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꽃대가리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문학작품은 사랑 아니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

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실패한 사람

국가적 기억상실을 거부한다

튀는 퀴어, 나는 퀴어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런 때가 있었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요소들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김사량, 사선을 넘어 태항산에 들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1969년 베트남 어느 산기슭에서

가장 독창적인 동아시아의 도원도

그들의 땅, 거기에 깃들기

백화점에서 쇠스랑 닮은 포크로 먹는 ‘난찌’

①20 02 02 14,소녀 가장 ②실물,형식

①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②새 식구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알아서 기지 않는 문학’

‘지혜가 있는 폰’이 일으킨 시장혁명 그리고 새로운 문명

동화가 된 소설, 영화가 될 수 없는 소설

신화의 땅에서 일어난 민족 수난사

사랑을 담아줘

대하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

전후 한국문학 대표작의 사변성과 사회성을 읽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20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나의 아버지

그런 때가 있었다

오은 |시인,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 1982년생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

 

  ‘아버지’라고 썼다가 ‘아빠’라고 고쳐 쓴다. 아버지는 멀리 있는 것 같고 아빠는 늘 옆에 있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빠를 으레 아빠라고 불렀다. 격식을 갖추지 않아야 속에 있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라고 나서도 나는 아빠라는 말을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가 성인이 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줄 알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는 아빠가 늘 아빠로, 아빠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처음으로 “아빠”라고 발음했을 때, 나는 아주 작고 어리고 힘없는 아이였을 것이다. 그때도 아빠는 어른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온전히 아빠였을 때,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단어를 내가 몰랐을 때, 아빠는 내게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아빠, 이것 좀 해줘”라고 말하면 아빠는 뚝딱 어떤 것을 완성해주셨다. “어떻게 했어?”라고 물으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는데,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아빠가 완성한 어떤 것이 놀랍고 귀해서, 아빠가 어른이라서, 아빠에게 부탁하면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독서의 즐거움을 처음 알게 해준 것도 아빠였다. 아빠가 재직하는 학교에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한글을 깨친 내가 읽으면 좋을 이런저런 책들을 수시로 빌려다 주셨다. “벌써 다 읽었어?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아빠가 물으면 나는 우선순위를 정해 책들을 늘어놓았다. “이 책은 그림이 예뻤어. 이 책은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좀 어려웠어.” 나의 말에 아빠는 책장 꼭대기에 있던 국어사전을 꺼내주셨다. 어린아이가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이렇게 커다란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빠, 나는 추리소설이 제일 좋은 것 같아. 커서 탐정이 될 거야.” 어느 날, 셜록 홈스와 아르센 뤼팽을 탐닉하던 아홉 살 오은이 호기롭게 말했을 때 아빠는 말했다. “탐정이 되려면 뭐가 필요할까?” 나는 셜록 홈스와 친구 왓슨이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답했다. “‘관찰’이야. 셜록 홈스가 왓슨에게 그랬어. “자네는 눈으로 보긴 하지만 관찰하지는 않아. 그런데 본다는 것과 관찰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과정이지.” 나는 관찰을 할 거야.” 아빠가 씩 웃었다.
  “관찰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뭘까?” 아빠와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글쎄… 시력?” 오답인 걸 알면서도 나는 대화가 끊길까 봐 아무 말이나 하고 보는 아이였다. “언제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어떤 것을 관찰하고 싶어?” “음… 궁금한 거? 더 알고 싶은 거?” 아빠는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셨다. 그때의 온기가 나를 ‘보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 작고 보잘것없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탐정이 되고 싶었던 어린이는 지금 시인이 되었지만, 넓게 보면 탐정과 시인 둘 다 관찰하는 사람일 것이다. 어떤 것을 평생 궁금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빠는 아낌없이 책을 사주셨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 걸 뻔히 아는데도, 서점에 가면 눈이 똥그래지는 내게 일주일 동안 볼 책들을 고르라고 말씀하셨다. “왜 일주일이야?” “일주일 있다가 또 오면 되지.”

