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산그늘

‘어린아이’ 되기의 시학을 향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고 실제 지명이 된 소설 『은비령』

문학, 다시 떠나는 아브람의 길

특집을 기획하며|2016 우리 문화의 아젠다 혹은 쟁점들 ①국가라는 신체, 애국이라는 증상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③미술계의 위작·대작 사건 톺아보기 ④기계적 친절이 싫다

한국문학, 압축된 광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의미하는 것

토해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절실한 말들

불꽃같은, 그러나 쓸쓸했던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고독과 산책, 고독한 산책

영화로 서구를 소비하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인도네시아 페칸바루에서

백조를 닮은 소설가 권지예

중계동, 서울의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곳

생활고와 싸운 고려 시 문학의 영수(領袖)

몸 생각 외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외

레테는 마르지 않는다 트레이너

안녕, 백곰

첫 번째|내설악 겨울나기 두 번째|대한민국에서 경차 타기 세 번째|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넘어 네 번째|이렇게 길을 달리다 보면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한국문학의 푸른빛을 보다 소설 부문|분단문학을 넘어선 연대기적 가족서사 시 부문|주체 없는 어떤 영원성 평론 부문|흔들릴수록 더욱 뚜렷이 보이는 희망의 불빛 번역 부문|유려하고 성취도 높은 스페인어 문장의 진경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한국의 혼을 지킨 러시아 작가 아나톨리 김

글로 걷는 순례길, 영상으로 지나가는 순례길

자신만의 ‘향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테러리스트

첫 번째 선을 긋는 것에 관해

개성적 문체가 된 번역투의 문장을 직역하다

‘모호성’을 ‘명확성’으로 혹은 모호성까지 살리지 못한

천둥벌거숭이 은자(隱者)가 되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대학생동북아대장정 동북아프론티어클럽(NAFC) 총회 및 제15기 출범식 등

단편소설

트레이너

이승은 ㅣ 소설가. 1980년생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2016년 대산창작기금 수상

그래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부딪치고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현성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여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폭우를 예고하는 천둥번개 소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딱딱하게 굳은 아이들의 얼굴과 김 부장과 박 과장이 기둥 뒤편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현성이 자신감있게 벗어던졌던, 둥글게 말려 있는 티셔츠를 서둘러 입었을 때는 덤벨로 장난을 치다가 거울을 깨뜨린 아이들이 이미 헬스장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트레이너

