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다시 읽는 우리 문집
박제가의 『정유각집』
◆ 모방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송재소 선생님으로부터 박제가(1750~1805)의 문집을 읽는 수업을 들었다. 한시 전공인 송 선생님은 산문보다는 시를 중심으로 문집을 읽어갔는데, 한시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송 선생님의 시를 보는 안목과 빼어난 해석 덕분이기도 하지만, 박제가 시의 참신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읽었던「종이연」이라는 시를 보자.
바람은 휙휙 風吹吹
대추나무 흔들흔들 棗搖搖
나무들로 둘러싸인 겨울의 도성 寒城帶喬木
텅 빈 들판에 하늘마저 적막하다 野曠天寂寥
고개 돌리니 먼 산등성이엔 눈 쌓여 있고 回看山際雪嵯峨
해를 등진 종이연 구름 속에서 나부끼네 鳶尾背日輕雲飄
겨울날 연 날리는 모습을 산뜻하게 그려냈다. 3-5-7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한시만 보아도 연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추나무-도성-산-구름으로 나아가며 원근법의 구도로 시를 풀어내 마치 연을 날리는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고시니, 절구니, 율시니 하는 틀에 박힌 한시가 아니다. 한문으로 썼지만, 200년 전에 이미 자유시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박제가는 글쓰기에서 고정관념이나 틀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박제가의 산문 가운데에 「소전(小傳)」이 있다. 미니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이 시작된 지 384년,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곳. 그가 태어난 좌표이다. 가계는 신라에서 나왔고, 할아버지의 관향은 밀양이다. 『대학』에서 뜻을 따와 ‘제가(齊家)’라고 이름을 짓고 초나라 굴원의 「이소경」에 의탁해 ‘초정(楚亭)’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
모눈종이에 좌표를 찍듯, 출생의 시공간을 설정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인상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가 아니라 ‘그’라는 3인칭으로 풀어낸 것도 독특하다. 이러한 개성 있는 글쓰기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소전」의 끝에 붙인 「찬(贊)」이라는 운문시를 보자.
대저 전(傳)이란 전한다는 뜻이다. / 비록 그의 조예를 다 드러내고 / 그 품격을 다 설명할 수
는 없다 해도, / 완연히 특정한 한 사람일 뿐 / 그저 그런 천만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뒤라
야, / 아득히 먼 천애(天涯)의 땅에 가거나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 누구나 나의 존재를 만나
게 될 것이다.
박제가는 전기를 한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것이라고 정의한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삶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남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전(傳)의 임무라는 것이다. 천만의 무수한 사람들과다르게 그려내야 한 인물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처럼 다르게 써야 한다는 박제가의 문학관은 시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시학론(詩學論)」에서 “모범으로 삼아 배운 시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시인의 수준은 도리어 낮아진다”며 두보나 이백 같은 유명한 시인을 모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경』을 읽는 것보다 차라리 무당의 노래에 주목하라는 파격적인 발언도 내놓는다. 박제가의 이러한 시론은 친구 이덕무가 『정유각집』 서문에 쓴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시는 서로 모방할 수가 없다. 서로 모방하며 지은 시는 가짜 시다(代各有詩, 人各有詩. 詩不可相襲, 相襲贋詩也).”
