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표현의 자유와 비둘기 발

정신분석은 삶의 허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논평자들의 세계

직접경험의 소멸과 한국문학의 행로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정 지 된 시 간 의 발 견

인도로 가는 길

바다를 닮은 소설가 한창훈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연기자 겸 해설가이자 무대감독, 무성영화 시대 변사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시 2

매일 건강과 시 리처드 스콧 씨에게

앞으로도 궁금한 개구리들

하프를 잃어버린 시인들 카프카의 가르마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나의데뷔작

부끄럽고 고지식한 순정

글 박성준 ㅣ 시인, 1986년생
시집 『몰아 쓴 일기』 등

▲ 박성준 © 운영자

새해 첫날 신춘문예 당선 공고가 뜨면 나는 괜히 설렌다. 내가 투고한 것도 아니고 후배나 지인이 어디에 투고했는지 세세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새해의 출발을 그렇게 하는 것이 왠지 산뜻한 기분이다. 보통 인터넷 상에는 1월 1일 새벽부터 당선작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나는 매년 버릇처럼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 당선작이 올라올 때까지 새벽 내내 컴퓨터 앞에 머무르곤 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시, 소설, 평론 부문의 당선작을 읽고. 수상소감을 보고 심사평까지 꼼꼼히 읽고 나서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오랫동안 등단 문턱에서 미끄러져봤었기 때문에 습작시절부터 그런 버릇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건 새로이 시인, 작가가 된 동료들의 글이 늘상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다른 그들의 새로움이 매번 내게 기분 좋은 자극을 주었고 나는 신인을 기다리는 게 기뻤다. 문예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각 문예지마다 신인문학상이 게재되는 계절이면 다른 글보다 꼭 신인상 꼭지를 먼저 들춰보게 된다. 어쩌면 의무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런 행동을 해왔던 것은 새로움에 대한 질투이기도 했지만, 내 글이 늘 새로웠으면 하는 욕망이거나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나는 스물네 살 대학 3학년 재학 중에 데뷔를 했다. 매우 빠른 나이였지만 고교 문예창작과에서부터 일찍이 문학 수업을 받았었기 때문에 체감 상으로는 빠르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동기 중에 이혜미가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먼저 데뷔해서 나와 있었고, 단짝 친구였던 김승일 시인이 내가 등단하고 몇 개월 뒤에 바로 《현대문학》으로 데뷔했으니 빠르다는 생각보다는 이제 내 이름으로 시를 발표할 수 있구나 정도의 기쁨이었다. 김승일 시인의 경우처럼 처음 투고해서 한 번에 등단하는 사례가 있는 반면, 나는 수없이 떨어지고 고치고를 반복하면서 겨우, 겨우 데뷔를 했던 사례였기 때문에 등단의 기쁨과 문학적 열등감은 같은 자리에 있는 거였다.
2009년 1월 23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금요일이었고 다음 날부터 설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 해 신춘문예에서 또 다 떨어지고 1월 초《문학과사회》와 《세계의문학》 신인문학상에 나란히 10여 편의 작품을 투고했던 터였다. 열아홉 살 때부터 신춘문예투고를 시작했었으니 5년째 떨어지는 것이라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이골이 나 있었다. 문예지도 꾸준히 투고를 했었지만 마찬가지로 떨어지는 게 더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투고를 해놓고도 기대를 접어두고 잊고 사는 게 습관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잡지가 출간되면 도서관이든 대형 서점이든 곧장 찾아가서 혹시 내 이름이나 작품이라도 언급되어 있는
게 아닐까 책을 뒤적여보는 일이 많았지만, 일단 투고를 해놓고 나면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망각이내 질투와 열등감을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연휴 내내 빠지게 될 과외 수업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대학 학비를 충당해야했기 때문에 언어 영역이든 논술이든 사회 과목이든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업체에서 과외가 들어오면 서너 개씩 수업을 뛰고 있었다. 그날은 네 군데 수업이 있었고 세 번째 집을 방문해서 이제 막 자리에 앉았는데,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다. 등단이라니!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편집자 분께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나 오늘 수업 못하겠다고, 흥분해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과외 학생 집에서도 나와 버렸다. 다음에 예정된 수업까지 연휴 이후로 미뤘다. 그리고는 등단 소식을 주변에 알렸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나대신 울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미세하게 질투가 느껴지는 말투도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데뷔를 해서 글쟁이로태어나는 날이었기 때문에 마냥 기뻐했다.
등단 표제작은 「돼지표 본드」였다. 의아한 결과였다. 10편 이상을 투고하라는 모집공고에 욕심을 부려서 13편을 투고했었는데, 그 중에 3편은 쓰고 싶었던 시가 아니라 등단하려고 제작해냈던 시였기때문이다. 「돼지표 본드」는 그 중 하나였고, 등단작 4편 중에 다른 한 작품 또한 그렇게 제작하려고 했던 시였다. 당선 통보를 받고 나서도 그게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무례가 되는 걸 알았지만 당선작을 다른 걸로 하고 싶다고 떼를 써보기도 했고, 게다가 표제작 제목을 이것저것으로 바꿔서 게재하고 싶다고 편집부에 조심스럽게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사실 나는 「돼지표 본드」를 고등학교 때 썼다. 2학년 창작 전공 시간에 묘사 공부를 한다는 생각으로 둔탁하게 쓴 이미지 계열의 시였다. 깨진 유리잔에 손잡이를 붙이는 정황을 가지고 상호명 ‘돼지표 본드’를 발상으로 해서 유사 이미지들을 계산해서 썼던 거였다. 끈끈한 돼지의 걸음걸이, 말랑말랑한 돼지의 육체와 유리잔의 차갑고 날카로운 속성을 대치시키며 본드의 환각과 굳은 몸, 미라의 웃음소리 등등으로 이미지들을 확장시키며 쓴 시다. 최대한 내 육성을 빼고 쓴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써 놓고 늘 내 것 같지 않은 시였다. 초고를 썼던 당시에도 머리가 뜨겁고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이다. 그래서였을까. 고교 문예공모전이나 대학 문학상에 이시를 여러 번 투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었다. 심사평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던졸작 중 하나였다. 물론 졸작이었기 때문에 공모를거듭할 때마다 계속 퇴고를 할 수 있었던 나름의 계기가 마련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이곳과 다른 곳을 꿈꾸고 여기서 쓰지 못하는 미지의 방식을욕망했던 나에게는 이런 등단작이 불편했다. 내가 등단을 위해서 절충하려했다는 그 속내를 다 들켜버리는 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렇게 밉고 부끄러웠던 등단작이었지만 나는 첫 시집을 묶을 때 등단작 4편을 모두 포함시켰다. 게다가 전폭적으로 퇴고를 하거나 정돈을 하지도 않고 등단 지면에 게재된 그대로를 시집에 실었다. 육성이 배제되었던 시편들을 그대로 실었던 이유는 그것들을 모두 ‘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목소리가 형성되는 과정이나 날 것과 같은 상태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또한 내 육성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단작은 내게 늘 부끄럽다. 부끄러움, 열등감, 질투, 치부 등등의 어쩔 수 없는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내 문학 시발점이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부끄러워도 끝끝내 어쩔 수 없다는그 둔탁한 아집들 때문에, 늘 새로운 시인과 나를매혹하는 미지들을 기다리고 있다. 고지식 아닌 고지식을 가지고 ‘다음’을 기다려보는 것이다. 앞으로도 신인의 탄생은 나의 질투일 것이다. 나는 그런 내 문학적 순정이 너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