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나의데뷔작
스물한 살 겨울이었을 거다. 방학을 맞아 부산 본가에 내려와 있었다. 대학 생활 일 년이 끝나갈 무렵. 시건방지게도 사는 게 재미도 의미도 없다는 생각을 줄 곧 되뇌던 참이었다. 일차적으로 돌봐야할 생활의 디테일들에 무감했고, 그것들이 왜 나를 옥죄고 닦달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불만과 회의에 가득 차 있었다. 수당 없이 부림당하는 하청업자가 된 기분. 무슨 근원 없는 상처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늘 어딘가 아팠고, 쓸쓸했다. 그럼에도 항상 속은 무언가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번화한 대로에서 옷을 홀딱 벗고 뛰어다니고 싶다는 충동에 무시로 사로잡혔다. 입에서 불을 뿜는 서커스 맨이 되고 싶었고 가짜 날개를 달고 마천루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외상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천진무구한 악당 같은 걸 꿈꿨다. 하지만 입에서 뿜어낼 수 있던건 독설 아니면 한숨. 그도 아니면 담배연기뿐이었고, 박쥐 날개 같은 검은색 야전잠바를 망토인 양 휘날리며 떠돌아다니는 게 허세의 전부였다. 그렇게 줄곧 배회하기만 했다.
당시, 남포동에 ‘무아(無我)’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카운터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면 거스름돈 100원과 함께 신청곡을 적어 넣을 수 있는 기다란 쿠폰을 주던 곳이었다. 극장식으로 줄 지어 늘어선 좌석 맨 앞에는 족히 수 만 장은 될 듯한 LP판이 정연하게 꽂혀 있는 디제이 부스가 있었다. 시간대 별로 테마를 나눠 서너 명의 디제이가 교대로 음악을 틀었다. 클래식도 가요도 팝도 록 음악도 가리지 않았다. 좌석엔 팔걸이 사이에 걸쳐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구비해 놓은 판자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거기 죽치고 앉아 장롱만한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률에 파묻혀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말도 안 되는 글귀를 적곤 했었다. 대로 건너편 바닷바람이 매섭던 그날도 그랬다. 군대부터 빨리 갔다 오라는 아침 밥상머리 아버지의 지청구를 귓등으로 튕긴 채 오전 무렵 집을 나왔다. 가방엔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들어있었다는 기억이 별나게도 또렷하다.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둥 마는 둥, 머리 없이 꼬리만 난분분한 구절들을 노트에 갈겨대면서 서너 시간 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던 것 같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 배가 고파왔고,비적대고 앉아 있자니 엉치뼈와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을 열고 나오는 등 뒤로 스틱스(Styx)의 ‘Come Sail Away’가 큰 물결을 일으키듯 출렁거렸다는 기억도 또렷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요기는 뒷전으로 하고 대로를 건너 자갈치 쪽으로 이동했다. 바다를 보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자갈치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바다라는 게 그리 통 크거나 후련해 보이진 않는다. 꼼장어 따위를 파는 포장마차와 잔파도에 발 묶인 채 정박한 배들. 그리고 왁자지껄한 ‘아지메’ 들의 억센 사투리. 이마를 할퀴는 따가운 바람. 시선 가까이엔 영도가 수평선을 호위하듯 버티고 있었다. 어디 먼 데로 뻗어나가기보다 그 조그마하고 강퍅한 공간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경상도 특유의 으름장 같은 게 느껴지는, 안팎으로 꽉 막힌 바다. 그러다가 한 구절이 저절로 혀끝에 맴돌았다. “바다에선 죽은 자들만 용감하다……”
좁은 음악실 안에선 감지되지 않은 짠맛 같은 게 그 구절에 있다고 느꼈다. 갓 담은 김치맛을 음미하듯 그 느닷없는 구절을 오래 혀에 올려놓고 이리 굴리고 저리 적셔보았다. 그 다음 구절부터는 실제와는 큰 상관없는 무슨 영상 같은 게 떠올랐다. 부둣가 풍경과 관련한 상투적인 정조와 관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저 느껴지는 대로 그림 그리듯 옮기면 그럴싸한 정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끼니는 무시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노트북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책상에 앉아 구닥다리 워드프로세스를 두드려댔다. 제목은 「항구」. 그리 짧지 않은 길이였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당시에 주로 쓰던 자폐적인 언어의 굴레에서 많이 벗어난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것 같기도, 누가 알려준 얘기를 건조하게 늘어놓은 것 같기도, 무슨 영화 같은 데서 본 얘기를 추상화시켜 펼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묘했다. 시 한편 써냈다는 성취감이나 자기만족 따위도 별로 없었다. 그저 한번쯤 시도해 봤어야할, 내 것과는 조금 다른 ‘기술’ 하나를 터득한 기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없었다. 출력 하고나선 습작들을 모아놓은 파일에 끼워 넣었다. 그러곤 잊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해가 바뀌고 봄이 지난 다음, 여름방학. 다시 부산 본가에 내려왔다. 내려오기 직전, 장마 끝 무렵에 학교 동아리 방에 앉아 그동안 썼던 시들을 정서해 투고를 했다. 응모작 제한은 열 편 이상. 이리저리 그러모아 열네 편을 보내고 나선 시는 거들떠도 안 봤다.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무더운 방에서 불면에 시달리며 소설책만 읽었고, 되도 않는 산문 쪼가리만 속 게워내듯 뱉어내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밤을 꼴딱 새운 어느 날, 낮잠 결에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기뻤으나 잠결 탓인지 이게 꿈일 거라는 생각만 했었다. 실감도 환희도 잠깐이었다. 다시 ‘무아’에 들어가 그 어둡고 습한 음악 동굴에 새겨진 음률의 파동 속에서 꿈을 꿈대로 늘리려 긴 잠에 빠졌다.
