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글 신해욱 ㅣ 시인. 1974년생
시집 「간결한 배치」 「생물성」 「syzygy」, 산문집 「비성년열전」 등
세 번째
인상적인 김밥 집을 두 군데 알고 있다. 하나는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분식집이다. 무뚝뚝한 주인여자는 주문을 받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루루 싸고 슥슥 썰어 식탁 위에 툭 올려준다. 그런데 이 김밥, 희한하다. 햄, 계란, 시금치, 당근, 단무지, 맛살, 평범한 속재료에 하얀 밥과 검은 김뿐인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처음 이 집에 들렀던 날 나는 김밥의 진정한 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재료들의 비율이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 없고 간이 이보다 더 알맞을 수 없는 것이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맛은 모두 미원의 비율이 결정한다고 그러던데, 그렇다면 첨가된 미원의 양도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다고 덧붙여야겠다. 여느 분식집이 그렇듯 오뎅 국물과 반달 모양 단무지가 따라 나오지만 나는 손도 대지 않는다. 떡볶이나 순대를 함께 시키는 일도 없다. 이 맛에는 아무것도 곁들일 수 없다는 걸 먹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김밥의 본질을 꿰뚫는 맛이로구나, 하고 찬탄을 건네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한 곳은 찻집처럼 실내가 아늑한 김밥 전문점이다. 통유리 너머로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명 탓일까, 김밥으로 허기를 ‘때우는’ 게 아니라 셰프의 요리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 풍경에 끌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분위기만 특별한 게 아니고 메뉴도 어리둥절할 만큼 특별하다. 닭가슴살과 루꼴라로 속을 꽉 채워 토마토소스에 찍어먹는 김밥이라니. 멕시칸 시즈닝으로 마리네이드한 쇠고기를 듬뿍 넣은 김밥이라니. 가격도 한줄에 무려 오천 원. 김밥이 뭐 이리 요란하고 난해한가.
그중 일단 만만해 보이는 걸 시켰는데, 잠시 후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실물을 보고는 메뉴판의 도도함에 납득이 가기는 했다. 굵고 탐스러웠다. 밥은 김의 안쪽에 한 알 한 알 셀 수 있을 정도로 얇게 붙어 있고, 베이컨, 호두, 싱싱한 잎채소, 이런 콧대 높은 재료가 아낌없이 속을 채우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큼하고 흐물흐물한 것도 들어 있어 젊은 주인에게 뭐냐고 물었더니, 발사믹 식초로 절인 양파란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런데 이것은 김밥인가. 참기름의 고소함 대신 신 맛이 강하게 돌아 김밥이라기보다는 김초밥 쪽에 가깝다. 밥의 양이 너무 적어 또한 김밥이라기보다는 김말이 샐러드라 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속재료들은 제각각 목청이 높아 ‘앙상블’을 이루지 못하고 입 속에서 따로 논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이렇게 씩씩거리고 말았다.
김밥의 김밥다움을 능멸하는 사악한 맛이다…….
이 김밥과 저 김밥을 머릿속에 나란히 놓은 채 한쪽은 깎아내리고 한쪽은 추켜세우며 김밥의 김밥다움과 김밥의 본질 같은 걸 가려보고 있자니 문득 모종의 기시감이 스쳐갔다. ‘김밥’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가령 시는 시다워야 한다거나, 시의 본질은 서정성에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나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었다. 요즘 시들이 요설에 취해 산문과 다름없어진다는 개탄은 옹졸한 소리로 들렸다. 본질 같은 게 정말 있다면, 주어진 ‘본질’에 갇히지 않고 언어적 실험을 계속하며 표현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시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한 편 한 편은 완성도 면에서 실패하더라도, 실패의 궤적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영역인 시에 대해서는 ‘확장’과 ‘실패’에 관대하면서 김밥에 대해서는 김밥다움을 따진다?
무슨 무협지처럼 정파와 사파를 가르려 한다? 들이미는 잣대에 일관성이 없어 순간 뜨끔해진다. 김밥의 본질을 꿰뚫는 그 맛은, 말을 바꾸면 주어진 것들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활용한 안전한 맛일 수도 있다. 김밥의 김밥다움을 능멸하는 사악한 그 맛은, 말을 바꾸면 모험정신이 깃든 흥미진진한 맛일수도 있다. 매니악한 입맛을 지닌 누군가는 나와 달리 이 김밥에 열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전한 맛이 폭넓게 사랑받는 이유는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엉이나 시금치는 수많은 입들이 선택했을 것이고 고사리는 수많은 입들이 걸러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걸러진 재료가 어디 고사리뿐이겠으며 그런 식으로 자리 잡힌 음식이 어디 김밥뿐일까. 색다른 재료를 통해 새맛을 찾는 모험이 거듭되고 실패가 축적된 후라야 안전한 맛이 나타나 입을 길들이게 된다. 전통이라는 것도 결국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 언어의 최전선에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작품을 읽는 마음으로, 차림표의 괴상한 음식도 앞으로는 정성껏 먹어봐야겠다. 저 사악한 김밥이 그저 사악하기만한지 아슬아슬하게 내 입을 길들일지 한 번 더 시험해 봐야겠다. 미래의 전통음식을 미리 맛보는 일일지 누가 알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