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21세기 신택리지
고인이 된 박영한 선생이 『왕룽일가』 연작을 발표하고 있던 무렵이니 1987년이나 1988년이었을테다. 소설의 배경인 ‘우묵배미 마을’이 지금의 능곡 어디쯤이었던 걸로 안다. 한국의 근대화가 88올림픽을 전후로 또 다른 기형의 꼭짓점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작가가 우묵배미 그곳에서 포착한 그 어정쩡한 반농반도(半農半都)의 서글프고 질펀하며 이윽고 밀려날 삶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인정세태의 리얼리즘이 가능했던 얼마 안 남은 마지막 변경(邊境)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난 종로에 있던 민음사에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터였는데, 편집장 이영준 형의 집이 능곡 지나 백마(경의선 백마역 부근은 80년대 ‘화사랑’서껀 몇몇 주점들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기도 했다) 어디쯤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쪽 구경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촌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을 들어가서 내린 곳은 허허벌판이었고, 논밭만 있는 그냥 시골이었다. 마당이 있는 시골집을 싸게 얻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만 이영준 형 포함 두 명의 준(準)시인이 있었다(압둘 자바처럼 키가 컸던 성원근 형은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을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으로 남기고 1994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박영한 선생이 일찌감치 서울 서쪽 고양 일대의 문자향서권기를 간파했다면, 슬슬 그 뒤를 이을 후배들이 그곳으로 찾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고양의 핵으로 떠오를 일산이 한국 문학의 주요한 산실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리 보면 전혀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바로 그때 바로 그곳, 고봉산 아래 한강 쪽으로 펼쳐진 벌판을 도상에 놓고 이른바 거대한 ‘신도시 계획’이 입안되고 있었던 걸 그 문사(文士)들은 문학과 술, 바둑에 목을 매느라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다.
27만 인구를 수용할 일산신도시를 조성한다는 이야기는 간간이 뉴스로 접하기야 했겠지만, 가정까지 꾸린 처지에 먹고사는 일에 도무지 생심을 못 내던 그 무렵의 내게는 먼 일처럼 들렸기 십상이다. 그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일산으로 아예 이사를 가게 된 게 1994년 말이었다. 나를 꾄 친구는 소설가 김소진인데(왜 이렇게 일찍 세상을 뜬 이들이 자꾸 글에 등장하는지 모르겠다),그는 예의 소심하고 성실한 성격에 맞게 직장을 잡자마자 주택청약예금을 착실히 부어나갔던 모양이고, 당당히 일산신도시 1기 입주민이 되어 있었다. 세곡동 신혼집을 정리하고 경의선 백석역근처 24평형 새 아파트에 노모랑 신부, 갓난 아들을 앞세우고 입성한 것이 1994년인가 그랬을 것이다.
이영준 형의 백마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다시 수색 너머 그 해지는 서부로 가보게 된 게 그때였다. 능곡 부근의 까마득한 허허벌판은 여전했고, 신도시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무슨 벽들이 일제히 도열해 있는 듯한 이상한 도시가 나타났다(일산신도시가 북한 장갑차의 남진 저지용으로 설계되었다는 괴담쯤은 나도 들었을 테다). 한마디로 휑했다. 도로는 필요 이상으로 넓다 싶었고, 다니는 차들도 별로 없어 한적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깔끔한 친구네 새 아파트 식탁에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얻어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는 달랐다. 길이 익기 시작해서 그런지 일산이라는 곳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뭔가 억울한 심정마저 들었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나무들이 풍경을 제대로 거들고 있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타원형 호수를 품고 있는 공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화장실 물도 잘 안 내려가는 서울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 전세 기간도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신도시의 전세 값은 의외로 쌌고, 약간의 추가분은 일산 선주민이 융통해준 덕에 나도 그해 말 일산신도시의 주민이 되었다.
