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기획특집
소호는
믿기 어렵지만 시인이다. 대부분의 하루를 침대 위에서 탕진하면서. 코앞에 닥친 마감의 고통을 예감하며 습관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이라도 글을 쓸 줄 알았다면 그건 아직 소호를 모르는 소리다. 소호가 책상에 앉아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쓰는 일이 아닌 영상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유튜브에 95년부터 2002년의 인기 가요를 보여주는 스트리밍이 등장하였다. 입소문을 통해 모여든 사람들은 온라인 탑골 공원을 방문하여 과거를 추억했다. 소호의 추억 속 연예인들은 90년대가 익숙하지 않은 10대들에 의해 ‘탑골 청하’나 ‘탑골 가가’로 불리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일명 세기말 감성으로 통칭하던 2000년의 대한민국은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해석할 수 없는 파괴적인 노래와 기이한 패션이 유행했다. 당대의 가수들은 무대에서 펄이 잔뜩 들어간 섀도와 립스틱을 바르거나, 비닐 소재의 통이 큰 바지를 입고 고개가 꺾일 때까지 테크노 댄스를 췄다. 유튜브에서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바로 2000년대 세기말 힙이었다.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실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2000년대 가수가 아닌, 양준일이다. 그는 ‘시간 여행자’ 혹은 ‘탑골 지디’라는 닉네임답게 그 시절에 맞지 않는 패션 센스로 인기를 끌었다. 귀여운 외모와 퍼포먼스는 덤이었다. 2010년대의 우리는 양준일을 소환하여 가나다라마바사2) 했고 현실에서는 50대이지만 유튜브에 살아있는 20대의 양준일을 팠다. 넘치는 덕심은 홍익인간의 뜻에 따라 널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양준일은 옛날 잊힌 가수를 소환하는 <슈가맨>에 나와 재조명되었다. 더는 무대에 서지 않고 식당에서 웨이터를 한다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짠했다. 재능이 아닌 단지 운이 없었던 한 가수의 결코 낡지 않은 오늘을 전 국민은 목도했고 한국은 다시 들끓었다.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양준일은 몇 주 되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비운의 가수’, ‘아는 사람만 아는 가수’에서 그는 이제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30년이 되어서야 그는 ‘비호감’의 꼬리표를 뗐다. 91년도에 데뷔한 시간 여행자는 2019년이 되어서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한국을 만났다. 소호는 책상에 앉아 양준일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어째서 오늘 옛날 사람에게 열광하는가.
오늘은,
어제의 단어를 모았다. 청계천과 고옥, 경성, 산록우유, 턴테이블, 코듀로이, 시티팝과 보안여관.
어제는,
오늘이 되었다. 배바지와 하이웨스트 팬츠처럼.
소호는 벗에게 “방금 쓴 문장이야” 말하고, 벗은 “힙하다”고 말했다.
힙이란,
무엇일까. 갑자기 소호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사정에 밝은, 앞서있는, 세상 물정에 통달한 것을 일컫는 형용사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진정한 ‘힙’은 사전적 용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소호는 사정에 밝고 세상 물정에 통달한 어른이지만 힙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소호는 온라인 블로거의 글에서 그 답을 찾았다. ‘힙’은 저항의 태도이며, 유행하게 되면 힙은 더 이상 힙이 아니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 연남동의 의자가 세상 불편한 카페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신다고 해서, 독립서점에 가서 일간 이슬아를 사서 읽는다고 해서 힙한 게 아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유행을 좇는 소호는 더는 힙하지 않은 것이다. 트렌드를 선도하되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쓰고,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중2병3)과 홍대병4)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소호는 오래도록 고민하다, ‘힙스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검색창에 질문을 적고 위키 하우투5)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생활습관은 물론 필요한 준비물도 쓰여 있었다. 빈티지 소품을 잘 활용하라는 말이 눈에 띈다. 옛날 것이지만 믹스매치해서 새롭게 입으라는 팁도 적혀 있다. 촌스럽되 촌스럽지 않으면서 새 시대를 살아야 한다니 어렵다. 익숙하지만 새로워 보이는 것. 소호는 그 말을 다시 검색한다. 반복한다.
아직도
소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벌써 4시간째다. 유튜브도 벗의 전화도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전문적인 글을 써보려고 뉴트로를 찾아본다. 복고풍이 새롭게 재해석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따분한 말들뿐이다. 소호는 전도유망한 시인이므로 이런 글로 서두를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호는 아는 것만 적기로 한다. 유행은 돌고 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가 지운다. 옛날 디자인을 이용한 제품 리패키지 마케팅 때문이라고 적었다가 지운다. 이게 다 힙스터 때문이다고 썼다가 지운다. 그리고 다시 적는다. 같은 소주인데, 어째서 하늘색 병의 진로가 더 잘 팔리는지 모르겠다고 적는다.
