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기획특집
1989년부터 2000년까지
대략 이 시기가 내가 규정하는 ‘1990년대’라면, 우선 내겐 ‘1990년대’를 회상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겸연쩍음이 있다. 그때 나는 고작 다섯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의 어린 나이였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즐겨 쓰는 표현으론, ‘의식 없는 살덩어리’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잘 알거나 최소한 경험하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1990년대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존재했던 무지한 자에게도 원체험은 남아 있으니,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2000년 이후에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내게 2000년 이후의 시간은 그다지 밀도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2020년이나 되었지만. 마치 일본 청년들이 ‘나도 쇼와시대(1926~1989년)에 태어났기에 버블을 경험했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하간 내게도 20세기에 태어났다는 자의식이 있다. 유년기의 모든 경험들은 1990년대의 정치경제와 문화적 배경에서 무관하지 않을 테니, 2000년 이후를 성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이루는 기반도 사실 그 시절의 영향 아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1980년대(민정당 집권 시기)에, 바로 집권당인 민정당사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나자마자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민정’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을 자주 밝히곤 한다. 군사정권의 집권여당과 같은 이름을. 그리고 내가 살아온 1990년대는 어쩌면 그런 종류의 무심함과 흡사한 시간들이었음을 자주 의식한다. ‘새천년’이라는 조어는 그 시기를 살던 사람들에게 어떤 비전을 주었나? 무슨 비전을 바라봤기에 그 시간을 그토록 무심하게 통과하기 바빴을까? 새천년 이후에 3G, 4G, 5G가 등장하기는 했다. 그건 내가 어릴 적에 무수히 상상하던 공상과학동화와 비슷한 무지막지한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는 아직 기왕의 야만이 떨쳐지지 않은 시기였고, 새로운 욕망과 그 야만이 손을 잡고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소녀였던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 시절을 청년으로 보낸 사람들에게는, ‘너바나(Nirvana)가 곧 정치였던’, 문화연구자들이 말하는 ‘문화가 곧 정치경제의 방증’이라는 사실을 오롯이 증명하는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도 종종 목격했던 ‘90년대 학번’들은 자신들이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냈음을 복잡한 심경으로 돌아보곤 했다. 80년대 학번들의 혁명에서 밀려나고, 무색무취의 ‘신세대’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거나 세기말과 IMF의 혼란스러운 컬래버레이션에 휩쓸렸던 세대라는 자의식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러나 저간에 그 시절을 문화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나는 이제 90년대 학번들이 재현의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느낀다. 너바나와 서태지가 그들의 투쟁이었다 해도,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한 한 작가가 자신은 이제 기존의 작가들과는 다르게 계급이건 혁명이건 알 바 아니라고 선언하는 일이 가능했다 해도(그러나 그런 것들을 알 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내게는 남 이야기다. 1990년대에 성인이었던 자들이 자기 세대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아이들은 뭘 느꼈나.
몇 년 전, SNS에서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제하 동영상이 인기였다. 1990년대에 촬영된 이 영상에서는 배꼽티와 핫팬츠 등 자유로운 옷차림을 한 여성이 등장해 다른 어떤 이유도 없고, 오직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입을 뿐이다, 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보다 지금이 더 퇴보했다고 혀를 찼고, 그 영상 속 여성의 옷차림과 자신의 20대 시절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린 사람들이 과거를 추억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1990년대가 여성들에게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나, 그렇게 여성들에게도 너바나가 가능한 시절이었나? 사실 내가 기억하는 건 숱하게 핸드백이 찢겨 귀가하던 젊은 고모의 모습, 어딘가에서 성폭행 당할 뻔 했다고 조카인 내게 귀띔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성인 여성이 된다는 건 정글로 들어가는 일이구나, 나도 저렇게 면도칼로 테러당하는 인생을 살기 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내 모습이다. 배꼽티를 입던 언니들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추측하며 슬퍼하기도 전에, 내게는 그 자유라는 것이 마치 신자유주의의 자유처럼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건 마치 우리 사회와 너무나 구조적으로 닮아 있는 일본 사회의 조금 앞선 시기에, 가령 1980년대의 히트작인 ‘코카콜라’ CF에서 묘사된 OL(Office Lady)의 즐겁고 활기찬 이미지가 새로운 산업사회가 직장 여성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세련되게 감추고 있는 것처럼 기만적이다. CF속 OL의 이미지는 몇 년 후 한국 코카콜라 CF에서도 똑같이 패러디되었다. 더 이상 ‘공순이’도 ‘술집 작부’도 아닌 도시 여성을 시사하는 듯한 OL에게 부여된 모순적인 이미지의 실체는 일본에서 간행된 『도쿄전력 OL 살인사건』(사노 신이치, 글항아리, 2018)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내게 배꼽티를 입은 언니의 모습은 딱 그만큼의 자유를 허락하며 철조망을 쳐버린 당시의 여성혐오를 오히려 드러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시절에 내가 만났던 젊은 사회인 여성들, 유치원과 학교와 학원 교사들은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정확히, ‘언제나 면도칼로 가방을 뜯길 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는’ 삶일 뿐이었다. 오히려, 1990년대가 주는 탈정치적인(그러나 혹자는 그것이 가장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그 시기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폭력을 자연스레 포장한다.
