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글밭단상
아, 제발 쓰지 마. 그거 쓰고 폭망할 일 있니?
소위 절친이라는 것들이 나서서 뜯어말리는 통에 그들이 단체로 얄미워져서 더 쓰고도 싶고, 쓰지 못할 소설이라 인정한 탓에 기필코 쓰고자 하는 열망도 있다. 단 한 번 연애소설에 관한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신기생뎐』의 타박네와 『나흘』의 뻐들네 캐릭터가 너무도 생생한데, 황혼 로맨스에 관한 장편 하나 써주실 수 있나요?
할매 할배들의 사랑이야기를 말하는 건가요? 이보세요. 저는요, 청춘들이 쫄깃하게 썸을 타는 되게 앙증맞은 소설을 쓸 참이거든요. 달콤하고 쌉싸래한 그런 소설이요.
물론 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온몸으로 거절의 뉘앙스를 풍기며 자리를 떴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상대가 불쾌했을까? 소심하게 그 일을 자꾸 곱씹으며 되새기던 밤에 옥탑방 여자를 봤다. 아파트 숲의 전등이 하나 둘 꺼지는 침묵과 정적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오전 3시. 뒷베란다에서 서성거리며 그날의 마지막 커피를 마실 때, 불이 환하게 켜진 건너편 상가의 옥탑방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가 옥탑방의 앞마당(하, 그걸 마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뚫린 작은 공간을 마당삼아 뒤로 걷고 있었다. 오전 3시에 거꾸로 걷는 여자, 직업은 뭘까? 나는 저 악명 높은 사라호 태풍 때에도 살아남은 갓난아기. 동네 개울이 넘쳐 미꾸라지와 붕어 민물새우가 우리 마루 밑까지 우글거리며 떠내려 왔다. 어머니가 그걸 소쿠리로 건져 어죽을 끓였고, 그 어죽을 먹은 탓인지 동네가 생긴 이래 내 배밀이가 가장 빨랐다 한다. 하여 홍수에 관한 공포, 생래적으로 체득한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늘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산다.여자가 거주하는 상가건물 1층은 식당과 편의점과 약국이 있고 2,3,4층은 독서실이다. 밤이 깊게 익으면 여자는 허름한 트레이닝 바람으로 나와 옥탑방 앞마당을 뒤로 걷는다. 아파트 25층인 우리 집과 여자의 옥탑방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불빛이 꺼지면 나는 여자의 세세한 동작까지 훔쳐볼 수 있다. 독서실에 근무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여자일까? 아니, 저 여자는 야행성이고 몸이 말랐어. 경계를 깨고 관점을 바꾸는 일, 상상력을 찾아가는 막막함을 견디는 직업에 종사할지도 몰라. 그러니 줄기차게 뒤로 걷지. 아이들의 방에 있는 망원경을 가져올까?
여자의 방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비뚜로 놓인 의자와 손이 자주 닿았을 커피포트의 위치를 확인하면 여자가 평소 어떻게 생활하는지 유추가 가능한데. 오, 이 여자야. 그건 안 돼. 거의 스토킹 수준이잖아. 누가 보면 동성애, 그것도 짝사랑으로 오해할 거야.
글은 쓰면 쓸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가난해지고 그 가난함 속에서 다가오는 가난을 고요히 견디는 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사랑하는 이에게 권유할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면 동지는 얼마든 있나니. 바로 삼년 째 옥탑방에 사는 저 여자. 그녀가 다음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나는 안다. 첫 문단은 달콤하고 쌉싸래한 연애소설로 시작하겠지만 생래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저 푸른 초원의 전원주택은 몹시 위험해요, 따위의 메시지를 끼워 넣다가 내 소설은 어김없이 폭망할 것이다. 그럼 나는 달콤하고 쌉싸래한 또 다른 연애소설을 준비할 테고…… 쳇바퀴 속 다람쥐는 언제나 고단함을 모르지.
첫 번째｜연애소설
글 이현수 ㅣ 소설가. 1959년생
소설 『나흘』 『장미나무 식기장』 『신기생뎐』 『토란』『길갓집 여자』 등
글은 쓰면 쓸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가난해지고 그 가난함 속에서 다가오는 가난을 고요히 견디는 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사랑하는이에게 권유할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면 동지는 얼마든 있나니. 바로 삼년 째 옥탑방에 사는 저 여자. 그녀가 다음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나는 안다.한 이십여 년 글밥을 먹다보면 작가마다 전문 영역이생긴다. 어떤 소재에 관해 잘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소재만 들이대면 도무지 글이 이상해지는 사람도 있다. 하여 내게도 두 종류의 소설이 있다. 쓰지 못할 소설과 쓰고 싶은 소설. 내가 쓰지 못할 소설은 연애소설이고 쓰고 싶은 소설도 연애소설이라 늘 헤맨다. ‘나를 낭비할 수 있어’를 ‘나를 방비할 수 있어’로 잘못 읽고 건듯 부는 바람, 건듯 왔다 가는 사람도 싫어하는데 무슨 연애소설을 쓰나.
