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표현의 자유와 비둘기 발

정신분석은 삶의 허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논평자들의 세계

직접경험의 소멸과 한국문학의 행로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정 지 된 시 간 의 발 견

인도로 가는 길

바다를 닮은 소설가 한창훈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연기자 겸 해설가이자 무대감독, 무성영화 시대 변사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시 2

매일 건강과 시 리처드 스콧 씨에게

앞으로도 궁금한 개구리들

하프를 잃어버린 시인들 카프카의 가르마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다시 읽는 우리 문집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 조선시대 발간된 『백사집』과 『국역 백사집』(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 운영자

- 이항복의『백사집』

임진왜란 직전, 뜻있는 인사들이 탄식조로 내뱉는 말이 있었다. “태평성대가 200년간 이어지니, 사람들이 전쟁을 모른다(昇平二百年, 人不知兵革).”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론을 건의하고 중봉 조헌이 임진년에 큰 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를 새겨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 개국 200년이 되던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은 승승장구,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전쟁을 모른다’는 지적은 정확했다. 5월 2일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했다. 동래성에 상륙한 지 정확히 20일만이었다.
선조 임금은 일본군이 당도하기 이틀 전인 4월30일 새벽 경복궁을 도망쳐 나온 뒤 파주 동파역에서 잠을 잤다. 도승지로서 선조를 호위했던 백사 이항복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의 수레가 동파의 역사에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주상이 대신들을 불렀다. 이산해 공과 유성룡 공이 들어왔고 나도 도승지로서 입시하였다. 대신들이 어전에 이르자 주상이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울먹이며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이모(이산해)야, 유모(유성룡)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꺼리지 말고 각자 충심을 다해 말하거라. 내가 어디로 가야겠는가?” 다시 묻기를 “윤두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본래 사려가 깊은 사람이다. 함께 보고 싶구나.” 나는 나와 오음 대감(윤두수)을 불러들여 어전에 나아가게 했다.’
- 『백사집』 권4, 「서애 유성룡 이야기(西厓遺事)」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의 편액. 이항복을 모신 서원으로 1660년 현종 1년에 사액이 내려졌다(포천시청 제공). © 운영자

백사는 동파에서 열린 어전회의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백사는 이 자리에서 선조의 어가가 서쪽으로 가서 명나라의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애 유성룡과 오음 윤두수는 천연 요새지인 함흥이나 경성으로 가서 버텨야 한다고 건의했다. 영의정이었던 아계 이산해는 의견을 내지않고 엎드려 울기만 했다. 백사와 서애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선조는 백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선조가 의주로 피신하게 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것은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백사가 쓴 「서애 유성룡 이야기」는 왕조실록의 내용(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과 부합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자세하다. 『백사집』의 기록이 상세하고 구체적인 것은 백사가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거동을 세세히 관찰했기 때문이다. 또 승정원일기를쓰는 사관으로서 역사를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사는 자신이 개입한 일이라고 해서 자신을 변호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과오는 인정하고 타인의 장점은 높이 평가하였다. 백사는 동파 어전회의에서 공론이 정해진 뒤에 서애로부터 “어떻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자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책을 들었다. 백사는 그 자리에서는 바로 이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주 파천에 대한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애의 선견지명에 탄복하고 사과하였다.
『백사집』에 나오는 얘기다.

전쟁 기간 중 병조판서만 5번…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건진 경세가

▲ 위 ㅣ 백사 이항복 초상(조선 중기, 35㎝×59.5㎝, 서울대박물관 소장)아래 ㅣ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의 이항복 신도비. 비문은 상촌 신흠이 썼다(포천시청 제공). © 운영자

