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봄·봄」 이어쓰기 「봄·봄」이어쓰기 1 ｜봄·봄하다 「봄·봄」이어쓰기 2｜봉필영감 제 꾀에 넘어갔네 「봄·봄」이어쓰기 3｜봄밤 「봄·봄」 이어쓰기 4 ｜ 발산 「봄·봄」이어쓰기 5｜하지 지나 백로
일산, 오래된 누옥의 시간과 젊고 화려한 불빛 사이에서
정화된 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보이지 않는 초고
첫 번째｜연애소설 두 번째｜토지문화관이 만들어낸 시공간 세 번째｜ 도구에서 연장이 되는 순간 네 번째｜딴짓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1｜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선정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2 ｜이탈리아 작가 에리 데 루카와의 만남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3 ｜선을 그으며 따라간 장면의 파편들
정화된 밤
은희경 ㅣ 소설가, 1959년생
소설 『새의 선물』 『소년을 위로해줘』 『다른 모든 눈송이와 비슷하게 생긴
하나의 눈송이』 『태연한 인생』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
그녀는 처음 성당에 가서 연습실 문을 두드렸던 순간을 며칠에 걸쳐 곰곰이 되새겨보았다.그날 감지했던 운명적 기운이 잘못된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이 신의 뜻을 잘못 읽었다는 깨달음을얻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대신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일에는 남다른 유연함을 갖고 있었다. 많이 울긴 했지만 눈물을 그쳤을 때는 마치 젖살이 빠진 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약간 수척해진 채로 자신이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방향을 똑바로 보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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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부모는 25년 전 성당에서 처음 만났다. 청년 성가대의 연습실에서였다. 첫인상은 둘 다 그다지 강렬하거나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쪽은 첫눈에 상대가 자기 타입이 아니라 고개를 돌렸고 다른 한쪽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건넸을 뿐 똑바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서로가 1년쯤 뒤에 결혼할 상대라는 건 알 턱이 없었다. 그날은 다니엘의 엄마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첫날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그녀는 몇 가지 진지한 결심을 했는데 언제나처럼 흐지부지되었고 실천에 옮긴 것은 그 한 가지였다. 그 한 가지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이 되리라는 것 역시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학기 초 여자대학 4학년의 화제는 취직과 결혼에 집중돼 있었다. 그녀가 다니는 국문과에서는 반 이상이 교사 임용고시 준비를 했고 몇몇은 대기업이나 신문사 입사에 대비했다. 결혼이 결정된 친구도 셋이나 되었다. 그것도 아니면 대학원 시험 공부를 했다. 그녀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
다. 그녀의 부모처럼 교사가 되는 건 고리타분할 것 같았고 여성에게 극히 제한적인 기회밖에 주지 않는 대기업과 신문사의 입사 경쟁에 뛰어들 자신도 없었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중매결혼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것도 아니고 연애를 잘하기에는 다소 소심했다. 그녀는 호기심과 감상을 갖추었으며 거기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공상 또한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추진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갖가지 오류를 발견하는 데에 열심인 나머지 마치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 재능이 있어 보일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룹에서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고 눈총을 받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성당에 다니는 일은 좀 다를 것 같았다. 신도들 사이에 조용히 끼어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고 그 결과 주일마다 인생이 정화될 뿐 아니라 때로 도움이 필요할 때 기도를 들어주는 신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오랜 학생 신분이 끝나가는 데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천성적으로 외톨이였던 그녀는 권위와 사랑과 그리고 우아함을 갖춘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다.
3월 넷째 주 일요일에야 그녀는 성당을 찾아갔다. 그 성당은 그녀가 학교에 오갈 때마다 지나치는 사거리 모퉁이에 있었다. 건물 외벽에 늘어진 현수막에는 축일이나 기념일 안내문, 혹은 성경 구절이 적혀 있곤 했다. 그녀가 가장 많이 본 것은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문구였는데 그날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신자들이 하는 대로 입구의 성수대에서 손
가락으로 물을 찍어 십자가를 그은 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가 시작되자 입당성가와 함께
붉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소년 복사를 거느리고 신부가 제단으로 나왔다. 사순절이라서 신부는 죄와 보속을 의미하는 보라색 수단을 입고 있었다. 보라색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제단을 장식한 꽃과 촛대, 금빛 십자가, 긴 통로와 높은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의 엄숙한 성화들. 그 화려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되는 게 그녀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 속으로 나직하게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흰색 미사포의 여인들 틈에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모았다. 평소 버릇대로 몇 번인가 잡념에 빠졌지만 그때마다 신자들이 일어나고 앉고 무릎 꿇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그들을 따라 하느라 얼른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날 받은 주보에는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이 사순 기간에 예외적으로 기쁨의 노래인 대영광송을 바칠 수 있는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그녀는 머리 위로 갑자기 웅장하고 아름다운 합창이 울려 퍼졌을 때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2층에 있는 성가대를우러러보는 순간 희미한 전율이 찾아왔다. 합창을 듣는 내내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성당에 오게 된 것은 누군가에 의해 면밀히 예정된 일이라는 믿음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게시판에서 ‘청년 성가대원 모집’ 안내문을 읽게 된 것 역시 우연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녀는 대체로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순간 웬일인지 과 야유회에서 <동심초>를 불러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거의 충동적으로 성가대 연습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연습실은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미사를 마친 신자들이 인사를 나누느라 성당 앞마당이 부산스러운 탓에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오르간에 기대 선 채 악보를 뒤적이던 청년이 문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텅 빈 연습실에 그 혼자뿐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용건을 말하자 그의 얼굴에 상냥한 웃음이 떠올랐다. 잘 오셨어요. 제가 지휘자 가브리엘이에요. 그들은 서로 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다. 음악대학 대학원생이라는 가브리엘은 듣기 좋은 저음을 갖고 있었다. 큰 키에 옷차림은 세련되었으며 말투와 태도가 부드럽고 유쾌했다. 그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간단한 테스트를 받는 동안 그녀는 숨이 차지 않은데도 계속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긴장하셨나봐요.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희고 긴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내려놓으며 가브리엘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브리엘은 활짝 웃으며 노래 부르듯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소프라노 파트시네요, 환영합니다. 그녀 역시 드라마틱하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빠른 심장 박동을 감추기 위해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렸다.
얼굴이 상기된 채 겨우 인사를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문이 열리고 다른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가브리엘이 그를 테너 파트장이라고 그녀에게 소개했다. 고등부 때부터 그 성당에
함께 다닌 동네친구 사이라고 했다. 그가 요셉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딘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요셉이 인사를 건넸다. 요셉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고집 세고 고지식해 보였다. 제대한지 얼마 안 된 복학생이어서 머리카락은 짧았고 옷을 맵시 있게 입기 힘든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목소리는 가늘었다. 그녀는 건성으로 요셉에게 고개를 까딱한 다음 다시 가브리엘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연습실을 나왔다. 문을 닫으며 한 번 더 돌아보니 가브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은 결단력을 발휘하여 다음 주부터 바로 예비신자를 위한 성당 교리반에 다니기 시작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