아, 제발 쓰지 마. 그거 쓰고 폭망할 일 있니?
소위 절친이라는 것들이 나서서 뜯어말리는 통에 그들이 단체로 얄미워져서 더 쓰고도 싶고, 쓰지 못할 소설이라 인정한 탓에 기필코 쓰고자 하는 열망도 있다. 단 한 번 연애소설에 관한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신기생뎐』의 타박네와 『나흘』의 뻐들네 캐릭터가 너무도 생생한데, 황혼 로맨스에 관한 장편 하나 써주실 수 있나요?
할매 할배들의 사랑이야기를 말하는 건가요? 이보세요. 저는요, 청춘들이 쫄깃하게 썸을 타는 되게 앙증맞은 소설을 쓸 참이거든요. 달콤하고 쌉싸래한 그런 소설이요.
물론 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온몸으로 거절의 뉘앙스를 풍기며 자리를 떴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상대가 불쾌했을까? 소심하게 그 일을 자꾸 곱씹으며 되새기던 밤에 옥탑방 여자를 봤다. 아파트 숲의 전등이 하나 둘 꺼지는 침묵과 정적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오전 3시. 뒷베란다에서 서성거리며 그날의 마지막 커피를 마실 때, 불이 환하게 켜진 건너편 상가의 옥탑방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가 옥탑방의 앞마당(하, 그걸 마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뚫린 작은 공간을 마당삼아 뒤로 걷고 있었다. 오전 3시에 거꾸로 걷는 여자, 직업은 뭘까? 나는 저 악명 높은 사라호 태풍 때에도 살아남은 갓난아기. 동네 개울이 넘쳐 미꾸라지와 붕어 민물새우가 우리 마루 밑까지 우글거리며 떠내려 왔다. 어머니가 그걸 소쿠리로 건져 어죽을 끓였고, 그 어죽을 먹은 탓인지 동네가 생긴 이래 내 배밀이가 가장 빨랐다 한다. 하여 홍수에 관한 공포, 생래적으로 체득한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늘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산다.여자가 거주하는 상가건물 1층은 식당과 편의점과 약국이 있고 2,3,4층은 독서실이다. 밤이 깊게 익으면 여자는 허름한 트레이닝 바람으로 나와 옥탑방 앞마당을 뒤로 걷는다. 아파트 25층인 우리 집과 여자의 옥탑방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불빛이 꺼지면 나는 여자의 세세한 동작까지 훔쳐볼 수 있다. 독서실에 근무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여자일까? 아니, 저 여자는 야행성이고 몸이 말랐어. 경계를 깨고 관점을 바꾸는 일, 상상력을 찾아가는 막막함을 견디는 직업에 종사할지도 몰라. 그러니 줄기차게 뒤로 걷지. 아이들의 방에 있는 망원경을 가져올까?
여자의 방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비뚜로 놓인 의자와 손이 자주 닿았을 커피포트의 위치를 확인하면 여자가 평소 어떻게 생활하는지 유추가 가능한데. 오, 이 여자야. 그건 안 돼. 거의 스토킹 수준이잖아. 누가 보면 동성애, 그것도 짝사랑으로 오해할 거야.
글은 쓰면 쓸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가난해지고 그 가난함 속에서 다가오는 가난을 고요히 견디는 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사랑하는 이에게 권유할 수는 없겠으나 찾아보면 동지는 얼마든 있나니. 바로 삼년 째 옥탑방에 사는 저 여자. 그녀가 다음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나는 안다. 첫 문단은 달콤하고 쌉싸래한 연애소설로 시작하겠지만 생래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저 푸른 초원의 전원주택은 몹시 위험해요, 따위의 메시지를 끼워 넣다가 내 소설은 어김없이 폭망할 것이다. 그럼 나는 달콤하고 쌉싸래한 또 다른 연애소설을 준비할 테고…… 쳇바퀴 속 다람쥐는 언제나 고단함을 모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