◆ 서얼들의 시동인 그룹 ‘백탑파’ ◆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난 박제가는 어린 나이에 시와 글씨에 재능을 보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박제가에겐 ‘서얼’이라는 신분적인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한다 해도 양반 사대부처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차별과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데 주위에는 박제가처럼 사회적 차별을 받으며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서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서로 의기투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백동수의 서얼들과 어울렸다. 이들의 집은 대부분 탑골(지금의 종로3가 탑골공원) 부근에 있어 수시로 만나 시를 짓고 우정을 나누며 세상을 논했다. 여기에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와 같은 현실 비판적인 학자들이 가세했다. 탑골에는 하얀탑(원각사지10층석탑)이 있어 이들의 모임은 ‘백탑파’로 불렸다. 백탑파의 일원이었던 박지원,이덕무, 박제가, 이희경은 자신들의 시문을 모은 『백탑청연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전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시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탑파가 아무리 좋은 시를 써도, 조선 사회를 개혁할 발언을 내놓아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신분제적 유교 질서가 깊게 뿌리내린 데다 당파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조선 사회에서 이들은 주류로 편입될 수 없었다. 이즈음 박제가 등의 백탑파가 눈을 뜬 것은 청나라였다. 마침 청나라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이 쓴 『연행기』와 『회우록』은 박제가에게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할 바에 차라리 나라 밖에서 인정을 받자,북쪽 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파’의 싹은 이때 트였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은 함께 각자의 대표 시들을 모아 선집으로 묶은 뒤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는 유금에게 시집을 부탁했다. 유금 역시 백탑파 동인이었다. 북경에 간 유금은 보따리에 싼 『사가시선(四家詩選)』을 이조원, 반정균 등에 보여주며 비평을 부탁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네 명의 조선 문인이 쓴 시를 본 이조원은 시집을 『한객건연집』(‘보자기에 싼 조선인들의 문집’이라는 뜻)이라고 명명한 뒤 하나하나 비평문을 써 주었다. 이조원은 박제가의 시를 “온갖 문장의 맛이 갖추어 있어 천하의 기문(奇文)”이라고 칭찬했다. 반정균도 “초정의 시는 손을 빼는 솜씨가 탄환과 같아 전혀 편벽되거나 껄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청나라를 사모했던 박제가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연행사로 북경에 갈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생애에 한 번도 아닌 4번이나 북경에 갔다. 규장각 검서관이나 현감 정도의 낮은 벼슬에 있었던 박제가가 4번씩이나 연행 사절에 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가 북경에 당도하였을 때, 그는 이미 북경의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한객건연록』의 영향이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가는 곳마다 그의 시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박제가는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을 ‘회인시(懷人詩)’로 남겼는데, 2~3차 연행 때 쓴 회인시의 주인공만 93명이나 됐다. 이때의 모습을 청나라의 문인 홍양길은 『북강시화』에 이렇게 적었다. “박제가는 사신으로 들어와 중국의 사대부를 사모하여 매번 안면을 트면 문득 시를 한 수씩 짓곤했다.” 북경의 문인들도 시와 그림으로 화답했다. 화가 나빙은 매화도와 박제가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로 주었다. 진전이라는 문인은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고략』을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박제가는 200여 년 전에 이미 ‘한류 스타’였다.
◆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게 시(詩) ◆
초정 박제가가 앞 세대의 문인들과 구분되는 것은 문학을 성리학으로부터 해방시켜 고유의 영역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문예 창작을 심성 수양의 방편이나 소일거리로 여기던 성리학적 문학관을 과감히 벗어 던졌다. 대신 그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노래했다. 『정유각집』에 실린 「달여울 잡절(月瀨雜絶)」 연작시 가운데 첫 수는 이러하다.
‘붉다’는 하나의 글자를 가지고 毋將一紅字
온갖 꽃 통틀어 말하지 말라 泛稱滿眼華
꽃술엔 많고 적음 차이 있으니 華鬚有多少
세심하게 하나하나 보아야 하리 細心一看過
박제가는 시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꽃을 노래할 때, 아름다운 꽃이라고 범칭하는 것은 그 꽃을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니다. 범칭과 통념을 뿌리치고 그 꽃만의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아서 이야기할 때 그 꽃의 아름다움이 전달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의 독자성을 찾아내 시인 자신의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라고 보았다.
