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꽃대가리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문학작품은 사랑 아니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

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실패한 사람

국가적 기억상실을 거부한다

튀는 퀴어, 나는 퀴어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런 때가 있었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요소들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김사량, 사선을 넘어 태항산에 들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1969년 베트남 어느 산기슭에서

가장 독창적인 동아시아의 도원도

그들의 땅, 거기에 깃들기

백화점에서 쇠스랑 닮은 포크로 먹는 ‘난찌’

①20 02 02 14,소녀 가장 ②실물,형식

①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②새 식구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알아서 기지 않는 문학’

‘지혜가 있는 폰’이 일으킨 시장혁명 그리고 새로운 문명

동화가 된 소설, 영화가 될 수 없는 소설

신화의 땅에서 일어난 민족 수난사

사랑을 담아줘

대하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

전후 한국문학 대표작의 사변성과 사회성을 읽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20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내 글쓰기의 스승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김별아|소설가, 1969년생
소설집 『꿈의 부족』, 장편소설 『미실』 『논개』 『채홍』 『가미가제 독고다이』 『구월의 살인』 등


  기억은 때로 열망으로 재구성된다. 내가 기억하는 그 가을날의 오후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중고 혼다 오토바이는 버스조차 운행되지 않는 비포장 십 리 길을 오가는 데 다리를 제외한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다. 후일 국어 교과서에서 김종길의 시 「성탄제」를 읽을 때, ‘한 마리 어린 짐승’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기억에 편입시켰다.
  면 소재지에 다녀온 아버지는 ‘붉은 산수유 열매’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선물을 꼭 가져왔다. 진주 햄 소시지와 펭귄 꽁치 통조림, 여름에는 단맛과 쓴맛이 함께 나는 아이스께끼, 겨울에는 볏짚 속에 묻힌 국광과 홍옥 사과를 오토바이 꽁무니에 바리바리 싣고 왔다.
  고립은 익숙한 것이었다. 산간벽지 분교의 교직원 관사는 학생들이 사는 골짜기에서 한참을 떨어진 산등성에 외따로 있었다. 고립된 관사에서 살게 된 나는 흙을 파고 풀을 뜯으며 놀았다. 아주 단순하고 천천한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날 서느런 옷자락의 젊은 아버지가 황톳길을 달려 싣고 온 것이 산수유 열매보다 더 알알이 나를 붉혔다.
  “열 번째 생일 선물이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반짝이의 광택이 새뜻하고 사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찮은 부피와 각각이 상자로 감싸인 크라운판 하드커버가 그럴듯했다. 나는 그만 한눈에 그것에 반해버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집에서 저 집으로 사십 년이 꼬박 지나도록 끌고 다닌 건 그런 첫정 때문이다.

 

  지금도 책장 맨 위 칸에 나란히 꽂혀 있다. 금성출판사에서 펴낸 『칼라 명작-소년소녀 세계문학』 30권. 대부분 표지가 헐어 나달나달하고 몇 권은 테이프로 보수를 했다.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서 책장 맨 위로 밀려 올라갈 때 그들은 이미 손때에 시달려 그 몰골이었다.
  제1권은 영국 편, 「걸리버 여행기」와 「올리버 트위스트」 등이 실려 있다. 2권부터 3권까지 「보물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이터 팬」, 「정글 북」 등의 영국 편이다. 그리고 4권부터 6권까지 「소공녀」, 「톰 소여의 모험」 등을 망라한 미국 편, 이후로 프랑스, 도이칠란드, 북유럽, 남유럽, 러시아, 그리고 동양 편이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그 안에 있었다. 이야기가 펼쳐 보여주는 세계, 낯설고도 황홀한 그곳으로 정신없이 끌려 들어갔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다. 나는 그만 ‘이야기’ 그 자체에 사로잡혀 버렸다.
  기실 전집은 일본의 ‘명작’ 시리즈를 본뜬 중역에 다이제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간벽지에 고립된 열 살배기 아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뜨겁고 알알한 매혹의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니.
  문학은 기본적으로 무사독학(無師獨學)이라 믿는다. 삼인행 필유아사언에 줄탁동시와 반면교사까지 총동원해도 스승 없이 스스로 배우는 독학자의 지독한 고독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거인의 어깨’를 빌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서사의 정수를 품은 이야기의 넓고 단단한 어깨는 언제나 큰 스승이었다. 비단 글쓰기만이 아니라 삶의 지침이 그 매혹의 순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끄는 대로 기꺼이 끌려갔다. 세상을, 인간을 ‘이야기’로 경험하고 이해했다.
  ‘소년소녀 세계명작’ 30번째는 ‘고전편’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이솝 우화」, 그리고 「그리이스 신화」와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나는 마지막 30권을 특히 좋아했는데,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으며 마침내 전에 없던 꿈 하나를 꾸게 되었다. ‘이야기 잘하는 셰헤라자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천 일 동안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사슬을 만들고 싶다는 것.
  기실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천 가지 이야기(Hazar Afsanah)’ 원작은 ‘소년소녀’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니다. 알라딘과 알리바바와 신밧드의 이야기로 감춰졌던 비밀은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 있던 삼성출판사판 ‘성인용’, ‘아라비안나이트’ 전작으로 밝혀졌다. 권력과 배신과 색정의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 욕망의 사슬이 이야기의 그것만큼이나 검질기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얼마 전 우연히 ‘강경역사박물관’에 들렀다가 기증품들 사이에서 1977년 6쇄를 찍은 삼성출판사 판 『아라비안 나이트』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들춰보고는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금성출판사 판 ‘소년소녀 세계문학’ 30권을 찾았다. 그런데 책장 위로 발돋움을 하다가 책갈피 끈이 빠져나와 있기에 무심히 당겼더니 툭 끊어지고 말았다.
  시간에 곰삭은 끈이 토막 난 채 손바닥에 남았다. 그것이 문득 이야기의 매혹을 잊고 사는 내 마음의 끈만 같아, 나는 그만 쓸쓸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