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은 형사였다. 내가 처음 아버지의 직업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무렵이었다. “엄마, 아빠는 경찰이야?” “아빤 경찰 맞아. 그걸 왜 묻니?” “근데 왜 경찰복 입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사복경찰이야. 평상복을 입고 다니면서 나쁜 사람들을 잡는다.” 사복경찰! 같은 단어를 나는 여섯 살 무렵부터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설명하기 위해 외워두어야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그런 탓에 나는 남보다 조금 일찍 배운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잠복근무’ 같은 단어다. 아버지는 잠복근무로 인해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다. “네 아버지는 잠복근무만 나갔다하면 실종된 사람처럼 소식이 없다.” “엄마 잠복근무가 뭐에요?” “범인 잡기 위해 숨어 있는 거야.” “범인이 숨어 있는 거 아니고?” “둘 다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망할 인간들 같으니.” 아버지는 주로 수사계,형사계, 폭력계, 강력계 등으로 부서를 옮겨 다니셨다.
아버지가 청소년 시절에 어떤 경유로 인해 잠복근무가 있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몇 분 이상 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집에선 말이 거의 없고, 바깥에서 경험하신 일에 대해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에 와서 발설(?)하신 적이 없다. 속정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남몰래 자신이 만든 질서가 있고 그걸 신념으로 믿고 계시는 외골수적인 부분이 강한 분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지지를 하는 정당이 어디인지,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인지, 노래방 십팔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야쿠르트를 마실 때에는 두 개씩 드신다. 아버지는 성냥 종류를 오천개 가까이 수집하셨다(다방에 많이 드나들었던 직업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무협지를 읽으셨다(나중에 내가 따라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휘파람을잘 부신다(골목에서 잠복근무 중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은 휘파람이었다). 굳이 애써 아버지의 취향이나 생각 같은 것에 대해서 이처럼 추측 같은 것을 해보는 사람은 가족 중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가까이 갈수록 외로워지는 가족이 존재한다. 힘겹게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얻어낸 경험은 전부 내 쪽에서 상상하거나 체험했던 것들뿐이다. 잠복근무가 특기인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지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몹시 좋지못했다.
어느 글에서 밝힌 바가 있지만 아버지는 의심이 특기인 사람이었다. 이해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가족이 의심의 대상이 되면 집안에 조금 곤란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의심을 남보다 잘 해야만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버지의 삶은 아직도 내게 의문과 암호들로 가득하다.
십대엔 아버지를 피해 열심히 숨어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십대엔 아버지를 내 안에서 숨기느라 바빴다. 삼십대를 넘어 사십대가 되어보니 어느덧 아버지는 혼자 사시며 세상의 언어를 거의 잃어버리시고 사신다. 아버지는 이제 끔벅거리기나 중얼거리시는 것이 일이다.
이제 살아있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어떤 언어를 교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나를 복잡하고 아득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떠오르면 휘파람을 불면서 생각하곤 한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명예퇴직을 하셨다. IMF가 막 시작되는 무렵이었다. 기동력이 요구되는 직업의 특성상 오십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아버지의 나이는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거실에서 퇴임식 준비를 위해 아버지가 정복을 꺼내 입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속일 수 있는 짓이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야산에 가서 친구들과 본드를 불기도 했고, 하숙방이나 자취방에 모여 가스를 돌려 마시기도 했으며, 학교를 자주 빼먹고, 머리를 기르고 다리에 털이 많은 여자애들과 쏘다녔다. 나는 죄
인이 되어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아버지에게 스릴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부터 한 번도 체육대회나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설명할 때마다 “잠복근무 중이셔” 라고 아버지께 알리바이를 만들어 드리곤 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부재 중인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강한 열망은 어린 내 마음에 점점 미움과 상실을 키워갔다. 초등학교의 어느 무렵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와 대중목욕탕에 다녀와서 자랑을 하는 동네아이를 이유 없이 때려주던 나의 심사엔 그러한 복잡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늘 내 안에 잠복 중이었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버지와 표현을 하고 싶은 청소년은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가본 적이 없다. 그나마 대중목욕탕을 아버지와 함께 몇 번 갔던 기억은 평생도록 기묘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는 것은 괴로웠다. 아버지는 퇴임을 한 후 퇴직금을 털어 시내에 작은 달방을 여셨다. 그리고 속칭 일 년 만에 아버지는 그 달방들을 말아먹었다. 평생 군인이나 경찰관이었던 사람들은 의외로 귀가 얇은 탓에 퇴임 후 사업을 했다가 실패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그건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일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후 나는 둘 사이에서 흘러가는 대로 표류했다. 