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채호기 ㅣ 시인,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57년생
시집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수련』 『손가락이 뜨겁
다』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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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그림 전시를 본 후 2층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중, 저녁이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다가온 체험에 대해 썼다. 다른 한 편은 음악에 대한 시다. 무언가에 몰입할 때 ‘나’라는 주체는 해체되어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몰입은 나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음악이 ‘나’라는 주체를 어떤 감각적인 촉수들로 변화시키는 경험에 대한 시다.
겨울 저녁,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창가에 앉았을 때
저녁이 물끄러미 얼굴을 디밀어
내가 거울인양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져가는 저녁에는 빈 연못과
대리석 계단들이 차갑게 껴안고 있었다.
저녁이 거울인양 나는 내 모습을 비춰
보기 위해 목을 빼고 눈알에 힘을 주고
저녁을 향해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어떤 한 순간 나는 저녁의 피부를 뚫고
두개골을 투시하며, 저녁의 뇌 속을
들여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빈 나뭇가지와 회색빛 얇은 하늘에
어둠이 조금씩 미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자신을 비춰보는 저녁의
감정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저녁의 뇌
속으로 나를 흘려보내는 나의 예민한
느낌, 단순하고 절제된 비밀 같은 것이었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 속에서 가느다란
돌기를 뻗는 헐떡임, 헐떡임의 촉수였다.
그때, 나를 비춰보던 저녁의 뇌 속에서
신경세포 하나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였다. 나는 그 반딧불이를 좇았으나
사라지고 저녁의 얼굴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구두 속에 감춘 발가락에서 플러그를 꺼내
어느새 벽돌처럼 단단해진 암흑콘센트에 꽂았다.
그건 내 무의식의 애액 없이 메마른 질 입구였다.
은밀한 투명무늬
내 숨소리 사이에 섞이는 낯선 숨소리.
누군가 있는가?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없다라고 해야 될 텐데……
내 숨소리? 이게 내 숨소린가?
숨소리가 낯설다고 귀가 생각한다.
귀만 내 것이고 이 하얀 손이 이물스럽다.
손은 제 무게에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결국 제 몸을 부수고 흩어지는 흰 물결로 날름거린다.
이렇게 나를 줄곧 바라보는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가?
눈은 내 안에 출렁거리는 물결만 바라본다.
유리를 투과하는 빛처럼 살과 뼈를 투과하여
끊임없이 움직이고, 뻗고 도르르 말리고 뱉어내는
바다, 눈은 바다가 지어내는 무늬만을 겨냥해왔다.
끝없이 명멸하는 반짝임.
어딘가에 부딪혀 찌그러지고 상한
너울거리는 두꺼운 물을 뚫고 바닥모래에 너울거리는
빛과 무늬. 고통과 기쁨으로 애매하게 번지며
상심에 공명하여 증폭하는 투명무늬를
끈덕지게 바라본다.
이때쯤 바라보는 그 눈이 내 눈이었는지
지금도 내 눈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
숨소리를 의식하는 귀는 흰 물결로
거듭 튀어 오르고 부글거리며, 조금씩의 공기를 소유하는
거품의 오른손 새끼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까지
왼손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관절을
오므리고 펼치는 건반 위의 흰
소리의 이물감을 그 무엇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허공에 파종하고, 상심에 닿아 튀는 무늬들을
달팽이관으로 불러들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