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꽃대가리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문학작품은 사랑 아니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

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실패한 사람

국가적 기억상실을 거부한다

튀는 퀴어, 나는 퀴어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런 때가 있었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요소들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김사량, 사선을 넘어 태항산에 들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1969년 베트남 어느 산기슭에서

가장 독창적인 동아시아의 도원도

그들의 땅, 거기에 깃들기

백화점에서 쇠스랑 닮은 포크로 먹는 ‘난찌’

①20 02 02 14,소녀 가장 ②실물,형식

①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②새 식구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알아서 기지 않는 문학’

‘지혜가 있는 폰’이 일으킨 시장혁명 그리고 새로운 문명

동화가 된 소설, 영화가 될 수 없는 소설

신화의 땅에서 일어난 민족 수난사

사랑을 담아줘

대하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

전후 한국문학 대표작의 사변성과 사회성을 읽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20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①20 02 02 14,소녀 가장

이진명|시인, 1955년생
시집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세워진 사람』 등

시①

겨울의 한가운데인데 예전 같은 추위도 없고, 눈도 없다. 하얗게 눈 덮인 산야, 눈 덮인 동네 집집의 지붕 같은 풍경은 이젠 볼 수 없나보다. 새하얀 눈에 새파란 하늘, 그렇게 새-자가 머릿자로 붙어야 하는 겨울 풍경이 있었다.
새-자가 붙어야만 하는 선연한 풍경, 선연한 감각이 있었다. 두 편 시 쓰는 즈음 싸하게 에리던 옛 겨울 풍경이 떠올랐다 꺼지곤 했다. 뭔가 그리운 것이었을까.


20 02 02 14
- 고 오규원 시인 13주기

일요일 오후 2시
작은 공간 세컨드 뮤지엄
12명에 늦은 2명
2자와 0자가 꼭꼭 붙었네
한 번씩들 괜히 2자와 0자를 짚었다

거리는 일요일이어서가 아니라
사람도 차량도 숨죽이듯 비었다
덮쳐온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검은 마스크의 정적이 떠가고 있다

경계를 넘어 빠르게 진행되는 바이러스랑은 아랑곳없이
고인의 시 한 편씩의 낭독 진행 느리고 느리다
각자 낭독하기 전 품어온 시 하나 앞에
또 낭독 끝내고 붙이는 감상과 추모의 짧은 얘기들
그 짧은 얘기들이 이상하게 길다

외부 사람 다섯에 제자들이 참석했다
첫 제자가 된다는 두 여자 시인을 다시 맘으로 봤다
고인 66세로 가셨으니 이르게 가신 거
이르니 아니니 다 군더더기 말
종이컵 커피와 케이크 조각, 비스킷, 귤처럼 무언이 답
비스킷 부스러기, 깐 귤 껍질의 허연 안쪽 무언이 답

미망인께서 가신 고인보다 더 살고 있다고
본인도 이제 간다는 것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미망인께서는 가신 고인의 나이를 얼마 전 넘기셨고
나는 가신 고인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 제 죽음을 부르며 제 죽음을 기억한다

세컨드 뮤지엄 북향 벽면에는
일부러 내리닫이로 냈다는 꽉 찬 창이 있다
그 창의 길로 옛 한옥 하나를 품은
깨끗하고 괜찮은 골목 풍경이 통으로 들어온다
정취와 절제의 모습 잘 간직하고 있다
그 창의 길로 자주 눈길 넘어갔다 오곤 했다


소녀 가장

가을 끝 무렵 곧 추운 겨울인데
쓰레기 내놓는 곳에 초본 화분 하나 내놔져 있다

꽃집에서 쉽게 사는 플라스틱 화분
마르긴 했으나 모양 나쁘지 않은 초본
아직 많이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머뭇거리는데 옆에 다가온 한 할머니의 참견
요 화초가 그래도 꽃이 예쁘게 핀다오

부피 자그마하고 가벼워 들고 왔다
물 주며 겨울 동안 안에서 초록 잎이나 보자 했다
죽지 않아야 될 일이겠지만
이름은 모르겠고
꽃도 모르겠고
지가 살면 살고 말면 말고