 

“와!” 다음 날이 시험이어서 나는 문제집도 한 권 골랐다. “내일이 시험인데 이걸 지금 사면 어떡하려고.” “내가 다 풀 거야! 맹세할 수 있어!” 여전히 철없는 열 살 오은은 약속이라는 말 대신 맹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날을 새서 그 문제집을 다 풀었다. 물론 비몽사몽 상태로 시험을 치러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때, 아빠는 네가 멋져 보였어.” 고등학생이 되어 아빠와 산책하던 날이었다. “그때라니?” “너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 그때는 명칭이 국민학교였다?” “맞아. 시간이 흐르고 이름도 바뀌고 너도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아빠와 산책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걸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아빠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아빠.” “응?” “그냥 불러봤어. 옆에 있나 확인한 거야.” 아빠가 환히 웃었다. 그때만큼은 햇빛이든 달빛이든 별빛이든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이 고시 패스와 취업을 위한 공부에 여념이 없을 때에도 별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나는 산책하다가 “아빠, 나 대학원에 가려고.” “그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니?” 나의 말은 분명 두서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아빠는 아들을 믿어.” 아빠가 호스피스 병동에 계실 때, 문득 저 순간이 떠올랐다. 아빠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봤을까? 감히 묻지 못했다. 실은 아빠가 회한의 표정을 지을까 봐 두려웠었다.
  아빠는 바둑을 정말 좋아했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과 바둑을 둘 때 아빠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았다. 7년 전, 아빠의 문자를 받았다. “아빠가 오늘 누굴 만난 줄 아니? 이창호야!” 그 생각이 나서 아빠가 항암치료를 받을 때 『미생』을 사드렸다. 미생의 서사만큼이나 아빠의 주의를 끈 것은 매 장 뒤편에 실려 있는 기보였다. 아빠는 머릿속에 바둑판을 깔고 거기에 그 수들을 하나씩 두었다. 그 시간만큼은 아빠에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곧바로 도리질을 쳤다. 매일 밤, 울지 않으려고 시를 썼다.
  2018년 9월,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가 나왔다. 지난 1년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아빠 덕분에 참빗살나무, 맥문동, 칠엽수, 옥잠화, 비비추 등의 이름을 익힌 시간이었다. 아빠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연을 상상해보는 시간이었다. 시인의 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오해했습니다. 사람이라 이해하고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사람을, 마침내 사람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 건강하세요. 저는 이제야 겨우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아들이, 아빠에게 또다시 선물을 주었구나.”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들키지 않으려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겨우’라는 부사에 ‘또다시’ 눈물을 숨겼다.
시집이 나오고 얼마 후 가족끼리 남이섬에 갔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초록을 보면, 물을 보면 아빠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남이섬으로 향하는 배 안에 아빠와 엄마가 나란히 앉았다. 남이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벌써 많이 힘들어 보였다. “아빠, 사진 찍게 좀 웃어!” “힘들어서 못 웃겠어.” “억지로 웃어도 건강에 도움이 된대.” 아빠가 억지로 웃었다. 웃는데도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남이섬을 걸을 때 아빠가 내 손을 잡았다. 이 감촉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아빠와 마지막으로 산책하던 날이 떠오른다. 평소대로 아빠와 함께 근린공원에 가서 천천히 걷다 첫 번째 벤치에 앉아서 10분 정도 쉬었다. 거친 숨을 내쉬다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아들, 아빠는 행복해. 아들이 있고 큰아들이 있고 무엇보다 엄마가 있어서.” “그런 말을 왜 해, 아빠.” “행복하니까. 건강하게 5년, 아니 3년만 더 살고 싶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 나도 아빠가 있어서, 아빠 아들이라서 행복해’라고 말했어야 했다. 더 사실 수 있다고 북돋워드렸어야 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해가 일찍 졌다.
  집에 돌아와 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았다. “우리 아빠 잘생겼다. 엄마도 정말 예쁘네.”
  “그런 때가 있었지.” 그런 때가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을 하고 형과 나를 낳아 키우던 시간이.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간이. 다시 20여 년이 흐르고 가족이 다시 모여 살았던 1년이라는 시간이. 다시 살기 위해 독한 약물을 몸속에 흘려보내던 시간이.
  지난 1월 15일은 아빠의 첫 기일이었다. 봉안당에 가서 아빠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액자 속에 있는 가족사진도 바꾸었다. 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가서 찍었던 사진도 넣어드렸다. 아빠가 거기서도 ‘그런 때’를 여전히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