정오쯤이었고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았으며 눈부시도록 맑았다. 이발소 의자에 깊숙이 앉은 현성은 머리를 다듬는 아주머니에게 여러 번 말했다.
조금 더요. 네. 좋아요. 조금 더요.
귓가에서 사각사각하는,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며 현성의 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발소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얼굴은 어둡고 슬퍼 보였으며 까맣고 굵은 머리카락이 목 뒤까지 덥수룩하게 내려와 있었다. 시장 골목 안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현성은 요즘 들어 쉽게 화가 나거나 우울해지곤 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예민하고 감정 변화가 잦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가능한 낙관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방법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어 여자 회원들의 신경질적인 태도에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날 오전, 탈의실에서 달려 나온 여자 회원이 선반에 놓인 운동복의 사이즈가 뒤섞였다고 볼멘소리를 했을 때, 십여 년 넘게 이 일을 해온 현성으로서는 그런 지적이 가당치 않았지만 흔쾌히 그 회원을 위한 특대 사이즈를 찾아주었다. 형광등이 나가 어둡다는 불평에는 곧 형광등을 사러 갈 예정이라고 전하고 벌레가 있다며 달려 나온 회원에게는 차분한 목소리로 바로 약을 치겠다며 안심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중심을 잡아 줄 기다란 막대도 없이 외줄을 타는 기분에 사로잡혔으며 그런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수수 떨어지던 검은 머리카락이 가운과 바닥 위로 쌓여갔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성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산만한 덩치와 대조적인 작고 동글한 두상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함께 친근감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마침내 아주머니가 주춤거리며 목덜미를 스펀지로 문지를 때는 햇살을 가득 머금은 감귤이 입안에서 터지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이발소에서 나와 헬스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뜨거운 가을 햇살의 온기가 살짝 일그러진 양쪽 귀와 어깨, 팔과 손등에 고루 전해졌다. 그 순간 현성은 온갖 변명과 핑계로 소중한 의지를 무너뜨려 온 자신에 대한 회의감만이 부풀어 오르던 날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변화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맑은 정신 상태에서 나른함을 맛본 그는 햇살이 피부에 닿을 때의 짜릿함, 자연 자체에서 전해오는 기운과 자연인으로서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을 그동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지개를 켜자 놀랍게도 미처 알지 못했던, 몸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기찬 에너지가 손끝과 발끝,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짧은 머리카락 끝까지 저릿저릿하게 퍼져나갔다. 변화는 이렇게 갑자기 사소한 계기로 찾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현성이 돌아왔을 때 홀은 조용했다. 여자 회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퇴근 후의 직장인들 몇 명이 오기 전으로 한가한 때였다. 김 부장과 주 사장, 박 과장 세 사람뿐이었다. 김 부장은 건어물가게를 했고 주 사장은 근처에서 과일가게를, 박 과장은 아동복을 팔았다. 현성은 햇살이 창으로 스며드는 홀을 바라보며, 손끝에 전해졌던 저릿함을 떠올리며 회원들에게 인사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던 김 부장이 머리 멋진데, 라는 한 마디를 건넸고 박 과장도 맞장구를 쳤다. 현성은 오디오를 켜 경쾌한 음악이 흐르게 하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돌렸다. 회원들은 영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영화 제작부 스태프가 촬영 장소를 물색 중이라며 주 사장 집의 옥상에 올라가서 사진을 몇 장 찍어 가더니 촬영을 하고 싶다며 가능한 날을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옥상에서 보이는 계단을 찍겠다는 거야. 그 계단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가 주 사장네 옥상밖에 없데.
주 사장 집의 옥상이라면 현성도 잘 알고 있었다. 부인은 죽도록 싫어했지만 주 사장은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시장 어귀에서 헬스장 친목회 식사를 마친 후 주 사장의 성화에 못이겨 그의 집에서 술을 한잔씩 더 했을 때였다. 술에 취해 옥상에서 보는 경치는 근사했다. 골목사이로 난 좁고 가파른 계단을 바라보다가 뒤로 몸을 틀면 큰길 건너편으로 아파트 건축현장이 내려다 보였는데 주황빛 하늘을 배경으로 기다란 팔을 천천히 움직이는 크레인 몇 대가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근데 주 사장은 감독이 직접 사정을 해도 싫다네. 배우 구경이나 좀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김 부장이 주 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주 사장은 한 손에는 커피를, 한 손에는 운동복을 든채 말이 없었다.
사용료를 준다던가?
주 사장은 대꾸가 없었지만, 박 과장은 집에 들어가 몇 시간을 차지할 테니 버티다가 사용료를 준다고 하면 수락하라는 충고를 했다.
그건 정당한 요구가 아닐까?
정당한 요구?
대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 사장이 박 과장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싫다는데, 그래도 돈을 주면 하라는 말인가?
주 사장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현성은 그 소리에 놀랐지만, 의욕이 넘치며 주변을 새로이 인식할 수 있는 그의 활기찬 상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사소한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회원들을 향한 애정이 그의 넓은 가슴 중 한 켠을 차지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현성은 이 세 명의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헬스장에서 신문이나 TV를 보다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운동과 샤워를 끝낸 후 다시 가게로 돌아가는 것이 일과인 이들은 가장 오래된 회원이면서도 많은 사람이 빠져나간 후에도 끝까지 남아준 회원들이었다.