박제가에게 시의 소재는 따로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시(詩)’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계절의 변화, 자연의 형태와 색깔, 울림만 제대로 살펴도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생동감 있고 참신한 글을 쓰는 최고의 방법은 자연을 배우고 본받는 일이다. 「집에 머무르며」라는 시는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빛 때마침 푸르고 넓어 天光正綠闊
오늘 하루 노닐기 꼭 알맞겠네 今日好逍遙
흰 구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 白雲望可飽
거닐며 읊조리며 노래 부른다 行吟以爲謠
시는 근엄하지도 않고 일상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박제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먹고 사는 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푸른 산과 흰 구름을 좋아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겠는가?”라며 실용과 관계없는 아름다움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도 시의 소재였다. 연못, 누각, 접시꽃, 종이연 등 보이는 것은 다 시로 쓸 수 있었다. 박제가의 일상 시 가운데에는 변소를 소재로 한 「측상(廁上)」이라는 시도 있다.
박제가는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벽(癖, 어떤 일에 몰두하는 버릇)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인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박제가가 꽃 백과사전인 『백화보』의 저자에게 바치는 헌사이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시벽(詩癖)으로 당시 통념과 맞서고자 했다. 두보나 이백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에서 배우려 했으며 여행과 같은 생생한 체험을 시에 반영하려 했다.
박제가가 남긴 시는 1천721수이다. 산문 123편에 비하면 15배 이상 많은 분량이다. 그의 시는 젊은 날에 쓴 자연시, 백탑 동인 시절의 교유시, 네 차례 연행시절에 쓴 연행시, 만년 유배지에서 쓴 시 등 다양하다. 그러나 박제가의 시의 작품세계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다. 시문집이 완역되지 않아 소수의 학자들 사이에서만 조명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2010년 한양대 정민, 이승수 교수팀이 『정유각집』(전3권, 돌베개)을 완역 소개하면서 누구나 그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박제가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북학의』만 논의되었을 뿐이다. 박제가는 사상적으로는 북학파의 핵심 멤버였지만, 문학적으로는 근대적 미의식을 도입한 선구적 시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며 일상의 구석구석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를 읽으면 김영랑, 박두진의 작품을 읽는 듯한 감흥을 준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박제가에게 북학파 사상가뿐 아니라 시인의 칭호를 부여할 때가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시(詩)”
글과 사진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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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정유각집』
◆ 모방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송재소 선생님으로부터 박제가(1750~1805)의 문집을 읽는 수업을 들었다. 한시 전공인 송 선생님은 산문보다는 시를 중심으로 문집을 읽어갔는데, 한시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송 선생님의 시를 보는 안목과 빼어난 해석 덕분이기도 하지만, 박제가 시의 참신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읽었던「종이연」이라는 시를 보자.
바람은 휙휙 風吹吹
대추나무 흔들흔들 棗搖搖
나무들로 둘러싸인 겨울의 도성 寒城帶喬木
텅 빈 들판에 하늘마저 적막하다 野曠天寂寥
고개 돌리니 먼 산등성이엔 눈 쌓여 있고 回看山際雪嵯峨
해를 등진 종이연 구름 속에서 나부끼네 鳶尾背日輕雲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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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연 날리는 모습을 산뜻하게 그려냈다. 3-5-7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한시만 보아도 연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추나무-도성-산-구름으로 나아가며 원근법의 구도로 시를 풀어내 마치 연을 날리는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고시니, 절구니, 율시니 하는 틀에 박힌 한시가 아니다. 한문으로 썼지만, 200년 전에 이미 자유시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박제가는 글쓰기에서 고정관념이나 틀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박제가의 산문 가운데에 「소전(小傳)」이 있다. 미니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이 시작된 지 384년,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곳. 그가 태어난 좌표이다. 가계는 신라에서 나왔고, 할아버지의 관향은 밀양이다. 『대학』에서 뜻을 따와 ‘제가(齊家)’라고 이름을 짓고 초나라 굴원의 「이소경」에 의탁해 ‘초정(楚亭)’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
모눈종이에 좌표를 찍듯, 출생의 시공간을 설정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인상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가 아니라 ‘그’라는 3인칭으로 풀어낸 것도 독특하다. 이러한 개성 있는 글쓰기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소전」의 끝에 붙인 「찬(贊)」이라는 운문시를 보자.