더불어 내게 1990년대를 집약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娼(창)>(1997) 의 결말부 장면이다.
1990년대는 주인공 여성에게 몰락의 시기이기도 한데, 결말부에 그녀는 오토바이 뒷좌석을 타고 강남대로를 지난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의 기구한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불행해졌는데, 그녀가 그 세계 바깥으로 나와 마주한 도시의 풍경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천루 사이를 멍한 얼굴로 지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옛날 영화 속 기구한 여성들, 배우 한다고 서울 갔다가 강간을 당해 삶이 망가져버린 여성이라거나, 공장에 취업해서 동생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하다가 남자를 잘못 만나 망가진 여성들(사실 <창>의 주인공인 성매매 여성의 삶도 다르지 않다)은 그대론데, 세상은 놀랍도록 그대론데, 도시의 모습만 바뀌어있다는 것을 섬뜩하게 자각했다. 이게 바로 사이버펑크 아닌가. 마천루와 스카이워크가 즐비하지만 도시의 뒷골목은 그와 대비되어 더욱 처참하게 가난한.
1990년대가 모두에게나, 누구에게나 자유로웠나. 아마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기가 더욱 가난했고, 더욱 불행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환호를 함께 누릴 수 없고, 오히려 그 환호의 소음 때문에 더욱 웅크려야 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1990년대를 즐겁게 소환하는 흐름이 조금 불편하다. 내가 무력한 아이로서 목격한 그 시절은 옛 영화에서 묘사된 1970년대, 1980년대의 어두운 정경과 별다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짐했었다. 중학교에 가서 앞머리가 눈을 찌르면 날라리로 찍힌다고 경고받던 그 시절에. 내가 어른이 되면 저 여자들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이제 2020년이 되었지만, 1990년대의 야만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한참이나 멀리 왔는데도.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나의 1990년대
박민정｜소설가, 1985년생
장편소설 『미스 플라이트』 『서독 이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 등
기획특집① 레트로 뉴트로 1990
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 나의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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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 시기가 내가 규정하는 ‘1990년대’라면, 우선 내겐 ‘1990년대’를 회상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겸연쩍음이 있다. 그때 나는 고작 다섯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의 어린 나이였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즐겨 쓰는 표현으론, ‘의식 없는 살덩어리’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잘 알거나 최소한 경험하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1990년대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존재했던 무지한 자에게도 원체험은 남아 있으니,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2000년 이후에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내게 2000년 이후의 시간은 그다지 밀도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2020년이나 되었지만. 마치 일본 청년들이 ‘나도 쇼와시대(1926~1989년)에 태어났기에 버블을 경험했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하간 내게도 20세기에 태어났다는 자의식이 있다. 유년기의 모든 경험들은 1990년대의 정치경제와 문화적 배경에서 무관하지 않을 테니, 2000년 이후를 성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이루는 기반도 사실 그 시절의 영향 아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1980년대(민정당 집권 시기)에, 바로 집권당인 민정당사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나자마자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민정’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을 자주 밝히곤 한다. 군사정권의 집권여당과 같은 이름을. 그리고 내가 살아온 1990년대는 어쩌면 그런 종류의 무심함과 흡사한 시간들이었음을 자주 의식한다. ‘새천년’이라는 조어는 그 시기를 살던 사람들에게 어떤 비전을 주었나? 무슨 비전을 바라봤기에 그 시간을 그토록 무심하게 통과하기 바빴을까? 새천년 이후에 3G, 4G, 5G가 등장하기는 했다. 그건 내가 어릴 적에 무수히 상상하던 공상과학동화와 비슷한 무지막지한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는 아직 기왕의 야만이 떨쳐지지 않은 시기였고, 새로운 욕망과 그 야만이 손을 잡고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소녀였던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 시절을 청년으로 보낸 사람들에게는, ‘너바나(Nirvana)가 곧 정치였던’, 문화연구자들이 말하는 ‘문화가 곧 정치경제의 방증’이라는 사실을 오롯이 증명하는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도 종종 목격했던 ‘90년대 학번’들은 자신들이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냈음을 복잡한 심경으로 돌아보곤 했다. 80년대 학번들의 혁명에서 밀려나고, 무색무취의 ‘신세대’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거나 세기말과 IMF의 혼란스러운 컬래버레이션에 휩쓸렸던 세대라는 자의식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러나 저간에 그 시절을 문화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나는 이제 90년대 학번들이 재현의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느낀다. 너바나와 서태지가 그들의 투쟁이었다 해도,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한 한 작가가 자신은 이제 기존의 작가들과는 다르게 계급이건 혁명이건 알 바 아니라고 선언하는 일이 가능했다 해도(그러나 그런 것들을 알 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내게는 남 이야기다. 1990년대에 성인이었던 자들이 자기 세대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아이들은 뭘 느꼈나.