백사 이항복(1556~1618)은 30대 중반~40대 초반에 임진왜란을 치렀다. 7년 전쟁 동안 그는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전쟁에 대처했다. 군사 권력을 지휘하는 병조판사는 5번이나 맡았다. 뛰어난 경세가였던 백사는 훌륭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정치인, 관료의 면모가 워낙 뛰어나 문장에 대한 평가는 많지 않으나 그의 시문은 평이하고 소박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계곡 장유가 백사를 ‘나라의 기둥이고, 선비의 표상’이라고 평가했는데, 지나친 말은아닌 듯하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대표적인 문헌으로 이순신의『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이 꼽힌다. 이들 저술은 전쟁의 한 중심에 있었던 무관과 문인이 기록한 임진왜란 보고서이다. 『백사집』은 백사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모은 개인 문집이다. 한시(355수), 상소문, 건의문, 편지, 행장, 묘지문, 기문이 실려 있다.명나라에 다녀온 연행록 『조천록』도 들어있다. 그러나 대부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순신이나 유성룡처럼 전쟁 자체를 기록해 후대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경험이 녹아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백사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인물 전기는 생전의 행적을 적은 행장, 묘지문이나 비명, 사건을 기록한 유사 등의 형식으로 쓰여 있다. 이 가운데에서 주목되는 것은 임란 시기 활약했던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백사는 붕당 정치가 시작되어 당쟁이 확산되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붕당의 선입견이나 편견에 갇히지 않았다. 그의 필법은 엄정했고 정확했다. 그는 역사가는 아니었지만, 철저히 사관의 입장에서 기록하고자 했다.
노량해전에서 숨진 이순신의 전공을 기록한 「통제사 이공의 노량비명」은 뒷날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표본이 되었던 글이다. 백사는 옥포, 노량,당포 율포, 한산 등 남해에서 있었던 이순신의 활약상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가 수군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라고 평가했다.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 많은 적을 상대하였다. 30척의 적선을 파괴하고 용맹을 다해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였다’고 적었다. 백사는 이순신의 전공 이외에 그의 훌륭한 인품을 주목하였다. 명나라 수군 제독이 이순신을 ‘이 어르신(李爺)’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고 적었다. 또이순신이 전사하자 명나라 병사들이 슬퍼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전라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통곡하였다고 보고 들은 대로 썼다. 그러면서 백사는 이순신의 사람됨이 전쟁에서 세운 공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당색으로 따진다면 백사는 서인이고 이순신은 동인이다. 그러나 백사의 이순신에 대한 기록에서 당파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백사집』에는 권율에 대한 글이 묘지, 신도비명,비음기 등 3편이나 실려 있다. 권율의 사위로 글 잘짓고, 고관에 올랐던 백사는 처가 쪽의 글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권율은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몇 안 되는 장수이다. 권율의 묘지문에서 백사는 장인의 유언에 따라 글을 쓰게 됐노라고 밝히면서 묘명(墓銘)을 쓰지 않고 사실만을 기록했다고 적었다. 묘명에는 고인에 대해 평가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 부득이 생략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백사는 장인의 행적을 인정에 매이지 않고 엄정하게 기록했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글도 적지 않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론을 세상에 알린 「율곡선생비명」이 그 사례이다.

백사, 30년지기 한음의
죽음 앞에 곡을 하다

▲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 교정에 있는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弼雲臺’는 백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오른쪽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선조인 백사를 기리면 쓴 한시이다. © 운영자

오성부원군으로도 불리는 백사를 이야기하면서 한음 이덕형과의 교유를 피해갈 수는 없다. ‘오성’과 ‘한음’의 우정은 동화, 만화 등으로 각색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백사와 한음은 죽마고우가 아니다. 백사가 한성의 서부 양생방(지금의 남대문 부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음은 남부 성명방(서울역 부근)에서 태어났으니 두 사람의 교제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음은 오성보다 다섯 살 적은데다 어린 시절을 경상도 상주의 진외가에서 보내어 두 사람이 어울려 놀았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두 사람의 개구쟁이 일화는 훗날 꾸며진 것이다. 백사의 제자 박미의 『백사선생 연보』에 따르면 백사와 한음이 처음 만난 것은 둘의 나이가 각각 23세, 18세 때라고 한다. 실제 『백사집』이나 『한음유고』에 이보다 앞서 두 사람이 교제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백사와 한음은 1580년 알성시 문과에 나란히 급제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관직에서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둘의 우정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이 났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명나라로부터 원병을 받아냈다. 한음이 원병을 요청하러 명나라에 들어갈 때, 백사는자신의 말을 내어주었다. 1604년 영의정 한음 이덕형이 임해군의 살인 교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되었다. 후임으로 백사가 임명됐는데, 백사는 파직된 한음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다며 극력 사양했다. 백사는 상소문에서 “이덕형은 앞서서 말한 신하일 뿐이고, 저는 말을 하지 못한 이덕형”이라고 한음을 변호하며 두 사람이 일심동체임을 강조했다. 백사는 8번의 상소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1613년 조정은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 폐위를 놓고 당론이 맞섰다. 당시 나란히 영의정과 좌의정에 있었던 한음과 백사는 폐위 반대에 앞장섰다. 돌아온 것은 탄핵과 파직이었다. 한음은 북한강변용진 별서로 내려갔고, 백사는 양주군 노원(지금 서울 노원구)으로 은거했다. 그해 10월 한음이 화병으로 타계했다. 부음을 들은 백사는 댓바람으로 달려가 친구 한음의 시신을 염하고 곡하였다. 상중에 백사는 한음의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한음이 백사를 알아주었고, 백사가 사모한 사람이 바로 한음이었다’고. 그리고 「한음만(漢陰挽)」이라는 제목으로 한음을 위해 조시(弔詩)를 지었다.

궁산에 떨어진 신세 말이나 삼가려고
(淪落窮山舌欲捫)
훌쩍훌쩍 남몰래 한원군을 곡하노라
(呑聲暗哭漢原君)
애사에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哀詞不敢分明語)
야박한 풍속이 남 엿보아 말 만들기 좋아한
때문일세(薄俗窺人喜造言)

청년기에 만난 백사와 한음의 우정은 한음이 죽을 때까지 30년 이상 이어졌다. 둘의 우정은 흔히 중국의 관중과 포숙의 사귐에 비교되지만, 그 이상이다. 생사를 함께 했던 문경지교(刎頸之交),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