사십 대 중반인 현
성은 이들과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일반적인 관장과 회원 이상의 관계로 집안의 경조사를 챙기며 지냈다. 김 부장은 현성의 외동아들인 태영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 용돈을 챙겨주었고 박 과장은 현성의 아내가 맹장 수술로 입원했을 때 병원에 들러 슬쩍 봉투를 주고 갔다. 무엇보다 이 세명을 비롯한 헬스장의 회원들로부터 현성이 감동받았을 때는 지난여름이었다. 건너편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 피트니스 센터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퍼진 지 얼마 안 되어 여름에 오픈 홍보 전단지가 돌기 시작했을 때, 현성은 육 개월 이상 등록시 할인을 해주는 이벤트를 벌이고 연간 회원을 모집했다. 현성과 회원들은 비슷한 처지였기에 피트니스 센터가 들어선 이후 회원들과의 관계가 오히려 전보다 돈독해진 것 같았다. 전체 회원 중 반 이상이 시장에서 크고 작은 가게를 운영했는데 단지에 생긴 대형마트 때문에 그들 또한 울상이었다. 신규 회원은 극소수였지만 처음부터 기존 회원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현성은 실망감보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현성은 관장이자 트레이너로서 원하는 회원에게는 무료로 개인 트레이닝을 해주었는데 그에게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는 회원들은 대부분 선뜻 연간 회원이 되어 주었다. 이런 상냥함과 따뜻함은 분명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 사장의 커피가 출렁이다가 현성의 양말에 스며들고돈만 주면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가? 라고 윽박질렀을 때는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별 핑계를 다 대고 있네. 자네 집이 재개발 구역에서 빠지니까 심보가 꼬여 그런 거지.
잠자코 있던 박 과장이 종이컵에 가래를 뱉은 후에 중얼거리자 눈을 치켜뜬 주 사장은 박 과장을 향해 용수철처럼 달려 나갈 기세였다. 박 과장과 주 사장의 기질을 잘 알고 있는 현성은 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그가 도달하려는 경지, 조금 더 높은 차원의 목표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헬스장 입구에 나타나면서 자판기 앞의 네 사람은 흩어졌다. 홀로 들어선 두 명 중 한 명은 어렸고 한 명은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였다. 하지만 둘 다 소년티를 벗지 못했다. 반팔을 입은 쪽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삐죽거리며 서 있는 모습이 추워 보였고 벙거지를 쓰고 홑겹의 야상 점퍼를 입은 쪽은 심하게 거들먹거렸다. 그들은 입구에서 ‘찜질방 사우나 완비’라고 크게 써 붙어 있는 걸 봤다며 찜질방을 찾았다. 찜질방은 한겨울에만 운영하고 대신 사우나를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주자 싱겁다는 얼굴로 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늘씬한 여자들의 사진이 실린 달력이었다. 점퍼는 피식거리며 반팔에게 속삭였다. 그들에게서 점잖은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고 헬스장을 둘러보러 왔다기보다 갈 곳이 없어 잠깐 들른 것 같았다.
그래도 현성은 헬스장을 둘러보게 해주었다. 예상대로 그 애들은 회비가 얼마인지 물어보기만하고 그냥 나가버렸다. 하지만 금방 다시 돌아왔다. 점퍼의 벙거지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현성이 탈의실에서 벙거지를 찾아들고 나왔을 때 둘은 기둥 앞에 서 있었다. 기둥 위쪽으로는 남자 보디빌더의 사진이 실린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이거 아저씨예요?
반팔이 물었다. 액자 속 사진에는 삼각팬티를 입고 양팔을 위로 들어 올린 남자가 우람한 팔과 단단한 복근, 말의 허벅지 같은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자의 피부는 검게 빛났다. 종잇장처럼 얇은 피부가 잘게 쪼개진 근육의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도금했거나 방탄을 한 것처럼 단단하여 칼에도 베이지 않을 것 같았다. 현성도 믿을 수 없었지만 빛바랜 사진 속의 남자는 이십여 년 전의 그였다.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반팔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입을 벌렸다.
운동하면 진짜 이렇게 돼요?
사진과 현성을 번갈아 살피는 반팔의 얼굴은 붉은 편이었다. 볼과 턱에는 여드름이 나 있고 눈썹 뼈 아래에는 사선으로 난 상처가 보였는데 아직 아물지 않아 붉은 기가 돌았다. 바로 그 상처옆의 경계심을 띤 눈빛에서 현성은 은밀한 흥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안일한 습관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거나 특정한 물질에 자신의 전부를 조금씩 내어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삶과는 다른,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모험을 즐기는 삶을 연상할 수 있었다. 현성은 몸이 다시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도선수 생활을 접고 보디빌더의 길로 들어서던 시절, 기구의 차가운 쇠가 처음 맨살에 닿을 때를 떠올렸다. 반팔이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현성은 한쪽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고 포즈를 취했다. 현성이 티셔츠를 벗고 몇 가지 포즈를 더 선보이자 점퍼와 반팔의 장난기 위로 다른 표정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제대로 된 길로 인도한 것 같은 뿌듯함 속에서 현성은 자신의 표정에 이전에 없던 따스함이 깃들어 있음을 확신했다. 미지의 앞날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풋내기들에게 자신의 에너지와 노하우를 아무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싶었다. 현성은 중량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덤벨 중 하나를 집어 들고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 대해, 웨이트 트레이닝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피부 아래 근육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어떤 동작이 어느 부위의 근육을 사용하는지 현성은 잘 알고 있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운동법을 체형에 알맞게 지도해줄수 있었다.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선 현성은 덤벨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열여덟 살이었고 유도선수였다. 코치의 권유로 헬스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방황의 시기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해내자 새로운 활력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았다. 온몸의 뼈가 다시 맞춰지고, 질기고 두꺼운 근육들이 뼈를 단단히 감싸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부딪치고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현성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여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폭우를 예고하는 천둥번개소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딱딱하게 굳은 아이들의 얼굴과 김 부장과 박 과장이 기둥 뒤편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현성이 자신감 있게 벗어던졌던, 둥글게 말려 있는 티셔츠를 서둘러 입었을 때는 덤벨로 장난을 치다가 거울을 깨뜨린 아이들이 이미 헬스장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기둥 뒤편에 걸린 달력은 찢겨있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거울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금이 가 있었다. 현성은 창문을 모두 닫기 시작했다. 그의 예감대로 비가 오고 있었다. 답답하게 창문을 왜 닫느냐며 김 부장이 말을 건네 왔지만 현성은 아무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창문을 하나하나 닫으며 현성은 시범을 보이는 동안 탱크톱을 입은 여성 보디빌더의 사진 앞에서 반팔과 점퍼가 행했을 음흉한 상상을 떠올리고, 그들의 앞날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사실과 자신이 보디빌더로 전향하면서 품었던 열등감과 패배감의 찌꺼기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탄력을 잃은 자신의 상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에게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덤벨의 얽힌 자국과 손잡이 부분의 견고한 홈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실망감을 상쇄할 만한 전화 한 통을 받기 전까지 그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기운을 잃어갔다.