몇 년 전, SNS에서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제하 동영상이 인기였다. 1990년대에 촬영된 이 영상에서는 배꼽티와 핫팬츠 등 자유로운 옷차림을 한 여성이 등장해 다른 어떤 이유도 없고, 오직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입을 뿐이다, 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보다 지금이 더 퇴보했다고 혀를 찼고, 그 영상 속 여성의 옷차림과 자신의 20대 시절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린 사람들이 과거를 추억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1990년대가 여성들에게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나, 그렇게 여성들에게도 너바나가 가능한 시절이었나? 사실 내가 기억하는 건 숱하게 핸드백이 찢겨 귀가하던 젊은 고모의 모습, 어딘가에서 성폭행 당할 뻔 했다고 조카인 내게 귀띔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성인 여성이 된다는 건 정글로 들어가는 일이구나, 나도 저렇게 면도칼로 테러당하는 인생을 살기 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내 모습이다. 배꼽티를 입던 언니들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추측하며 슬퍼하기도 전에, 내게는 그 자유라는 것이 마치 신자유주의의 자유처럼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건 마치 우리 사회와 너무나 구조적으로 닮아 있는 일본 사회의 조금 앞선 시기에, 가령 1980년대의 히트작인 ‘코카콜라’ CF에서 묘사된 OL(Office Lady)의 즐겁고 활기찬 이미지가 새로운 산업사회가 직장 여성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세련되게 감추고 있는 것처럼 기만적이다. CF속 OL의 이미지는 몇 년 후 한국 코카콜라 CF에서도 똑같이 패러디되었다. 더 이상 ‘공순이’도 ‘술집 작부’도 아닌 도시 여성을 시사하는 듯한 OL에게 부여된 모순적인 이미지의 실체는 일본에서 간행된 『도쿄전력 OL 살인사건』(사노 신이치, 글항아리, 2018)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내게 배꼽티를 입은 언니의 모습은 딱 그만큼의 자유를 허락하며 철조망을 쳐버린 당시의 여성혐오를 오히려 드러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시절에 내가 만났던 젊은 사회인 여성들, 유치원과 학교와 학원 교사들은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정확히, ‘언제나 면도칼로 가방을 뜯길 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는’ 삶일 뿐이었다. 오히려, 1990년대가 주는 탈정치적인(그러나 혹자는 그것이 가장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그 시기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폭력을 자연스레 포장한다.
더불어 내게 1990년대를 집약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娼(창)>(1997) 의 결말부 장면이다.
1990년대는 주인공 여성에게 몰락의 시기이기도 한데, 결말부에 그녀는 오토바이 뒷좌석을 타고 강남대로를 지난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의 기구한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불행해졌는데, 그녀가 그 세계 바깥으로 나와 마주한 도시의 풍경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천루 사이를 멍한 얼굴로 지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옛날 영화 속 기구한 여성들, 배우 한다고 서울 갔다가 강간을 당해 삶이 망가져버린 여성이라거나, 공장에 취업해서 동생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하다가 남자를 잘못 만나 망가진 여성들(사실 <창>의 주인공인 성매매 여성의 삶도 다르지 않다)은 그대론데, 세상은 놀랍도록 그대론데, 도시의 모습만 바뀌어있다는 것을 섬뜩하게 자각했다. 이게 바로 사이버펑크 아닌가. 마천루와 스카이워크가 즐비하지만 도시의 뒷골목은 그와 대비되어 더욱 처참하게 가난한.
1990년대가 모두에게나, 누구에게나 자유로웠나. 아마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기가 더욱 가난했고, 더욱 불행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환호를 함께 누릴 수 없고, 오히려 그 환호의 소음 때문에 더욱 웅크려야 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1990년대를 즐겁게 소환하는 흐름이 조금 불편하다. 내가 무력한 아이로서 목격한 그 시절은 옛 영화에서 묘사된 1970년대, 1980년대의 어두운 정경과 별다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짐했었다. 중학교에 가서 앞머리가 눈을 찌르면 날라리로 찍힌다고 경고받던 그 시절에. 내가 어른이 되면 저 여자들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이제 2020년이 되었지만, 1990년대의 야만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한참이나 멀리 왔는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