어디 계셔요, / 인공 때 집 떠나신 후 / 열한 살 어린 제게 / 편지 한 장 주시고는 / 소식 끊긴 아버지/ 오랜 가뭄 끝에 / 붉은 강철 빠져나가는 / 서녘하늘은 / 콩깍지동에 숨겨놓은 / 아버지의 깃발이어요. / 보내라 시던 옷과 구두 / 챙겨드리지 못하고 / 왈칵 뒤바뀐 세상에서 / 오늘토록 저녁 해만 바라고 서있어요. / 너무 늦은 이 답장 / 하늘 끝에다 쓰면 / 아버지 / 받아 보시나요.
- 시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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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온양에서는 아버지를 쌍수로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높은 직책도 맡고 39세로 젊은 나이는아니었지만 새 공화국 일꾼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준비 없이 가셨던지 내게 옷과 구두를 보내라는 편지를 주셨다. 그것은 내 생애 처음 받아보는 편지였고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임을 인증 받는 문서이기도 했다. 나는 편지를 받고 삼촌과 의논해서 부쳐드리겠다고 차일피일 하는 사이 갑자기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버지! 라고 한번 불러보지 못한 것 같다. 남들처럼 장에 가서 신발이나 학용품, 과자 같은 것을 사준 일도 없고 어려서 키우지 못한 외동아들 속으로야 어루만지는 사랑이 없었을까마는 할아버지 댁에서도 그랬고 분가해서도 나는 아버지가 어렵기만 했었다.
그런 내게 평생토록 옭아매는 사슬이 하나 있다. 내가 눈에 벗어나는 짓거리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꾸지람을 하셨다. 아버지의 사진을 봐도 나는 닮은 데가 없고 나라 찾기와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 나를 내던진 일도 없고 공부로나 성품으로나 도덕성으로나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그 꾸중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 그것은 꾸중이 아니라 칭찬이에요” 하고 대꾸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산 시간은 한 해 남짓이지만 여든을 바라보는 오늘토록, 아니 내가죽은 후에도 “왜? 무엇이, 그러면 지금 나는?”이라는 풀리지 않는 화두를 짊어지고 때때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 나의 본적 호적등본에 1911년 생 아버지의 사망신고를아직도 하지 않았다. 온양에서 인민군이 철수할 때 어디로 가셨을까? 물을 곳도 대답해 줄 사람도없지만 나는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자화상」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당신은 속 썩이는 아들이 미우셨겠지만 / 아니지요 나는 애비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거든요 /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 끝내 따르지 못하고 / 오늘도 나는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