그리고 ‘호수가 있는 신도시’, ‘서울 서쪽의 신도시’ 등으로 그 본명을 살짝 가린 채(그러나 누구
나 짐작할 수 있게) 일산신도시가 한국 소설의 유력한 지역-배경으로 등장하게 되는 게 바로 이
무렵인 90년대 중반부터다. 이것은 물론 김소진의 경우가 그러하듯, 일산신도시가 일군의 작가들에게 맞춤한 생활 터전이 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조성된 강남권 분당신도시에 비해 일산은 상대적으로 조금 젊은 세대에다 이제 막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 고만고만한 직장인들이 더 많이 입주하고 이주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90년대 들어 일군의 작가들이 일산에 살며 이곳을 자신들의 작품 속에 녹여 넣게 된 사회적 배경도 이로부터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 싶다. 80년대의 이념적 열정이 눅어든 자리에서 지금은 우리가 그 바깥을 상상하기 힘들게 깊숙이 밀려들어온 자본 주도의 양극적 세계 현실, 디지털 문명 속의 고립적 개인화등등 그 새로운 욕망의 이야기가 시작된 시기가 바로 이때이며, 그런 이야기의 전개에 장차 그에 걸맞게 변모해온 현재까지의 모습을 포함해서 일산은 적절한 도시의 감정과 욕망, 서사를 제공해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해서 이제 일산은 특히 한국 소설에서 하나의 지리적 유형학을 구성해볼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가령 오랜 일산 주민이기도 하고 그동안 작품 속에 종종 ‘호수가 있는 신도시’를 등장시켜온 은희경의 경우, 최근 일산에도 새로운 거주 유형으로 자리 잡은 오피스텔 공간이나 호수공원의 지리지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고독의 연대’라는 자신만의 소설적 주제를 심화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발표한 단편 「별의 동굴」(《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은 박사논문을 9년째 붙들고 있는 무력한 40대 남자가 주인공인데, 살고 있는 원룸 오피스텔(바로 앞이 호수가 있는 공원이다) 이사 문제로 알게 된 부동산 사무소 여인(이혼하고 혼자된 마흔 살의 이 여인 역시 신도시의 원룸텔에서 산다)과의 짧지만 인상적인 만남이 소설 속에 삽입되어 있다. 호수공원 산책길에 우연히 다시 만난 여인은 묻는다. “이 방향으로 걸으시나 봐요.” “네?” “반대 방향으로 도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호수공원은 늘 달리거나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다들 특별히 자신이 도는 방향을 의식하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어느 한쪽 방향으로(호수공원 정문 쪽을 기준으로 하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이들이 더 많은 듯하지만) 도는 것일 테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묻고 나자, 이것은 고독, 혹은 엇갈리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해볼 만한 소설적 질문이 된다. 얼마 뒤 두 사람의 술자리에서 여인은 이 ‘방향’ 이야기를 좀 더 쓸쓸하고 아픈 톤으로 되낸다. “시간을 맞춰서 같이 가요, 그럼 방향은 상관없잖아요.” 이제 이 말을 기억하는 이에게 호수공원 산책길은 가끔 예사롭지 않은 무게로 다가오기도 하지 않을까. 말고도 일산이라는 지역이 단지 표층의 배경을 넘어 작품과 깊숙이 내속된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많다. 지금은 복선화되고 멀리 용문까지 연결되는 경의중앙선으로 바뀌었지만 한때의 경의선과 그 경의선을 따라 구일산을 경계로 탄현에서 곡산까지 이어진 자전거도로는 김소진의 대표작중 하나인 「자전거 도둑」(2005)에서 유년의 기억을 잇는 두 겹의 이야기에 근사한 소설의 길을 내주었다(김소진이 세상을 뜬 후 이 길에는 ‘소진로’라는 공식 명칭이 붙었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여자친구」(2008)를 읽은 이라면 호수공원 한강 습지 쪽 중간쯤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콰이아를 사랑에 대한 쓸쓸한 상념 없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테다. 예전 화사랑의 기억을 더듬으며 풍동 쪽을 거니는 사람들은 윤대녕의 「연」(2006)에서 조롱(鳥籠)이 등처럼 걸려 있던 그 작고 어둑한 술집을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김훈의 「저녁 내기 장기(將棋)」(2015)는 호수공원 동쪽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늘상 벌어지는 장기판의 풍경 뒤로 우리 시대 장년과 노년의 부서지는 삶을 아프게 환기한다. 제대군인 한석규가 내린 곳이 그 넓고 텅 빈 대곡역이었을 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에서 내 마음을 흔든 것은 이상하게도 구일산 쪽에서 신도시를 바라보던 그 영화의 시선이었다. 며칠 전 박철 시인은 오랜 일산 생활을 정리하고 김포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페이스북으로 자신의 시를 한 편 보내주었다.