빈티지 컵이 유행하는 이유를, 오래된 간판에서 따온 것 같은 투박한 폰트가 유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적는다. 허나 이내 그 뒷줄에 예쁜데 왜 예쁜지 모르겠다고 진정으로 솔직하게 적는다.
어쩌면
소호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 문학계에도 윤동주 김소월 등의 초판본 시집 열풍이 불었고, 소호 역시 그 광경을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영화 동주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시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함께 회사에 다니던 동료가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들고 다니기에 물었다.
“시를 원래 좋아하시오?”
“아니 즐겨 읽지 않소.”
“헌데 어찌 한문이 가득한 초판본을 사셨소?”
“윤동주를 좋아하기도 하구.”
“참으로 것뿐이오?”
“개중에 표지도 예뻐서 샀소. 기왕에 예쁜 것이 낫지 않은가?”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빈티지 시집을 몇 권 샀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오래된 책이었지만, 왠지 이것이 새것 같았다.
곁가지의
이야기를 해보자. 2019년 연말, 소호는 인기 트로트 가수 유산슬의 카렌다를 샀다. 출시되자마자 무려 7만 부나 팔린, 나이트 카바레 전단 묶음 같은 괴상한 디자인의 달력이었다. 배송되자마자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 거실 한복판에 걸어 두었더니, 너무 튀어서 걸 수 없다고 엄마가 떼어 버리면서도 웃어 버렸던 비운의 달력. 소호는 생각한다. 어째서 걸지도 못할 달력을 샀을까. 마침내 시인다운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키치.’ 저속한 예술품을 칭하는 용어인데 현재는 일반 현대 미술품이나, 패션 등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키치는 하위문화, 대중 예술을 통칭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까지도 확장되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두고 ‘키치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키치한 카렌다를 좋아하는 ‘키치’한 소호나, #뉴트로_감성을_즐기는_소호나 사실 같은 말이다.
어제는
사옥정
오늘은
인싸들의 핫플
문래동은
과거 철공소가 즐비한 곳이었다. 철강 산업의 쇠퇴로 문 닫은 철공소가 생기고 아무도 찾지 않으면서 누군가는 그곳을 우범지역이라고 불렀다. 철강 산업의 쇠퇴인지 철공소를 외곽으로 옮기려는 국가의 정책 때문인지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문 닫은 철공소 그 자리로 예술인들이 들어오면서 분위기 좋은 카페나 공방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녹슨 철공소 옆 수제버거집 옆 벽화 옆 30년 된 백반집 옆 다시 철공소. 문래동은 이제 소위 ‘힙’한 동네가 되었다.
다행히
소호의 집은 문래동에서 멀지 않다. 버스를 타고 15분이면 갈 수 있다. 소호는 문래를 자주 찾고 또 좋아한다. 오늘 하는 문래동 외출은 여러모로 써야 할 주제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창작촌 예술인들의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래. 문래. 문래를 자꾸 떠올리니 소호는 ‘올드 문래’의 수제 맥주가 생각난다. 그걸 마시면 마감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
소호는 책상에서 일어나려 한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 줄도 쓰지 못한 날이다. 과연 나를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가? 홀로 그리 생각하고 좌절한다. 결국 오늘은 사전 조사라는 명목하에, 온라인 탑골 공원을 방문했다. 레트로 문화를 향유하는 힙스터들을 공부했다. 그걸 뉴트로라고 부르는 것을, 이 세 개가 모호한 경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판 시집을 추억하며, 문래동의 맛집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유산슬 카렌다에 적힌 마감 날짜를 보며.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던 것들이 이번에 써야 할 글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지 못하면서. 소호는 외출 직전의 조급한 마음에 기댄 채 창작자의 양심을 마지막으로 믿어 보기로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소호는 자판에 손을 얹는다. ‘시인 소호씨의 일일’이라고 적고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이내 첫 줄을 적기 시작한다. ‘소호는 믿기 어렵지만 시인이다’라고.
1) 제목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변주하였으며, 본문 역시 해당 소설의 어법과 구조를 따랐다.
2) 양준일의 노래 ‘가나다라마바사’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3) 중학교 2학년 나이의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실제로 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의 감수성과 반항심, 허세를 비꼬아 만든 신조어이다.
4) 홍익대학교와 병을 합한 신조어로 대중화된 시류를 무시하고 자신의 마니아적 취향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 예)혁오 밴드를 좋아하며 아이돌을 무시하는 태도.
