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리처드 스콧 씨에게
글 김병운 ㅣ 소설가. 1986년생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소설 부문,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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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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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무렵, 리처드 스콧 씨, 당신을 봤습니다.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L호텔에서였죠.
제가 그곳에 갔던 건 결혼식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정이 좀 생겨서 - 제가 아빠가 된다고 합니다 - 급히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밭아서 그런지 식장을 구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더군요. 저희는 수소문 끝에 L호텔에 자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행여나 누가 채가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급히 호텔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약 상담을 받고 나니 내심 우려했던 문제가 드러나더군요. 다행히 원하는 날짜에 예약은 가능했습니다만, 그 비용이라는 게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거죠.
여자 친구는 빚을 지더라도 여기서 결혼해야 한다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배는 점점 더 불러오고 식장은 구해지지도 않으니, 스트레스가 무척 심했을 테죠. 결국, 그녀는 호텔 로비 한 가운데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이내 엉망이 된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애써 그녀를 달래주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 자리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요.
검은색 모직 코트를 입은 중년의 흑인이 제 앞으로 지나간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는 널찍한 보폭으로 로비를 거쳐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갔고, 곧바로 정문 앞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저는 흑인의 짧고 곱슬곱슬한 잿빛 머리카락과 주름진 이마와 두툼한 입술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차례로 눈에 담았습니다. 여느 운동선수 못지않은 큰 키와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덩치도 부지런히 눈으로 쫓았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택시에 올라탄 남자가 리처드 스콧 씨, 당신이라는 걸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택시는 진작 제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저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여자 친구의 코맹맹이 소리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녀는 말끔해진 얼굴로 이 호텔은 화장실마저 끝내준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오빠도 직접 가보면 맘이 바뀔 거라면서 저를 억지로 화장실로 끌어당겼죠. 그때 저는 그 빌어먹을 번쩍거리는 화장실이나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당신을 뒤쫓았어야 했어요. 리처드스콧 씨, 당신을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는 제가 본 중년의 흑인이 진정 당신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행여나 제가 잘못 봤거나 착각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정이 아닌 확신을 하게 되고, 의심이 아닌 자신을 하게 됩니다. 그 남자는 정말이지 당신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당신과 똑같았으니까요. 이제는 주름살도 생겼고 배도 나왔고 머리 모양도 바뀌었지만, 그것 역시도 당신이었으니까요. 어쩌면 당신이 22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저는 당신이 확실하다는 심증에 무게를 싣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비명횡사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제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요. 당신이 죽지 않았다던 제 어머니와 누이의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그동안 제가 단단히 착각하며 살아왔던 걸까요? 아, 그래도 좋으니, 부디 제가 본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 당신이었기를 바랍니다. 정말 당신이었다면 답장을 주세요. 한때 당신이 잠깐 살았던 그 작은 동네를, 그리고 그 동네에 딱 하나뿐이던 슈퍼집의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를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부디 이 주소로 안부를 전해주세요.
• 2014년 1월 4일 •
어젯밤 꿈에 당신이 나왔습니다. 당신을 본 이후로 저는 당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데, 그래서인지 꿈에서까지 당신에 관한 기억이 재현되더군요.
당신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그러니까 어머니와 누나와 저는 어머니가 홀로 꾸려갔던 자그마한 슈퍼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게 입구 쪽에 놓인 널찍한 평상에서 더위도 식히고 방금 먹은 저녁밥도 소화할 겸 늘어져 있었죠. 보통 평상은 할 일 없는 동네 어르신들이 죽치고 앉아 행인을 구경하는 자리였지만, 그때는 어스름이 짙어 갈 무렵인지라 어르신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때 저는 사탕을 열심히 빨고 있었고, 누나는 만화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끊임없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란 주로 근거 없는 소문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나이와 출신과 결혼여부와 같은 신상 정보에 관한 것들이었죠. 어머니는 출처가 복덕방 여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당신이 삼십 대 중반이고, 미국 출신이며,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싱글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어머니는 당신이 사십대 초반이고, 프랑스인지 튀니지인지 남아프리카인지 하는 나라에서 왔으며, 고국에 와이프와 딸이 하나 있다고 했으니까요. 물론 그 역시도 출처는 복덕방 여자라면서 전한 것이었고요. 당신이 시내에 있는 외국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것만이 당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였고, 그건 당신이 종종 학원의 이름과 로고가 새겨진 종이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부색이 까맣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었고, 필요 이상의 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단조롭고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 흥미로운 일이 하나 생긴 거였죠. 우리 세 식구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요, 촌구석에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영화 속에서나 보던 흑인과 이웃사촌이 되는 것은 퍽 생경한 일이었으니까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 년 전, 서울의 변두리에서 살았던 우리는 그냥 당신이란 존재가 신기했던 겁니다.
