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꽃대가리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문학작품은 사랑 아니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

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실패한 사람

국가적 기억상실을 거부한다

튀는 퀴어, 나는 퀴어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런 때가 있었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요소들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김사량, 사선을 넘어 태항산에 들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1969년 베트남 어느 산기슭에서

가장 독창적인 동아시아의 도원도

그들의 땅, 거기에 깃들기

백화점에서 쇠스랑 닮은 포크로 먹는 ‘난찌’

①20 02 02 14,소녀 가장 ②실물,형식

①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②새 식구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알아서 기지 않는 문학’

‘지혜가 있는 폰’이 일으킨 시장혁명 그리고 새로운 문명

동화가 된 소설, 영화가 될 수 없는 소설

신화의 땅에서 일어난 민족 수난사

사랑을 담아줘

대하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

전후 한국문학 대표작의 사변성과 사회성을 읽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20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기획특집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 <기생충>과 <사랑의 불시착>의 복고

이영재|영화평론가,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1974년생
저서 『제국일본의 조선영화』 『아시아적 신체』 등

기획특집② 레트로 뉴트로 1990


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 <기생충>과 <사랑의 불시착>의 복고






  1. ‘시네마’라는 유구한, 오래된 유토피아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 소식을 듣는다. 클릭, 클릭, 클릭. 알다시피 새 소식은 한정되어 있고, 수많은 지면은 주어와 목적어를 바꾼 같은 내용의 기사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거듭되는 무용한 서칭.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새로움에 대한 기대 없는 단순한 반복.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은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감동적이다.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와 80년대 스플래터 무비의 반체제적 상상력까지를 ‘조크’로 불러오는 이 사려 깊은 언급은 단지 같은 자리에 모여있는 자들에 대한 배려의 차원만이 아니다. 그것은 마블이 대표하는 ‘테마파크’로서의 영화에 대해 여전히 ‘시네마’로서의 영화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동료들에게 보내는 유쾌한 연대를 보여준다(마블 영화의 시청각-촉각적인 쇼크 효과를 테마파크로 적절히 명명한 것은 다름 아닌 스콜세지다). 이 수상수감은 오래된 ‘영화’ 세계가 처한 위기의 유토피아에 대한 ‘복고풍’의 언급으로 읽힌다.
  포스트 시네마 시대에 여전히 ‘영화’의 연대를 보여주는, 일찌감치 국경을 넘은 ‘영화’ 세계의 오래된 우정의 확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시아, 비영어 영화가 칸 황금종려상에 이어 무려 ‘백인, 남성, 영어’의 공고한 삼각동맹으로 이루어져온 ‘아카데미’ 세계에서 ‘최초의 비영어 영화 작품상’을 수상한 사실은 여전히 놀랍고 SNS를 들끓게 한다(물론 ‘백인, 남성, 영어’라는 오래된 ‘아카데미’ 세계에 대한 최근의 격렬한 비판이 유색인종 및 여성 심사위원의 숫자를 대폭 늘리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지적해두자). 대통령 역시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라고 축하 트윗을 전한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어쩌면 대통령의 트윗은 한국이라는 장소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익스트림한 형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닌 건 아닐까.

  2. <기생충>이라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기생충>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영화에는(요즘 영화들의 어떤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그 어떤 이미지의 속임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디테일은 퍼즐의 조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오래전 영화가 그랬듯이 프레임의 구석구석을 골고루 채우며 풍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해석의 난반사를 만들어내며, ‘신박한’ 해석을 경주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 아마도 <기생충>의 정반대편에 놓여 있는 영화는 <곡성>일 것이다. 이 ‘기만’의 영화는 그에 대한 비평적 입장과는 별도로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고 얼마나 우리를 기망했는가). 봉준호의 영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반대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야말로 오래된 영화의 문법에 근거한 명징한 이미지들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해석의 난반사가 아닌 해석의 ‘공동체’를 새삼 지향한다.
  세상은 말 그대로 지상의 인간과 광범위한 지하의 인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하의 인간(under class)은 더 이상 산업화 시대의 잠재적 노동력조차 되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만약 혁명이 더 좋은 삶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여기에 붙는 혁명이란 말은 얼마나 조롱처럼 들리는가)의 시간에 그들이 치밀한 ‘계획’을 통해 얻은 일자리란 지상의 인간의 더 쾌적한 삶(운전수, 가사도우미)과 안전한 학벌 자본을 위한 보조 장치(과외선생)이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있지만, 사용이 끝나면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시장은 너무나 탄력적이고 ‘유연’해서 사소한 불운과 오해만으로도 언제든지 교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지하의 인간은 잠재적 노동력이 아니라 항상적 잉여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항상적 잉여에서 등기조차 필요 없는 잉여가 될 때 그 인간은 세계에 기입되지 않은 존재, 유령이 된다. 유령은 인간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유령’을 본 영화 속 아이는 얼마나 놀랐는가). TV 뉴스 리포터가 박 사장을 죽이고 사라진 범인의 소식을 전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뉴스 카메라의 건조한 프레임에 잡힌 거리는 텅 비었고, 기택(송강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부자 동네의 그 많은 CCTV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하다. 지하의 지하로 숨어든 기택은 근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죽은 자(living dead)가 되었으니.   <기생충>의 기택과 근세는 2000년대 이후 그토록 빈번히 출몰하는 리빙데드와 언데드의 계보와 아주 가깝다. 다시 말해 아이가 본 것은 실은 육체 없이 혼을 가진 유령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육체가 있음에도 포착·인지되지 않는 언데드(undead)인 셈이다. 좀비들은 사회 바깥으로 추방된 자들이며,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붙들려 있는 존재들이 되어버린 무수한 인간의 형상을 보여주는 존재들에 다름 아니다.
  <기생충>이 놀랍도록 시네마틱한 투명성으로 영토를 불문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를 시각화할 때, 그것이 불러일으킨 전 지구적 공명이야말로 아마도 이 영화의 어떤 ‘보편성’의 강력한 증좌라고 할만하다. 만약 내셔널 시네마가 민족-국가 정체성의 수행적 형성-전시라는 해묵은 개념 하에 여전히 놓여 있는 것이라면 <기생충>과 같은 영화는 아마도 내셔널 시네마와 전혀 상관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더없이 ‘한국적’인 영화인데,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가 마련해놓은 이 플랫한 소비공간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샘플 공간인 한 그렇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마저도 사라진(기우가 집을 사서 지하실의 아버지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겠다고 꾸는 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우리 모두 안다) 이 세계에서 “여전히 신용이 떨어지지 않은 희망의 투자처”(지그문트 바우만)는 과거다. 그러니까 이곳은 누군가의 언급처럼 바우만이 죽기 직전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세계이다. 바야흐로 ‘향수’가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유일한 자원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가 아닌 어디를 향한 갈망을 지나간 시간 속에 투여하는 향수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는 당연한 말이지만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다. 과거의 재현이 세트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트장은 광경을 이루는 디테일, 조명, 구도, 배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절가능하다. 그때 과거는 암울한 미래와 달리 유일하게 조절가능한 것으로서 재현될 수 있다. <기생충>은 그러나 반지하-지상-성채적 삶이 과거와 같이 극복가능한 ‘발전적 시간’의 축에 놓일 수 없는, 즉 현재적 단절과 넘어설 수 없는 격차 위에 존재함을 보임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절망을 세계화한다.