대저 전(傳)이란 전한다는 뜻이다. / 비록 그의 조예를 다 드러내고 / 그 품격을 다 설명할 수
는 없다 해도, / 완연히 특정한 한 사람일 뿐 / 그저 그런 천만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뒤라
야, / 아득히 먼 천애(天涯)의 땅에 가거나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 누구나 나의 존재를 만나
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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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는 전기를 한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것이라고 정의한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삶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남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전(傳)의 임무라는 것이다. 천만의 무수한 사람들과다르게 그려내야 한 인물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처럼 다르게 써야 한다는 박제가의 문학관은 시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시학론(詩學論)」에서 “모범으로 삼아 배운 시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시인의 수준은 도리어 낮아진다”며 두보나 이백 같은 유명한 시인을 모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경』을 읽는 것보다 차라리 무당의 노래에 주목하라는 파격적인 발언도 내놓는다. 박제가의 이러한 시론은 친구 이덕무가 『정유각집』 서문에 쓴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시는 서로 모방할 수가 없다. 서로 모방하며 지은 시는 가짜 시다(代各有詩, 人各有詩. 詩不可相襲, 相襲贋詩也).”
◆ 서얼들의 시동인 그룹 ‘백탑파’ ◆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난 박제가는 어린 나이에 시와 글씨에 재능을 보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박제가에겐 ‘서얼’이라는 신분적인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한다 해도 양반 사대부처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차별과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데 주위에는 박제가처럼 사회적 차별을 받으며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서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서로 의기투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백동수의 서얼들과 어울렸다. 이들의 집은 대부분 탑골(지금의 종로3가 탑골공원) 부근에 있어 수시로 만나 시를 짓고 우정을 나누며 세상을 논했다. 여기에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와 같은 현실 비판적인 학자들이 가세했다. 탑골에는 하얀탑(원각사지10층석탑)이 있어 이들의 모임은 ‘백탑파’로 불렸다. 백탑파의 일원이었던 박지원,이덕무, 박제가, 이희경은 자신들의 시문을 모은 『백탑청연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전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시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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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탑파가 아무리 좋은 시를 써도, 조선 사회를 개혁할 발언을 내놓아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신분제적 유교 질서가 깊게 뿌리내린 데다 당파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조선 사회에서 이들은 주류로 편입될 수 없었다. 이즈음 박제가 등의 백탑파가 눈을 뜬 것은 청나라였다. 마침 청나라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이 쓴 『연행기』와 『회우록』은 박제가에게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할 바에 차라리 나라 밖에서 인정을 받자,북쪽 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파’의 싹은 이때 트였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은 함께 각자의 대표 시들을 모아 선집으로 묶은 뒤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는 유금에게 시집을 부탁했다. 유금 역시 백탑파 동인이었다. 북경에 간 유금은 보따리에 싼 『사가시선(四家詩選)』을 이조원, 반정균 등에 보여주며 비평을 부탁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네 명의 조선 문인이 쓴 시를 본 이조원은 시집을 『한객건연집』(‘보자기에 싼 조선인들의 문집’이라는 뜻)이라고 명명한 뒤 하나하나 비평문을 써 주었다. 이조원은 박제가의 시를 “온갖 문장의 맛이 갖추어 있어 천하의 기문(奇文)”이라고 칭찬했다. 반정균도 “초정의 시는 손을 빼는 솜씨가 탄환과 같아 전혀 편벽되거나 껄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청나라를 사모했던 박제가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연행사로 북경에 갈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생애에 한 번도 아닌 4번이나 북경에 갔다. 규장각 검서관이나 현감 정도의 낮은 벼슬에 있었던 박제가가 4번씩이나 연행 사절에 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가 북경에 당도하였을 때, 그는 이미 북경의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한객건연록』의 영향이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가는 곳마다 그의 시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박제가는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을 ‘회인시(懷人詩)’로 남겼는데, 2~3차 연행 때 쓴 회인시의 주인공만 93명이나 됐다. 이때의 모습을 청나라의 문인 홍양길은 『북강시화』에 이렇게 적었다. “박제가는 사신으로 들어와 중국의 사대부를 사모하여 매번 안면을 트면 문득 시를 한 수씩 짓곤했다.” 북경의 문인들도 시와 그림으로 화답했다. 화가 나빙은 매화도와 박제가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로 주었다. 진전이라는 문인은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고략』을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박제가는 200여 년 전에 이미 ‘한류 스타’였다.