육십이 다 된 아버지는 비파괴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마다 엎드려서 시험공부를 하셨고 몇 개월 후 비파괴검사 자격증을 정말로 땄지만, 노인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쓰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초라해지셨고 순식간에 노인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기동력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는 더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가시며 혀를 차곤 하셨다. “아들이나 아비나 집에서 빈둥거리는 거 보면 속딱지가 생길 것 같다. 나가서 대리운전이라도 하든지.”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대리운전을 했고 아버지도 대리 운전일을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막내 동생이 갓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고아였다. 오남매중 넷째였다. 형제들은 전쟁 통을 버티며 서로를 살려내었다. 너무 추운 날엔 밖에서 자다가 밤새 막내의 발가락을 입안에 넣고 동상을 막아냈고 입에서 숨이 다 빠져나갈까봐 서로 자는 이의 입속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신다고 했다. 어느 날 한참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가 한 여자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한쪽 팔목에 수갑을 나란히 차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갔다. 다섯 식구인 우리가족이 사는 집엔 방이 하나였다. 누군가 옆에 끼면 밤새 뒤척여야한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집에 데려와 수갑을 한쪽씩 차고 잠들고 나가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하게 다투셨다. “아빠 그 사람들은 누구에요? 나쁜 사람들이죠?” “운이 없는 사람들이야.”
아버지는 잔정이 많았다. 속뜻은 모르겠으나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하셨다. 다방여자에게 총을 구경시켜 주다가 오발 사고를 낸 적도 있다. 어느 날은 총을 택시에 두고 내린 적도 있다.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털리고 자존심에 상처가 나서 지역 소매치기 일당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난리를 치신적도 있다(며칠 후 신분증이 담긴 채 그대로 지갑은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엔 자고 있는 어린 나를 깨워서 총을 장전하고 사용하는 법에 대해 떠드신 적도 있다. 아마 열두 살의 나이에 자다가 일어나 매그넘 사용법에 대해서 훈육을 들은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것이다. 나의 첫 장난감은 아버지가 항상 옆구리에 차고 다니시던 권총 벨트와 지갑이었다. 물론 아버지처럼 옆구리에 차고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잠복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잠든 내 발가락을 볼에 부비시곤 하셨다. 분명히 기억한다. 까끌한 아버지의 턱수염이 발가락을 간질이던 그 새벽을. 눈을 감은 채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아직 언어가 부족하다.
잠복근무 중인 아버지
글 김경주 ㅣ 시인, 극작가. 1976년생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 『밀어』 『패스포트』, 시극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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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청소년 시절에 어떤 경유로 인해 잠복근무가 있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몇 분 이상 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집에선 말이 거의 없고, 바깥에서 경험하신 일에 대해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에 와서 발설(?)하신 적이 없다. 속정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남몰래 자신이 만든 질서가 있고 그걸 신념으로 믿고 계시는 외골수적인 부분이 강한 분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지지를 하는 정당이 어디인지,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인지, 노래방 십팔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야쿠르트를 마실 때에는 두 개씩 드신다. 아버지는 성냥 종류를 오천개 가까이 수집하셨다(다방에 많이 드나들었던 직업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무협지를 읽으셨다(나중에 내가 따라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휘파람을잘 부신다(골목에서 잠복근무 중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은 휘파람이었다). 굳이 애써 아버지의 취향이나 생각 같은 것에 대해서 이처럼 추측 같은 것을 해보는 사람은 가족 중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가까이 갈수록 외로워지는 가족이 존재한다. 힘겹게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얻어낸 경험은 전부 내 쪽에서 상상하거나 체험했던 것들뿐이다. 잠복근무가 특기인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지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몹시 좋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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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글에서 밝힌 바가 있지만 아버지는 의심이 특기인 사람이었다. 이해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가족이 의심의 대상이 되면 집안에 조금 곤란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의심을 남보다 잘 해야만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버지의 삶은 아직도 내게 의문과 암호들로 가득하다.
십대엔 아버지를 피해 열심히 숨어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십대엔 아버지를 내 안에서 숨기느라 바빴다. 삼십대를 넘어 사십대가 되어보니 어느덧 아버지는 혼자 사시며 세상의 언어를 거의 잃어버리시고 사신다. 아버지는 이제 끔벅거리기나 중얼거리시는 것이 일이다.