  3.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레트로-북한
  최근 한국 로맨스 판타지 서사의 놀라운 탄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사례 중 하나를 들라면 북한군 엘리트 남성과 남한 재벌 여성의 로맨스를 그린 <사랑의 불시착>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북한이라는 장소에 대한 남한 사람의 어떤 현재적 인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곳은 더 이상 헤어진 가족 서사, 이산의 핏줄 서사가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북한은 한국어가 자유자재로 통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여권 파워가 통하지 않는 장소, 자유로운 오감이라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권능감이 적잖이 침해되는 장소이다(<사랑의 불시착>의 기획의도의 첫 문장은 대한민국 여권의 ‘유능’함을 지적하면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하여 돌풍을 타고서야 그곳에 갈 수 있었던 여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즐거운 탐사를 시작한다. 명멸하는 전기 사정, 노는 아이들을 찾는 엄마들의 목청, 여기는 어쩌면 대한민국의 과거처럼 보인다. 현재의 공존과 화해 무드에 적절히 반응한 이 텍스트는 갈 수 없고 볼 수 없던 장소를 레트로의 감각자원을 분배하여 목가적 풍경으로 재탄생시킨다.
  마을에는 거짓말처럼 불이 반짝반짝 켜지고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나와 이른 아침밥을 짓는 여자들은 돌연 스피커에서 나오는 구령에 맞춰 아침 체조를 한다. 저마다 목에 작은 스카프를 맨 아이들은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간다. 이 ‘오즈의 나라’는 기묘하게 낯익다. 저녁이면 엄마들이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세트장의 마을은 타임워프의 감각을 선사한다. 여자들은 마을의 공동 수도에 모여 빨래를 하고, 함께 ‘김장전투’를 벌인다. 심지어 인스턴트와 레토르트 식품으로 채워진 남한의 싱크대 찬장에 비해 그곳의 곳간에 묻어놓은 먹거리는 참으로 ‘오가닉’하다. ‘잊혀진’ 목가적 공동체는 적절한 디테일이 부여하는 현실 효과(이 드라마는 실제 탈북자들의 자문을 통해 가급적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홍보되었다)와 어우러져 믿을 만한 것으로 거기 존재한다.
  그것은 낯선 것에 대한 진입장벽을 최대치로 낮출 뿐만 아니라, 그 낯선 것을 아예 나의 것이었다고 가정되는 과거로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아예 나의 것으로 전유해온다. 적어도 이것을 북한 사람들이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이나 시혜적 대상,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지옥으로만 간주되어왔던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레트로로 재현된 그곳에는 역사도 없고 협상해야 할 타자도 없다.
  레트로가 유행이라는 단어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행은 아감벤의 말처럼 과거의 자원으로부터 이런저런 ‘인용’을 해올 뿐, 역사를 모른다(이것은 레트로가 언제나, 동시에, 또한 뉴트로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의 불시착>은 이곳의 ‘문화 콘텐츠’들이 처하는 대부분의 운명처럼 곧 새로운 콘텐츠의 연이은 등장으로 잊혀질 것이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고, 새로운 환호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텍스트는 어떻게 남한의 대중문화가 ‘레트로토피아’로서 북한을 재영토화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적절한 사례로서 기록될 가치가 있다.
  복고의 시도들은, 현재의 난관들에 대한 ‘경험 가능한’ 대안처럼 보이지만, 그 경험을 역사화하여 현재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필요로 한다. <기생충>이 유토피아에 대한 사라진 전망이 레트로토피아로서 대체되는 현재를 보여주는 한편 그 불가능성까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보고서라면,
<사랑의 불시착>은 분단체제라는 한국의 비극까지를 ‘고유한’ 복고의 질료로 삼아 세계화하는 레트로토피아적 상상력의 가장 확장적이고 대중적인 형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