신도시의 탄생을 지켜본 구일산의 속절없는 자취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일산역을 구름다리 삼아건너가면 세월을 뒤로 돌린 것처럼 풍경이 바뀌고 5일장으로 유명한 재래시장이 나온다. 이곳 일대도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들이 꽤 들어섰지만, 시장 인근과 역사(驛舍) 쪽은 옛 동네 그대로다. “입심 걸은 여자”(「골목길」)가 걸쭉한 농을 쏟아낼 것 같은 그런 술집들도 있다. 바래고 바랜 선탠창으로는 장사를 하는지 마는지 분간은 잘 안 가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문학은 덩어리지고 혼재된 시간의 안쪽으로 들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있으려는 시선이기도 하다. 킨텍스, 라페스타의 젊고 화려한 불빛과 구일산의 저 오래된 시간 사이에서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살아가고, 거기서 오늘도 문학은 삶을 향한 새롭고 오래된 질문들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글과 사진 정홍수 ㅣ 평론가, 1963년생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등
그러께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자유로 이산포 나들목 쪽으로 들어오는데 숫자가 길게 나열된 낯선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양시 인구 100만 돌파를 앞둔 카운트다운이었다. 찾아보니 정확히 2014년 8월 1일 오전 9시 55분에 100만 인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대한민국 10번째 100만 도시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한 것은 일산신도시가 들어선 1992년이다. 북서쪽으로는 파주시, 북동쪽으로는 양주시와 접하고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으로 김포시와 인근에 있는 고양이 서울 서쪽 외곽의 한적한 농촌에서 지금과 같은 거대 도시로 변모한 계기가 바로 일산신도시의 조성인 셈이다. 시 승격 일 년 후 일산신도시의 인구 증가로 일산구, 덕양구로 분구되었다가 2005년 일산구가 다시 동구,서구로 분구된 저간의 사정만 보아도 일산신도시가 고양 지역의 변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지금 일산신도시는 고양시 전체 인구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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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박영한 선생이 『왕룽일가』 연작을 발표하고 있던 무렵이니 1987년이나 1988년이었을테다. 소설의 배경인 ‘우묵배미 마을’이 지금의 능곡 어디쯤이었던 걸로 안다. 한국의 근대화가 88올림픽을 전후로 또 다른 기형의 꼭짓점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작가가 우묵배미 그곳에서 포착한 그 어정쩡한 반농반도(半農半都)의 서글프고 질펀하며 이윽고 밀려날 삶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인정세태의 리얼리즘이 가능했던 얼마 안 남은 마지막 변경(邊境)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난 종로에 있던 민음사에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터였는데, 편집장 이영준 형의 집이 능곡 지나 백마(경의선 백마역 부근은 80년대 ‘화사랑’서껀 몇몇 주점들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기도 했다) 어디쯤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쪽 구경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촌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을 들어가서 내린 곳은 허허벌판이었고, 논밭만 있는 그냥 시골이었다. 마당이 있는 시골집을 싸게 얻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만 이영준 형 포함 두 명의 준(準)시인이 있었다(압둘 자바처럼 키가 컸던 성원근 형은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을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으로 남기고 1994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박영한 선생이 일찌감치 서울 서쪽 고양 일대의 문자향서권기를 간파했다면, 슬슬 그 뒤를 이을 후배들이 그곳으로 찾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고양의 핵으로 떠오를 일산이 한국 문학의 주요한 산실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리 보면 전혀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바로 그때 바로 그곳, 고봉산 아래 한강 쪽으로 펼쳐진 벌판을 도상에 놓고 이른바 거대한 ‘신도시 계획’이 입안되고 있었던 걸 그 문사(文士)들은 문학과 술, 바둑에 목을 매느라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다.