금액을 맞춰 주겠다고 했어. 지금 그쪽으로 갈 수 있다던데 자넨 어떤가?
현성이 믿고 따르는 선배가 송 실장의 방문을 알리는 전화였다. 현성이 들은 바로 송 실장은 뒤늦게 이 업계에 뛰어들었지만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한창 물이 오르고 있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매물 하나하나에 돈을 아끼지 않는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되도록 많은 매물을 확보하는 중이니 기분만 잘 맞춰주면 계약을 하는데 문제없을 거라고, 지금 이런 사람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했다. 현성이 제안한 금액은 그가 들인 비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금액이 현성이 원하는 전부였다. 현성은 결혼 다음 해에 아내와 함께 헬스장을 시작하여 홀을 늘리고 러닝머신과 기구들을 사들였으며 찜질방과 습식 옥 사우나도 마련했다. 바닥재를 고르고 탈의실과 카운터를 꾸미고 안내사항과 주의사항을 작성해서 걸어두는 일까지 함께했지만 현재는 남은 것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의 적자, 적자, 그리고 적자 후에 빚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헬스장을 처분해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내놓은 지 오래였지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어 부동산에서는 시기를 놓쳤으니 매매가를 더 낮춰야 한다고 했다.

송 실장은 유 사장이라는 사람과 함께 왔다. 유 사장이라는 여자는 사십 대 후반 혹은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성의 머리에서 금방 사라졌다. 현성은 헬스장 구석구석을 제대로 보여주고 근처 한정식집이나 카페로 데려갈 계획이었으나 과연 그들은 전문가답게 스캔하듯 짧은 시간 안에 홀을 둘러보고 간단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생각보다 좋은데요.
그들은 현관 밖으로 나와 세탁장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여기를 살릴 거예요. 뭐가 되든 말이죠.
유 사장은 현성이 건넨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업 직전의 가게를 싸게 넘겨받아 권리금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성도 들은 바가 있었다. 송 실장이 뜻밖에 상권이 어떠니, 재개발이 어떠니 하는 얘기를 꺼냈지만 이런 말들은 계약에 앞선 사전 점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선배로부터 들은 금액 그대로 계약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유 사장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현성은 헬스장이 술집이나 식당 혹은 피시방으로 둔갑하는상상을 했다.
송 실장과 유 사장은 다음 일정 때문에 무척 서둘렀다.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이런, 인주가 떨어졌네요. 인주라면 카운터 아래 작은 서랍 안에 있었다. 인주를 가지러 홀로 뛸 듯이 들어가던 현성은 잠깐 멈춰 진심 어린 반성을 했다. 아파트 단지가 완공되면서 최신식 피트니스 센터가 하나 더 생겼을 때를 떠올렸다. 두 개의 피트니스 센터가 경쟁하듯 다양한 할인 행사를 벌이며 회비를 낮추자 환불을 요구하는 회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믿고 의지했던 회원들마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빠져나갔다. 당장 돈 몇 푼에 우왕좌왕하는 꼴이라니. 현성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 쫓겨날 사람들이 어차피 몇 년이 지나면 비슷해질 새 피트니스 센터로 옮겨가는 어리석음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오의 가을 햇살을 맞은 이후로 뜻밖의 행운을 맞이하면서 인생의 희비를 몸소 체험하게 된 현성은 남을 미워하고 모함한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머리에 닿던 햇살, 그 햇살의 공평함을 난생처음 의식한 그는 홀에 들어서면서 닫힌 창 너머의 구름 사이로 해가 다시 나타나는 눈부신 광경, 먹구름과 황금빛 태양의 오묘한 조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박 과장이 소리치기 전까지 엉겨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관장! 자네가 얘길 좀 해봐!
현성은 러닝머신 옆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주 사장과 박 과장을 떼어 놓다가 갈비뼈 부근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관장, 오늘 주 사장 사모가 여길 왔었잖아. 난 집사람한테 들은 얘길 한 것뿐이라구.
박 과장이 억울한 듯 말했고 뒤늦게 탈의실에서 나온 김 부장이 주 사장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자네가 말을 좀 해봐.
박 과장이 재차 물었다.
집사람이 오늘 여길 왔었나? 그럴 리가 없어.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