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목넘이마을의 개

헤테로토피아를 창조하는 여정

평론가 염무웅 선생과의 만남

춘원 이광수와의 대화

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시(詩)”

식민지 조선의 애수, 목포극장과 동춘서커스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밀어(密語) 등 도마 위의 잠 등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내 마음이 보여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그건 대체 누가 썼던 걸까

그 후로 바보 한스는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잠복근무 중인 아버지

이태준과 파블로 네루다, 두 거장의 조우

소설 암호로 역사 해독하기

, 처절함

쟤네 또 싸운다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2016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 ·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내 글쓰기의 스승

그 후로 바보 한스는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글 손보미 ㅣ 소설가, 1980년생
소설 『그들에게 린디합을』 등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나와 생년월일이 약 22개월 차이가 나는, 그렇지만 어쨌거나 연년생인 동생의 출생지는 창원이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은 꽤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나와 네 살 터울의 막내 동생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나는 초등학교는 창원과 마산에서 다녔지만, 중학교는 서울에서 졸업한 식이다. 아버지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고, 아버지가 당시 다니던 회사의 구성원들이 함께 겪었던 문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창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살았던 5층짜리 계단식 아파트 한 동에는 거의 절반 정도가 그런 식으로 서울에서 직장 때문에 내려온 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택 같은 개념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같은 동에 살던 가족들 대부분이 꽤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게 그 시절의 자연스러운 모습인지, 아니면 내가 살던 아파트의 특징—그러니까,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급이 거의 같은 아빠와, 서로들 비슷한 연령대의 엄마들, 그리고 또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모여 사는 그런 아파트—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그 친밀함에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고 느낀다.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 그대로 “유별났다.” 엄마가 우리를 놔두고 불가피하게 외출할 일이 생기면 3층이나 4층에 가서 점심밥을 먹는 건 예사였고. 초등학교 선생 출신이라는 친구네 엄마—물론 아빠는 같은 회사 직원이셨다—가 사는 501호에 모여서 줄다리기나 끝말잇기 같은 게임을 하거나 동요를 배울 때도 있었다. 우리 집은 종교가 특별히 없었는데 5층에 사는 친구랑 친구 가족을 따라 성당에 갈 때도 있었고 3층에 사는 친구와 친구 가족을 따라 교회에 갈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종교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그러니까 여섯, 일곱 살쯤 되었을 무렵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구연 동화였다. 아마도 얇은 책 열 권이 한 세트였던 것 같고 책 속에는 직접 색연필로 색칠을 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구연 동화 테이프이다. 사실,지금에 와서는 책의 내용이나 제목은 거의 기억에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구연동화를 읽던 테이프 속의 목소리이다. 약간 과장되고 활기차고 들뜬 목소리. 내가 기억하는 문장도 있다. “그 후로 바보 한스는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러니까, 「바보 한스」는 구연 동화 시리즈 중에 내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잠깐,단 하나의 “이야기”라고?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나는 「바보 한스」의 줄거리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바보 한스」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내 머리맡에는 작은 카세트 테이프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구연 동화 테이프가 들어 있다. 아침 일찍—가족들 그누구도 일어나기 전—에 눈을 뜬 나는 배를 깔고 누워 카세트 테이프의 앞으로 감기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러본다. 그런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내가 듣고 싶은 정확한 부분까지 간다. 내가 정확하게 듣고 싶은 부분—그게 바로 「바보 한스」이다. 그리고 그 테이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 후로 바보 한스는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대학에 들어와 첫 소설을 쓴 이후로 무언가 막힐 때마다 나는 「바보 한스」를 떠올려보곤 했다. 매일 아침 카세트 테이프 속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고, 바보 한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그리고 결국엔 사람들 앞에서 「바보 한스」를 구연한 나 자신을 떠올려보곤 했다.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바로 거기에 내 자신이 글을 대하는 방식과 무수한 실패, 앞으로 내가 써 나가야 하는 것이 압축적으로 들어있다고 느낀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바보 한스」를 구연한 적도 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오후에 엄마들이 한 집에 모이고 자연스럽게 우리들도 엄마들을 따라 모인다. 그리고 친구들이 한 명씩 장기자랑 같은 걸 하는 거다. 구구단을 외우는 애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애도 있었다. 대체 왜 그런 걸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떤 쪽이었냐 하면 이도 저도 별로 하기 싫고 그냥 친구들이 하는 걸 지켜보는 게 좋은 쪽이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사람들에게 「바보 한스」를 들려주기로 했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한스」 는 너무나 멋진 이야기이고 이 멋진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어린 시절 중의 한 장면이다. 떨리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 선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외우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나는 바보 한스에 대해 더듬더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인터넷에서 「바보 한스」에 대해 검색을 했는데 내가 어릴 적 구연했던 「바보 한스」 는 안데르센의 「바보 한스」와는 다른 이야기인 것같다. 내가 구연했던 「바보 한스」의 정확한 줄거리를 잊어버렸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구연을 계속한다. 그리고 「바보 한스」는 끝을 맺는다. “그 후로 바보 한스는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대학에 들어와 첫 소설을 쓴 이후로 무언가 막힐 때마다 나는 「바보 한스」를 떠올려보곤 했다. 매일 아침 카세트 테이프 속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고, 바보 한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리고 결국엔 사람들 앞에서 「바보 한스」를 구연한 나 자신을 떠올려보곤 했다.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바로 거기에 내 자신이 글을 대하는 방식과 무수한 실패, 앞으로 내가 써 나가야 하는 것이 압축적으로 들어있다고 느낀다. 일곱 살짜리 내가 사람들 앞에서 「바보 한스」를 구연하며 바랐던 건, 이런 것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바보 한스를 응원하는 것. 나는 그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보 한스를 좋아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가 바보 한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그 시절의 나는 바로 그것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