당선작이 실린 잡지는 한 달 여 후 집으로 배달됐다. 당선작은 「항구」 외 5편. 의외였다. 나름 야심작으로 꼽은 작품은 두 편밖에 실리지 않았고, 편수 맞추기 위한 후보군이라 여긴 게 4편 실려 있었다. 「항구」는 후자였다. 주제넘게도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햇수로 25년 전 일. 억울했든 감지덕지였든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불을 뿜는 서커스 맨은 아직 되지 못했고, 몇 주 전 공연히 마음 상한 일 있어 들러 봤던 자갈치 앞 바다는 없던 철망 같은 게 둘러쳐져 조망이 더 답답해졌고, ‘무아’는 등단 직후 들렀을 때 이미 사라져 있었다. 문득, 「항구」를 썼던 게 12월이었는지 1월이었는지 궁금했다. ‘무아’가 있던 자리를 더듬어 걸어보았으나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속 디제이박스에선 돌연 스틱스의 노래가 이명으로 울렸다. 이미 다 살았다는 느낌과 뭔가 다시 시작된다는 확신이 피차 머리와 꼬리가 되어 뇌리를 둥글게 감쌌다. 첫 시집에 실렸던 「항구」를 떠올려 봤다. 여전히, 내가 쓴 것 같기도, 다른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누구일까. 바닷바람이 그때처럼 따가웠다.
그건 대체 누가 썼던 걸까
글 강정 ㅣ 시인, 1971년생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산문집 『루트와 코드』 『나쁜 취향』 『콤마, 씨』 등
당선작이 실린 잡지는 한 달 여후 집으로 배달됐다. 당선작은「항구」 외 5편. 의외였다. 나름 야심작으로 꼽은 작품은 두 편밖에 실리지 않았고, 편수 맞추기 위한 후보군이라 여긴 게 4편 실려 있었다. 「항구」는 후자였다. 주제넘게도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햇수로 25년 전 일. 억울했든 감지덕지였든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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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포동에 ‘무아(無我)’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카운터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면 거스름돈 100원과 함께 신청곡을 적어 넣을 수 있는 기다란 쿠폰을 주던 곳이었다. 극장식으로 줄 지어 늘어선 좌석 맨 앞에는 족히 수 만 장은 될 듯한 LP판이 정연하게 꽂혀 있는 디제이 부스가 있었다. 시간대 별로 테마를 나눠 서너 명의 디제이가 교대로 음악을 틀었다. 클래식도 가요도 팝도 록 음악도 가리지 않았다. 좌석엔 팔걸이 사이에 걸쳐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구비해 놓은 판자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거기 죽치고 앉아 장롱만한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률에 파묻혀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말도 안 되는 글귀를 적곤 했었다. 대로 건너편 바닷바람이 매섭던 그날도 그랬다. 군대부터 빨리 갔다 오라는 아침 밥상머리 아버지의 지청구를 귓등으로 튕긴 채 오전 무렵 집을 나왔다. 가방엔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들어있었다는 기억이 별나게도 또렷하다.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둥 마는 둥, 머리 없이 꼬리만 난분분한 구절들을 노트에 갈겨대면서 서너 시간 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던 것 같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 배가 고파왔고,비적대고 앉아 있자니 엉치뼈와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을 열고 나오는 등 뒤로 스틱스(Styx)의 ‘Come Sail Away’가 큰 물결을 일으키듯 출렁거렸다는 기억도 또렷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요기는 뒷전으로 하고 대로를 건너 자갈치 쪽으로 이동했다. 바다를 보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자갈치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바다라는 게 그리 통 크거나 후련해 보이진 않는다. 꼼장어 따위를 파는 포장마차와 잔파도에 발 묶인 채 정박한 배들. 그리고 왁자지껄한 ‘아지메’ 들의 억센 사투리. 이마를 할퀴는 따가운 바람. 시선 가까이엔 영도가 수평선을 호위하듯 버티고 있었다. 어디 먼 데로 뻗어나가기보다 그 조그마하고 강퍅한 공간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경상도 특유의 으름장 같은 게 느껴지는, 안팎으로 꽉 막힌 바다. 그러다가 한 구절이 저절로 혀끝에 맴돌았다. “바다에선 죽은 자들만 용감하다……”