이제 살아있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어떤 언어를 교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나를 복잡하고 아득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떠오르면 휘파람을 불면서 생각하곤 한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명예퇴직을 하셨다. IMF가 막 시작되는 무렵이었다. 기동력이 요구되는 직업의 특성상 오십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아버지의 나이는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거실에서 퇴임식 준비를 위해 아버지가 정복을 꺼내 입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속일 수 있는 짓이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야산에 가서 친구들과 본드를 불기도 했고, 하숙방이나 자취방에 모여 가스를 돌려 마시기도 했으며, 학교를 자주 빼먹고, 머리를 기르고 다리에 털이 많은 여자애들과 쏘다녔다. 나는 죄
인이 되어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아버지에게 스릴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부터 한 번도 체육대회나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설명할 때마다 “잠복근무 중이셔” 라고 아버지께 알리바이를 만들어 드리곤 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부재 중인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강한 열망은 어린 내 마음에 점점 미움과 상실을 키워갔다. 초등학교의 어느 무렵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와 대중목욕탕에 다녀와서 자랑을 하는 동네아이를 이유 없이 때려주던 나의 심사엔 그러한 복잡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늘 내 안에 잠복 중이었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버지와 표현을 하고 싶은 청소년은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가본 적이 없다. 그나마 대중목욕탕을 아버지와 함께 몇 번 갔던 기억은 평생도록 기묘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는 것은 괴로웠다. 아버지는 퇴임을 한 후 퇴직금을 털어 시내에 작은 달방을 여셨다. 그리고 속칭 일 년 만에 아버지는 그 달방들을 말아먹었다. 평생 군인이나 경찰관이었던 사람들은 의외로 귀가 얇은 탓에 퇴임 후 사업을 했다가 실패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그건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일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후 나는 둘 사이에서 흘러가는 대로 표류했다. 육십이 다 된 아버지는 비파괴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마다 엎드려서 시험공부를 하셨고 몇 개월 후 비파괴검사 자격증을 정말로 땄지만, 노인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쓰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초라해지셨고 순식간에 노인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기동력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는 더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가시며 혀를 차곤 하셨다. “아들이나 아비나 집에서 빈둥거리는 거 보면 속딱지가 생길 것 같다. 나가서 대리운전이라도 하든지.”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대리운전을 했고 아버지도 대리 운전일을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막내 동생이 갓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고아였다. 오남매중 넷째였다. 형제들은 전쟁 통을 버티며 서로를 살려내었다. 너무 추운 날엔 밖에서 자다가 밤새 막내의 발가락을 입안에 넣고 동상을 막아냈고 입에서 숨이 다 빠져나갈까봐 서로 자는 이의 입속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신다고 했다. 어느 날 한참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가 한 여자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한쪽 팔목에 수갑을 나란히 차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갔다. 다섯 식구인 우리가족이 사는 집엔 방이 하나였다. 누군가 옆에 끼면 밤새 뒤척여야한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집에 데려와 수갑을 한쪽씩 차고 잠들고 나가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하게 다투셨다. “아빠 그 사람들은 누구에요? 나쁜 사람들이죠?” “운이 없는 사람들이야.”
아버지는 잔정이 많았다. 속뜻은 모르겠으나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하셨다. 다방여자에게 총을 구경시켜 주다가 오발 사고를 낸 적도 있다. 어느 날은 총을 택시에 두고 내린 적도 있다.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털리고 자존심에 상처가 나서 지역 소매치기 일당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난리를 치신적도 있다(며칠 후 신분증이 담긴 채 그대로 지갑은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엔 자고 있는 어린 나를 깨워서 총을 장전하고 사용하는 법에 대해 떠드신 적도 있다. 아마 열두 살의 나이에 자다가 일어나 매그넘 사용법에 대해서 훈육을 들은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것이다. 나의 첫 장난감은 아버지가 항상 옆구리에 차고 다니시던 권총 벨트와 지갑이었다. 물론 아버지처럼 옆구리에 차고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잠복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잠든 내 발가락을 볼에 부비시곤 하셨다. 분명히 기억한다. 까끌한 아버지의 턱수염이 발가락을 간질이던 그 새벽을. 눈을 감은 채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아직 언어가 부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