5) 사이트 WiKi How 힙스터 되는 방법 http://reurl.kr/7161D46QI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이소호｜시인, 1988년생
시집 『캣콜링』 등
기획특집④ 레트로 뉴트로 1990
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
믿기 어렵지만 시인이다. 대부분의 하루를 침대 위에서 탕진하면서. 코앞에 닥친 마감의 고통을 예감하며 습관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이라도 글을 쓸 줄 알았다면 그건 아직 소호를 모르는 소리다. 소호가 책상에 앉아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쓰는 일이 아닌 영상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유튜브에 95년부터 2002년의 인기 가요를 보여주는 스트리밍이 등장하였다. 입소문을 통해 모여든 사람들은 온라인 탑골 공원을 방문하여 과거를 추억했다. 소호의 추억 속 연예인들은 90년대가 익숙하지 않은 10대들에 의해 ‘탑골 청하’나 ‘탑골 가가’로 불리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일명 세기말 감성으로 통칭하던 2000년의 대한민국은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해석할 수 없는 파괴적인 노래와 기이한 패션이 유행했다. 당대의 가수들은 무대에서 펄이 잔뜩 들어간 섀도와 립스틱을 바르거나, 비닐 소재의 통이 큰 바지를 입고 고개가 꺾일 때까지 테크노 댄스를 췄다. 유튜브에서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바로 2000년대 세기말 힙이었다.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실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2000년대 가수가 아닌, 양준일이다. 그는 ‘시간 여행자’ 혹은 ‘탑골 지디’라는 닉네임답게 그 시절에 맞지 않는 패션 센스로 인기를 끌었다. 귀여운 외모와 퍼포먼스는 덤이었다. 2010년대의 우리는 양준일을 소환하여 가나다라마바사2) 했고 현실에서는 50대이지만 유튜브에 살아있는 20대의 양준일을 팠다. 넘치는 덕심은 홍익인간의 뜻에 따라 널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양준일은 옛날 잊힌 가수를 소환하는 <슈가맨>에 나와 재조명되었다. 더는 무대에 서지 않고 식당에서 웨이터를 한다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짠했다. 재능이 아닌 단지 운이 없었던 한 가수의 결코 낡지 않은 오늘을 전 국민은 목도했고 한국은 다시 들끓었다.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양준일은 몇 주 되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비운의 가수’, ‘아는 사람만 아는 가수’에서 그는 이제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30년이 되어서야 그는 ‘비호감’의 꼬리표를 뗐다. 91년도에 데뷔한 시간 여행자는 2019년이 되어서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한국을 만났다. 소호는 책상에 앉아 양준일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어째서 오늘 옛날 사람에게 열광하는가.
오늘은,
어제의 단어를 모았다. 청계천과 고옥, 경성, 산록우유, 턴테이블, 코듀로이, 시티팝과 보안여관.
어제는,
오늘이 되었다. 배바지와 하이웨스트 팬츠처럼.
소호는 벗에게 “방금 쓴 문장이야” 말하고, 벗은 “힙하다”고 말했다.
힙이란,
무엇일까. 갑자기 소호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사정에 밝은, 앞서있는, 세상 물정에 통달한 것을 일컫는 형용사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진정한 ‘힙’은 사전적 용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소호는 사정에 밝고 세상 물정에 통달한 어른이지만 힙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소호는 온라인 블로거의 글에서 그 답을 찾았다. ‘힙’은 저항의 태도이며, 유행하게 되면 힙은 더 이상 힙이 아니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 연남동의 의자가 세상 불편한 카페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신다고 해서, 독립서점에 가서 일간 이슬아를 사서 읽는다고 해서 힙한 게 아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유행을 좇는 소호는 더는 힙하지 않은 것이다. 트렌드를 선도하되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쓰고,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중2병3)과 홍대병4)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소호는 오래도록 고민하다, ‘힙스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검색창에 질문을 적고 위키 하우투5)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생활습관은 물론 필요한 준비물도 쓰여 있었다. 빈티지 소품을 잘 활용하라는 말이 눈에 띈다. 옛날 것이지만 믹스매치해서 새롭게 입으라는 팁도 적혀 있다. 촌스럽되 촌스럽지 않으면서 새 시대를 살아야 한다니 어렵다. 익숙하지만 새로워 보이는 것. 소호는 그 말을 다시 검색한다. 반복한다.
아직도
소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벌써 4시간째다. 유튜브도 벗의 전화도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전문적인 글을 써보려고 뉴트로를 찾아본다. 복고풍이 새롭게 재해석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따분한 말들뿐이다. 소호는 전도유망한 시인이므로 이런 글로 서두를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호는 아는 것만 적기로 한다. 유행은 돌고 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가 지운다. 옛날 디자인을 이용한 제품 리패키지 마케팅 때문이라고 적었다가 지운다. 이게 다 힙스터 때문이다고 썼다가 지운다. 그리고 다시 적는다. 같은 소주인데, 어째서 하늘색 병의 진로가 더 잘 팔리는지 모르겠다고 적는다.
