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표현의 자유와 비둘기 발

정신분석은 삶의 허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논평자들의 세계

직접경험의 소멸과 한국문학의 행로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정 지 된 시 간 의 발 견

인도로 가는 길

바다를 닮은 소설가 한창훈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연기자 겸 해설가이자 무대감독, 무성영화 시대 변사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시 2

매일 건강과 시 리처드 스콧 씨에게

앞으로도 궁금한 개구리들

하프를 잃어버린 시인들 카프카의 가르마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내 글쓰기의 스승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

글 송재학 ㅣ 시인. 1955년생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얼굴』『내간체를 얻다』『날짜들』 등

▲ 송재학 © 운영자

시라는 감정이 쉽게 오지 않을 때, 아니 우울하거나 아무것도 그립지 않을 때, 내가 뒤적거리는 것은 시집 이기도 하지만, 살붙이처럼 가까이한 것은 우리말 사전이다. 그 속에는 내가 익숙하거나 낯선 감정들이 날 것 이거나 새것처럼 누워 있다. 그러니까 우리말 사전 속의 표제어들은 나에게 감정의 외투들이다. 우리말 사전 속에는 또한 시적인 것부터 시에 이르기까지 죄다 존재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게심니, 옛살놀이, 굴풋한, 탐방구질, 호아가다, 할개눈, 허벙저벙, 낯통, 어리꾸지다, 접시불, 불곽, 메싸립, 꼬치미, 호요바람, 애소리, 애젖하다” 등은 소설가 김성동의 산문(《녹색평론》 1998년 통권 38호)에서가려 뽑은 우리말 일부이다. ‘올게심니’는 그 해의 농사에서 가장 잘 익은 곡식 가운데 벼, 수수, 조 등의 목을 골라 뽑아다가 묶어 기둥과 방문 위나 벽에 걸어놓던 것으로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한 행위이다. ‘옛살놀이’는 고향의 우리말이다. 뜻밖에도 순수 우리말은 이국적이거나 관능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단순하다. “나직하나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고 멀어져 가자, 정적이 밀도 높은 물질처럼 법당 안을 채웠다. 거의 관능적인 기쁨이 그의 몸을 채우고 있었다”라는 것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조선말 낭송을 처음 듣는 조선인 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감격이다. 우리말은 익숙하기도 하려니와, 언제든지 관능적인기쁨을 주는 서정의 당도가 치밀하고 빽빽한 언어이다.
김성동은 충청도 사람이다. 벽초 홍명희도 충청도 사람이다. 충청도 입말의 넓이와 깊이를 알게 된 것도 이작가들을 통해서였다. 전라도 입말들은 또 어떤가. 아마도 말의 원형성을 가장 오래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김원일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경상도의 입말들도 삭고 삭아서 만만치 않다.

내가 사용하는 ‘우리말 사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만든 것이다. 문학청년 시절부터 조금씩 업데이트한 것인데, 물론 불완전하고 편견이 가득한 사전이다. 천리안 통신 시절 다운로드한 50여 쪽의 기본 자료 위에 내가 조금씩 첨가하여 3백 쪽이 훌쩍 넘는 대용량이 되었다. 물론 내가 편집한 것이니까 내 취향에 맞춤한 표제어로만 이루어져 있다. 최근에는 거의 개정하질 못 했다. 이젠 각종 우리말 사전들이 범람해서 무의미하게 된 탓이다. 내가 만든 것이긴 하지만 사전이니까 나도 완전히 외운다거나 꿰질 못하고 있다.
언어의 영감이 필요할 때(라고 해봐야 시가 잘 풀리지않을 때) 이걸 천천히 뒤적거린다. 내가 필요한 정서를 되짚어주는 말이 반드시 숨어 있다. 또한 내가 만든 것을 사용하는 기쁨이 있다.이걸 통해서 고양된 느낌을 끌어올릴 때가 많다. 80년대 초부터 조금씩 표제어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으면서 시작했다. 모르는 말이 너무 많다는 건 문학청년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83년도에 애플의개인용 컴퓨터가 나오면서 애플의 ‘중앙 한글’이라는 워드 프로그램으로 파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홍명희, 김성동, 김원일, 박완서 등 주로 소설가들의 작품이 내 우리말 사전의 소스이다. 젊은 날 백석의 시집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얼마나 붉혔던가. 북방 언어의 느낌은 남방 언어에 비해 더 시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수 우리말은 무엇보다 지금의 언어와 비교하면 순박하고 여린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우리말 성립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로써 충분히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밝힐 수도 있을 터이다. 가분재기(“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나 꽃멀미(“꽃의 아름다움이나향기에 취하여 일어나는 어지러운 증세”) 등이 그러하다. 야생화의 이름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있다.
정서적 형태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휘가 많다는 것 또한 잊을 수 없다. 할개눈(“눈동자가 비뚤어지게 옆으로 할겨보는 눈”)이나 가시눈(“날카롭게 쏘아보는 눈”)이 예로 들어볼 수 있는 표제어이다.
관능적인 표현이 손에 잡힐 듯한 어휘들의 존재감을 어쩌랴. 정서적 형태가 진화한 경우이 겠다. 흰물결 날리다(“술장사를 하다”), 흰오리(“하얗게 센 머리카락”), 손맑다(“재수가 없어 생기는 것이 없다”)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말이 가진 주술적 형태는 향가에 드러난 이두 문자에도 그 서정적 자취가 있다. 그것은 시원에 대한 내 갈증이기도 하다. 언어를 통해서 각성해온 내 시적 발자국은 이제 다시 언어를 거슬러 가고 싶은 갈증의 잠재태를 어찌하랴. 향가를 읽는다는 것은 이두문자를 읽는 것이며 그것은 보다 오래전의 우리 입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삼대목 한 구절인 “어느 가잘 이른 바라메(於內秋察早隱風未)”를 소리 나는 대로 가만히 속삭여보면 목울대가 우선 뜨거워지고 마음의 어느 선에 가만가만 물결이 닿는 것이 느껴진다. 송진 가루 뚝뚝 떨어지는 현의 소리가 속삭여진다. 어두운 촛불의 일렁거리는 불꽃과 마음 구석은 예민하게 잇닿아 있다. 향가란 무엇보다 노래가 아닌가, 울컥거리며 노래의 가락을 상상으로 새겨보았다. 수십 번을 되뇌자 낯선 신라의 말이 신라의 산이나 강처럼 희미하게 뇌리를 맴돌았다. 21세기의 말이 아니라 고대 언어 신라의 말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은 불가능한 미망이 전율처럼 스멀스멀 다가온다.
우리말이란 나에게 주술과 서정의 원칙이다. 시적 영혼을 의지하는 습관이다. 사족을 달자면 내가 만든 우리말 사전은 주술과 서정의 행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