우선 씻겨 물 흠뻑 주고
며칠 기다렸다 영양액 흠뻑 주고
며칠 기다렸다 한 번 더 물 주고는
거실 뒤죽박죽의 한쪽 장 위에 올려놓고는 잊었다

살아나기는 하려나
한동안 지나 생각이 미쳐 다가가 살피니
어인 일 새잎이 쫑알쫑알 돋고 있었다
말라 말린 잎은 떼어내 주고
한동안 무심했던 만큼 물 넘치도록 꽉 주고
살려면 살아보려무나 또 한참을 잊었다

햇살이 퍼진 어느 오전 발을 구르며 외쳤다
어머, 얘, 얘 좀 봐. 꽃폈어. 꽃 피웠네. 어쩜, 언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지 혼자서 어떻게, 언제 핀 거야
물 챙겨 주지 않은 지 꽤 됐는데, 물 어디서 얻어먹은 거야

어린 미혼(未婚)의 연지곤지 같은 선연한 꽃송이가 셋
엄지손톱보다 크지 않은 세 송이의 설렘이 타는 티 없는 색
요런 색깔 요런 모양 요런 크기로 꽃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세 송이는 자고 나면 다섯이 되고 일곱이 되어
송이송이 서로를 붙이며 화사한 꽃숭어리를 이루었다
꽃 화분보다 초록 이파리만 내는 화분들만 편애했는데
편애를 깨고 꽃송이 꽃잎 한 장의 낱낱이 태양빛처럼 켜졌다

딸애한테 요 예쁜 것 좀 봐 나와 봐 좀 와서 봐봐
성화를 부렸고
남편한테도 얘 좀 봐 좀 가까이 와서 봐 색깔 좀 봐 모양 좀 봐
성화했고
모두 모두 아침에 일어나면 얘 먼저 볼 것
집 나가기 전에 보고 돌아와 보고 자기 전에도 꼭 보고 잘 것
얘한테도 나쁠 일 아니지만
다가가 봐주는 그대들 자신한테 하여튼 더 좋은 일인 거라고요
가족들 공감 동감해 주며 따라 주었으나 나만큼은 아니었고

남들 저버리고 있는 새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자기를 꽃피울 수 있는지
그것도 혼자서 말야 봉오리 내민 것도 모르게 말야
도대체 물 떨어졌을 텐데 청하러 오지도 않고

내 호들갑은 계속 그치지 않았다 그럴 밖에 없었다
그 화분은 한 달 가까이를 변함없이 나아가며
2단에서 3단으로 계획한 대로 차곡차곡 꽃숭어리를 지어 올렸다
몇 날은 3단을 이룬 전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지속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꽃 화분 앞에 바싹 가 예뻐하는 중인데
식탁에서 뭣인가를 지긋이 고안하고 있는 폼으로 앉아 있던 딸아이가
꽃 화분에 붙어 있는 내 쪽을 계속 주시하기도 하고 있던 아이가
완전 다른 나라 문장 같은 급을 매길 수 없는 문장을 날렸다

-소녀 가장이네.
-아무도 관심 1도 없는데 자기 혼자 예쁘게 꽃살림 잘하네

나는 대꾸하지는 않았다
꽃 피울 때까지 달 반 남짓의 시간
가만히 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물은 몇 번을 주었던가 세 번……
영양액은 단 한 번이었고
마르고 한데서 추웠던 소녀 가장에게는 충분치 않아……

꽃 사진 찍어 검색해서 이름이라도 알아둘까 했지만 그만뒀다
타국 이름 같은 소녀 가장이라는 이름 애릿하여 좋으니
우리 가족끼리 통하면 되었다

하여튼 삼단으로 층층 한 달여를 차례로 꽃피워 올린
그 한 분의 소녀 가장 덕분에 가족들 모두 그 분 가까이 모여 들여
웃고 감탄하며 올겨울을 화기(和氣) 피우며 잘 지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