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글 김성규 ㅣ 시인. 1977년생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
거해가나』 등
네 번째
어릴 때부터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어렴풋이 글을 쓰게 될 거 같은 예감을 했고 고등학교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나는 영국사를 찾아갔다. 옥천 읍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다 내리면 산골에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길을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가면 영국사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온다. 숲길을 걸어 또한 시간을 넘게 걸으면 다시 고갯길이 나오고 고개를 넘자마자 거대한 은행나무가 한눈에 보인다.
우리나라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는 절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충북 영동의 영국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이다. 두 절에 얽힌 설화는 모두 현실을 뒤로 한 자들과 관련 있다.
영국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절로 피난하여 치성을 드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하고 그래서 영국사(寧國寺)라 개명하여 현판 글씨를 써줬다고 한다. 영국사 가는 길에는 삼신할멈바위라 불리는 곳에 돌탑이 쌓여있다. 암벽 사이 움푹 패인 곳에 돌탑을 쌓아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용문사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영국사 은행나무는 가지가 땅으로 내려와 다시 뿌리를 뻗었고 그 뿌리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난 기이한 모양을 갖고 있다.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지만 지상의 세계가 지하의 세계로 내려갔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는 신비한 구조에 사람들은 감탄한다.
혼란을 피해 기거할 곳을 찾는 자들이 집고 다녀야 하는 지팡이, 눈 먼 자들이 세상을 두드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할 때 쓰이는 지팡이. 그 떠돌이가 어느 한곳에 자리 잡으면 고난 받은 자들의 여행은 끝을 맺는다. 모세가 홍해를 두드릴 때 사용한 지팡이는 기적을 불러온다. 그 기적을 위해 일주문을 통과할 때 스님들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
인환(人 )의 거리가 싫어 나는 신성한 것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른다. 시는 나에게 인간 세상과 거리가 먼 성처럼 보였고 그래서 시의 성에 들면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나와 먼 곳의 세계가 그리웠고 점점 먼 세계를 찾아 길을 나섰다.
중국 고사에 나온 등용문이라는 말도 물고기들이 물결을 거슬러 절벽을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전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갯가에서 태어나 비린내를 풍기며 나는 시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왔다. 시란 신성한 것이므로 나의 비린내를 행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점점 내가 태어난 갯가가 그리웠고 속세의 색이 화려해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을 구하며 색의 세계를 헤엄치다 보니 나는 어느새 과거의 나를 잊고 사는 것 같다. 성과 속이 본디 하나라고 하지만 아직 그 경지를 알 수 없기에 나는 계속 이 세계의 밑바닥을 기어간다.
잉어가 용이 되지 못하고 뱀의 세계에 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잉어는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었을까. 공교롭게도 나는 용띠로 태어나 뱀띠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12월 말에 태어났고 출생신고가 잘못되어 한 살 늦게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의 신성성 보다는 뱀의 인간다움이 마음에 끌린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서투름으로 살다가 그 서투름으로 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실수투성이의 인생을 살면서 한 인간은 인간 속에서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자랑스럽겠는가. 그러나 한때 하늘을 바라보던 나무들이 지쳐 흙 쪽으로 가지를 내리듯 이제는 나의 시가 타인을 미혹시키기 위해 쓰여지고 있지 않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천 년 전부터 살아왔고 산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은행나무. 그 나무의 가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세상과 떨어진 절간을 찾아 몰려와 나무의 화려한 죽음을 목격하며 사람들은 감탄한다. 한 번 피었다 지는 꽃처럼 가을에 수많은 잎사귀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은행나무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겨울이면 다시 태어나 떨고 있다. 은행잎은 나무가 입고 있는 비늘처럼 바람에 날리고 사람들은 그 비늘을 하나씩 주워 품속에 넣고 다닌다. 언젠가 그 비늘이 다시 살아나 이 세상 어딘가를 헤엄쳐 다닐 것처럼 고이 책속에 넣어둔다. 나의 시도 누군가의 품에서 말라 바스라질지라도 언젠가 마른 은행잎을 보면서 잠깐 쓴웃음을 짓는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