좁은 음악실 안에선 감지되지 않은 짠맛 같은 게 그 구절에 있다고 느꼈다. 갓 담은 김치맛을 음미하듯 그 느닷없는 구절을 오래 혀에 올려놓고 이리 굴리고 저리 적셔보았다. 그 다음 구절부터는 실제와는 큰 상관없는 무슨 영상 같은 게 떠올랐다. 부둣가 풍경과 관련한 상투적인 정조와 관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저 느껴지는 대로 그림 그리듯 옮기면 그럴싸한 정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끼니는 무시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노트북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책상에 앉아 구닥다리 워드프로세스를 두드려댔다. 제목은 「항구」. 그리 짧지 않은 길이였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당시에 주로 쓰던 자폐적인 언어의 굴레에서 많이 벗어난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것 같기도, 누가 알려준 얘기를 건조하게 늘어놓은 것 같기도, 무슨 영화 같은 데서 본 얘기를 추상화시켜 펼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묘했다. 시 한편 써냈다는 성취감이나 자기만족 따위도 별로 없었다. 그저 한번쯤 시도해 봤어야할, 내 것과는 조금 다른 ‘기술’ 하나를 터득한 기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없었다. 출력 하고나선 습작들을 모아놓은 파일에 끼워 넣었다. 그러곤 잊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해가 바뀌고 봄이 지난 다음, 여름방학. 다시 부산 본가에 내려왔다. 내려오기 직전, 장마 끝 무렵에 학교 동아리 방에 앉아 그동안 썼던 시들을 정서해 투고를 했다. 응모작 제한은 열 편 이상. 이리저리 그러모아 열네 편을 보내고 나선 시는 거들떠도 안 봤다.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무더운 방에서 불면에 시달리며 소설책만 읽었고, 되도 않는 산문 쪼가리만 속 게워내듯 뱉어내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밤을 꼴딱 새운 어느 날, 낮잠 결에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기뻤으나 잠결 탓인지 이게 꿈일 거라는 생각만 했었다. 실감도 환희도 잠깐이었다. 다시 ‘무아’에 들어가 그 어둡고 습한 음악 동굴에 새겨진 음률의 파동 속에서 꿈을 꿈대로 늘리려 긴 잠에 빠졌다.
당선작이 실린 잡지는 한 달 여 후 집으로 배달됐다. 당선작은 「항구」 외 5편. 의외였다. 나름 야심작으로 꼽은 작품은 두 편밖에 실리지 않았고, 편수 맞추기 위한 후보군이라 여긴 게 4편 실려 있었다. 「항구」는 후자였다. 주제넘게도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햇수로 25년 전 일. 억울했든 감지덕지였든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불을 뿜는 서커스 맨은 아직 되지 못했고, 몇 주 전 공연히 마음 상한 일 있어 들러 봤던 자갈치 앞 바다는 없던 철망 같은 게 둘러쳐져 조망이 더 답답해졌고, ‘무아’는 등단 직후 들렀을 때 이미 사라져 있었다. 문득, 「항구」를 썼던 게 12월이었는지 1월이었는지 궁금했다. ‘무아’가 있던 자리를 더듬어 걸어보았으나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속 디제이박스에선 돌연 스틱스의 노래가 이명으로 울렸다. 이미 다 살았다는 느낌과 뭔가 다시 시작된다는 확신이 피차 머리와 꼬리가 되어 뇌리를 둥글게 감쌌다. 첫 시집에 실렸던 「항구」를 떠올려 봤다. 여전히, 내가 쓴 것 같기도, 다른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누구일까. 바닷바람이 그때처럼 따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