◆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게 시(詩) ◆
초정 박제가가 앞 세대의 문인들과 구분되는 것은 문학을 성리학으로부터 해방시켜 고유의 영역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문예 창작을 심성 수양의 방편이나 소일거리로 여기던 성리학적 문학관을 과감히 벗어 던졌다. 대신 그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노래했다. 『정유각집』에 실린 「달여울 잡절(月瀨雜絶)」 연작시 가운데 첫 수는 이러하다.
‘붉다’는 하나의 글자를 가지고 毋將一紅字
온갖 꽃 통틀어 말하지 말라 泛稱滿眼華
꽃술엔 많고 적음 차이 있으니 華鬚有多少
세심하게 하나하나 보아야 하리 細心一看過
박제가는 시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꽃을 노래할 때, 아름다운 꽃이라고 범칭하는 것은 그 꽃을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니다. 범칭과 통념을 뿌리치고 그 꽃만의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아서 이야기할 때 그 꽃의 아름다움이 전달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의 독자성을 찾아내 시인 자신의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라고 보았다.
박제가에게 시의 소재는 따로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시(詩)’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계절의 변화, 자연의 형태와 색깔, 울림만 제대로 살펴도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생동감 있고 참신한 글을 쓰는 최고의 방법은 자연을 배우고 본받는 일이다. 「집에 머무르며」라는 시는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빛 때마침 푸르고 넓어 天光正綠闊
오늘 하루 노닐기 꼭 알맞겠네 今日好逍遙
흰 구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 白雲望可飽
거닐며 읊조리며 노래 부른다 行吟以爲謠
시는 근엄하지도 않고 일상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박제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먹고 사는 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푸른 산과 흰 구름을 좋아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겠는가?”라며 실용과 관계없는 아름다움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도 시의 소재였다. 연못, 누각, 접시꽃, 종이연 등 보이는 것은 다 시로 쓸 수 있었다. 박제가의 일상 시 가운데에는 변소를 소재로 한 「측상(廁上)」이라는 시도 있다.
박제가는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벽(癖, 어떤 일에 몰두하는 버릇)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인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박제가가 꽃 백과사전인 『백화보』의 저자에게 바치는 헌사이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시벽(詩癖)으로 당시 통념과 맞서고자 했다. 두보나 이백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에서 배우려 했으며 여행과 같은 생생한 체험을 시에 반영하려 했다.
박제가가 남긴 시는 1천721수이다. 산문 123편에 비하면 15배 이상 많은 분량이다. 그의 시는 젊은 날에 쓴 자연시, 백탑 동인 시절의 교유시, 네 차례 연행시절에 쓴 연행시, 만년 유배지에서 쓴 시 등 다양하다. 그러나 박제가의 시의 작품세계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다. 시문집이 완역되지 않아 소수의 학자들 사이에서만 조명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2010년 한양대 정민, 이승수 교수팀이 『정유각집』(전3권, 돌베개)을 완역 소개하면서 누구나 그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박제가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북학의』만 논의되었을 뿐이다. 박제가는 사상적으로는 북학파의 핵심 멤버였지만, 문학적으로는 근대적 미의식을 도입한 선구적 시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며 일상의 구석구석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를 읽으면 김영랑, 박두진의 작품을 읽는 듯한 감흥을 준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박제가에게 북학파 사상가뿐 아니라 시인의 칭호를 부여할 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