27만 인구를 수용할 일산신도시를 조성한다는 이야기는 간간이 뉴스로 접하기야 했겠지만, 가정까지 꾸린 처지에 먹고사는 일에 도무지 생심을 못 내던 그 무렵의 내게는 먼 일처럼 들렸기 십상이다. 그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일산으로 아예 이사를 가게 된 게 1994년 말이었다. 나를 꾄 친구는 소설가 김소진인데(왜 이렇게 일찍 세상을 뜬 이들이 자꾸 글에 등장하는지 모르겠다),그는 예의 소심하고 성실한 성격에 맞게 직장을 잡자마자 주택청약예금을 착실히 부어나갔던 모양이고, 당당히 일산신도시 1기 입주민이 되어 있었다. 세곡동 신혼집을 정리하고 경의선 백석역근처 24평형 새 아파트에 노모랑 신부, 갓난 아들을 앞세우고 입성한 것이 1994년인가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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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형의 백마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다시 수색 너머 그 해지는 서부로 가보게 된 게 그때였다. 능곡 부근의 까마득한 허허벌판은 여전했고, 신도시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무슨 벽들이 일제히 도열해 있는 듯한 이상한 도시가 나타났다(일산신도시가 북한 장갑차의 남진 저지용으로 설계되었다는 괴담쯤은 나도 들었을 테다). 한마디로 휑했다. 도로는 필요 이상으로 넓다 싶었고, 다니는 차들도 별로 없어 한적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깔끔한 친구네 새 아파트 식탁에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얻어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는 달랐다. 길이 익기 시작해서 그런지 일산이라는 곳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뭔가 억울한 심정마저 들었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나무들이 풍경을 제대로 거들고 있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타원형 호수를 품고 있는 공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화장실 물도 잘 안 내려가는 서울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 전세 기간도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신도시의 전세 값은 의외로 쌌고, 약간의 추가분은 일산 선주민이 융통해준 덕에 나도 그해 말 일산신도시의 주민이 되었다.
그리고 ‘호수가 있는 신도시’, ‘서울 서쪽의 신도시’ 등으로 그 본명을 살짝 가린 채(그러나 누구
나 짐작할 수 있게) 일산신도시가 한국 소설의 유력한 지역-배경으로 등장하게 되는 게 바로 이
무렵인 90년대 중반부터다. 이것은 물론 김소진의 경우가 그러하듯, 일산신도시가 일군의 작가들에게 맞춤한 생활 터전이 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조성된 강남권 분당신도시에 비해 일산은 상대적으로 조금 젊은 세대에다 이제 막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 고만고만한 직장인들이 더 많이 입주하고 이주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90년대 들어 일군의 작가들이 일산에 살며 이곳을 자신들의 작품 속에 녹여 넣게 된 사회적 배경도 이로부터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 싶다. 80년대의 이념적 열정이 눅어든 자리에서 지금은 우리가 그 바깥을 상상하기 힘들게 깊숙이 밀려들어온 자본 주도의 양극적 세계 현실, 디지털 문명 속의 고립적 개인화등등 그 새로운 욕망의 이야기가 시작된 시기가 바로 이때이며, 그런 이야기의 전개에 장차 그에 걸맞게 변모해온 현재까지의 모습을 포함해서 일산은 적절한 도시의 감정과 욕망, 서사를 제공해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해서 이제 일산은 특히 한국 소설에서 하나의 지리적 유형학을 구성해볼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가령 오랜 일산 주민이기도 하고 그동안 작품 속에 종종 ‘호수가 있는 신도시’를 등장시켜온 은희경의 경우, 최근 일산에도 새로운 거주 유형으로 자리 잡은 오피스텔 공간이나 호수공원의 지리지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고독의 연대’라는 자신만의 소설적 주제를 심화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발표한 단편 「별의 동굴」(《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은 박사논문을 9년째 붙들고 있는 무력한 40대 남자가 주인공인데, 살고 있는 원룸 오피스텔(바로 앞이 호수가 있는 공원이다) 이사 문제로 알게 된 부동산 사무소 여인(이혼하고 혼자된 마흔 살의 이 여인 역시 신도시의 원룸텔에서 산다)과의 짧지만 인상적인 만남이 소설 속에 삽입되어 있다. 