그때 어머니가 늘어놓는 장광설을 시큰둥하게 흘려듣는 듯했던 누나가 만화책에서 눈을 떼며 말했습니다.
- 근데 엄마, 자꾸 말끝마다 깜둥이, 깜둥이 하는데, 다른 데 가서는 그러지 마. 깜둥이가 뭐야, 깜둥이가. 요즘 같은 지구촌 시대에 못 배운 사람처럼. 진짜 그런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해. 얼마 전에 미국에서 난리 났던 거 몰라? 한국 사람도 하나 죽었다며.
누나는 ‘깜둥이’란 말은 인종 차별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으니, 반드시 ‘흑인’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까매서 깜둥이라 한 게 무슨 큰 잘못이냐고, 그 사람이 까맣지 않으면 내가 왜 굳이 깜둥이라고 하겠느냐고 투덜거렸고, 이내 누나의 팔뚝을 꼬집으며 쏘아붙였습니다.
- 그래, 내 돈으로 많이 배워서 좋겠다, 이년아. 그렇게 똑똑하면서 왜 대학은 못 갔을까? 왜 재수를 하고 있으실까? 밤새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여기서 만화책이나 들여다보고 있을까? 응?
리처드 스콧 씨, 당신이 가게 앞으로 지나간 건 바로 그즈음이었습니다. 당신은 살짝 달라붙는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가죽 재질의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겠죠. 저는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잠시 꺼내 들고는 이렇게 소리쳐 당신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 깜둥이다! 깜둥이!
어머니는 급히 제 입을 틀어막으며 숨 죽였으나, 당신은 이미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하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린 것이었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당신은 불쾌한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그 뜻을 알 면서도 그리 개의치 않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오히려 우리를 향해 먼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하이’하고 인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닌 누나를 향한 인사였지만요.
왜 당신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해지려는 찰나, 누나가 먼저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습니다. ‘하이’하고 소리도 내면서요. 당신은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 번 미소로 응답했고, 누나는 애써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지극히 어색해 보이긴 했으나, 어쨌든 아는 사이에서 오가는 인사인 것은 분명했죠. 이윽고 당신은 다시 발길을 돌렸고, 보폭이 넓은 걸음걸이로 우리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외계에서 온 생명체라도 되는 양, 들판에서 뛰어다니는 야생 동물이라도 되는양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상이 남은 것처럼 한동안 멍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누나에게 물었습니다.
- 너, 방금 저 사람 알아?
누나와 저는 거의 동시에 어머니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 그럼 몰라? 엄마가 아까부터 계속 얘기했던 그 깜둥이잖아.
- 내 말은 잘 아느냐고. 왜 그렇게 인사를 해? 친해? 어떻게 알아?
- 그저껜가 그끄저껜가 밤에 엄마 대신 내가 가게 잠깐 봤을 때 가게에 왔었어. 그때 인사했어. 새로운 이웃이라면서 잘 부탁한다고 해서 알았다고 했어. 이것저것 찾는 게 많아서 친절하게 도와줬더니 고맙다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라고.
- 왜 바로 말 안 했어? 왜 그걸 지금 말해?
- 지금 물어봤잖아.
- 뭘 샀는데?
- 뭐?
- 저 사람이 뭘 샀냐고.
- 그걸 엄마가 알아서 뭐하게. 나도 몰라.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해? 그게 뭐가 중요한-
어머니가 누나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습니다.
- 너 앞으로 절대로 저 사람이랑 아는 척 하지 마. 인사도 하지 마. 알겠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는 누나에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 너 그러다 시집 못 가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봐. 모르는 척 하면서도 다 안다고. 몰라서 그래?
- 그럼 먼저 아는 척 하는데 모른 척 해? 인사도 하지 마?
- 그래, 하지 마.
어머니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만 계속 만지작거렸습니다. 누나는 도대체 엄마가 왜 저러는 거냐고, 너라도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 봤는데, 저는 어머니가 왜 화를 내는 건지, 누나가 왜 얼굴이 벌게져서는 말을 잇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당신은 왜 나와는 달리 피부색이 새까만 건지,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막대사탕이나 입에 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봄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