빈티지 컵이 유행하는 이유를, 오래된 간판에서 따온 것 같은 투박한 폰트가 유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적는다. 허나 이내 그 뒷줄에 예쁜데 왜 예쁜지 모르겠다고 진정으로 솔직하게 적는다.
어쩌면
소호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 문학계에도 윤동주 김소월 등의 초판본 시집 열풍이 불었고, 소호 역시 그 광경을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영화 동주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시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함께 회사에 다니던 동료가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들고 다니기에 물었다.
“시를 원래 좋아하시오?”
“아니 즐겨 읽지 않소.”
“헌데 어찌 한문이 가득한 초판본을 사셨소?”
“윤동주를 좋아하기도 하구.”
“참으로 것뿐이오?”
“개중에 표지도 예뻐서 샀소. 기왕에 예쁜 것이 낫지 않은가?”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빈티지 시집을 몇 권 샀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오래된 책이었지만, 왠지 이것이 새것 같았다.
곁가지의
이야기를 해보자. 2019년 연말, 소호는 인기 트로트 가수 유산슬의 카렌다를 샀다. 출시되자마자 무려 7만 부나 팔린, 나이트 카바레 전단 묶음 같은 괴상한 디자인의 달력이었다. 배송되자마자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 거실 한복판에 걸어 두었더니, 너무 튀어서 걸 수 없다고 엄마가 떼어 버리면서도 웃어 버렸던 비운의 달력. 소호는 생각한다. 어째서 걸지도 못할 달력을 샀을까. 마침내 시인다운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키치.’ 저속한 예술품을 칭하는 용어인데 현재는 일반 현대 미술품이나, 패션 등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키치는 하위문화, 대중 예술을 통칭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까지도 확장되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두고 ‘키치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키치한 카렌다를 좋아하는 ‘키치’한 소호나, #뉴트로_감성을_즐기는_소호나 사실 같은 말이다.
어제는
사옥정
오늘은
인싸들의 핫플
문래동은
과거 철공소가 즐비한 곳이었다. 철강 산업의 쇠퇴로 문 닫은 철공소가 생기고 아무도 찾지 않으면서 누군가는 그곳을 우범지역이라고 불렀다. 철강 산업의 쇠퇴인지 철공소를 외곽으로 옮기려는 국가의 정책 때문인지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문 닫은 철공소 그 자리로 예술인들이 들어오면서 분위기 좋은 카페나 공방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녹슨 철공소 옆 수제버거집 옆 벽화 옆 30년 된 백반집 옆 다시 철공소. 문래동은 이제 소위 ‘힙’한 동네가 되었다.
다행히
소호의 집은 문래동에서 멀지 않다. 버스를 타고 15분이면 갈 수 있다. 소호는 문래를 자주 찾고 또 좋아한다. 오늘 하는 문래동 외출은 여러모로 써야 할 주제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창작촌 예술인들의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래. 문래. 문래를 자꾸 떠올리니 소호는 ‘올드 문래’의 수제 맥주가 생각난다. 그걸 마시면 마감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
소호는 책상에서 일어나려 한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 줄도 쓰지 못한 날이다. 과연 나를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가? 홀로 그리 생각하고 좌절한다. 결국 오늘은 사전 조사라는 명목하에, 온라인 탑골 공원을 방문했다. 레트로 문화를 향유하는 힙스터들을 공부했다. 그걸 뉴트로라고 부르는 것을, 이 세 개가 모호한 경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판 시집을 추억하며, 문래동의 맛집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유산슬 카렌다에 적힌 마감 날짜를 보며.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던 것들이 이번에 써야 할 글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지 못하면서. 소호는 외출 직전의 조급한 마음에 기댄 채 창작자의 양심을 마지막으로 믿어 보기로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소호는 자판에 손을 얹는다. ‘시인 소호씨의 일일’이라고 적고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이내 첫 줄을 적기 시작한다. ‘소호는 믿기 어렵지만 시인이다’라고.
1) 제목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변주하였으며, 본문 역시 해당 소설의 어법과 구조를 따랐다.
2) 양준일의 노래 ‘가나다라마바사’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3) 중학교 2학년 나이의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실제로 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의 감수성과 반항심, 허세를 비꼬아 만든 신조어이다.
4) 홍익대학교와 병을 합한 신조어로 대중화된 시류를 무시하고 자신의 마니아적 취향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 예)혁오 밴드를 좋아하며 아이돌을 무시하는 태도.
5) 사이트 WiKi How 힙스터 되는 방법 http://reurl.kr/7161D46Q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