호수공원 산책길에 우연히 다시 만난 여인은 묻는다. “이 방향으로 걸으시나 봐요.” “네?” “반대 방향으로 도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호수공원은 늘 달리거나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다들 특별히 자신이 도는 방향을 의식하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어느 한쪽 방향으로(호수공원 정문 쪽을 기준으로 하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이들이 더 많은 듯하지만) 도는 것일 테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묻고 나자, 이것은 고독, 혹은 엇갈리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해볼 만한 소설적 질문이 된다. 얼마 뒤 두 사람의 술자리에서 여인은 이 ‘방향’ 이야기를 좀 더 쓸쓸하고 아픈 톤으로 되낸다. “시간을 맞춰서 같이 가요, 그럼 방향은 상관없잖아요.” 이제 이 말을 기억하는 이에게 호수공원 산책길은 가끔 예사롭지 않은 무게로 다가오기도 하지 않을까. 말고도 일산이라는 지역이 단지 표층의 배경을 넘어 작품과 깊숙이 내속된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많다. 지금은 복선화되고 멀리 용문까지 연결되는 경의중앙선으로 바뀌었지만 한때의 경의선과 그 경의선을 따라 구일산을 경계로 탄현에서 곡산까지 이어진 자전거도로는 김소진의 대표작중 하나인 「자전거 도둑」(2005)에서 유년의 기억을 잇는 두 겹의 이야기에 근사한 소설의 길을 내주었다(김소진이 세상을 뜬 후 이 길에는 ‘소진로’라는 공식 명칭이 붙었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여자친구」(2008)를 읽은 이라면 호수공원 한강 습지 쪽 중간쯤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콰이아를 사랑에 대한 쓸쓸한 상념 없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테다. 예전 화사랑의 기억을 더듬으며 풍동 쪽을 거니는 사람들은 윤대녕의 「연」(2006)에서 조롱(鳥籠)이 등처럼 걸려 있던 그 작고 어둑한 술집을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김훈의 「저녁 내기 장기(將棋)」(2015)는 호수공원 동쪽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늘상 벌어지는 장기판의 풍경 뒤로 우리 시대 장년과 노년의 부서지는 삶을 아프게 환기한다. 제대군인 한석규가 내린 곳이 그 넓고 텅 빈 대곡역이었을 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에서 내 마음을 흔든 것은 이상하게도 구일산 쪽에서 신도시를 바라보던 그 영화의 시선이었다. 며칠 전 박철 시인은 오랜 일산 생활을 정리하고 김포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페이스북으로 자신의 시를 한 편 보내주었다.
떠돌다보면 앞머리에 구(舊)자가 붙는 지명을 가끔 만난다강을 하나 건너니 신시가지 귀퉁이에 철길이 있고때깔 잃은 역사(驛舍)가 있고 안방 내준 구닥다리마냥 구(舊)일산거기 구일산 재래시장 골목에 파리도 반기며 버팅기고 앉은니나노집이 하나 있으니 가관이었다- 「골목길」 부분
신도시의 탄생을 지켜본 구일산의 속절없는 자취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일산역을 구름다리 삼아건너가면 세월을 뒤로 돌린 것처럼 풍경이 바뀌고 5일장으로 유명한 재래시장이 나온다. 이곳 일대도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들이 꽤 들어섰지만, 시장 인근과 역사(驛舍) 쪽은 옛 동네 그대로다. “입심 걸은 여자”(「골목길」)가 걸쭉한 농을 쏟아낼 것 같은 그런 술집들도 있다. 바래고 바랜 선탠창으로는 장사를 하는지 마는지 분간은 잘 안 가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문학은 덩어리지고 혼재된 시간의 안쪽으로 들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있으려는 시선이기도 하다. 킨텍스, 라페스타의 젊고 화려한 불빛과 구일산의 저 오래된 시간 사이에서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살아가고, 거기서 오늘도 문학은 삶을 향한 새롭고 오래된 질문들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