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 기획하며｜2016 우리 문화의 아젠다 혹은 쟁점들 ①국가라는 신체, 애국이라는 증상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③미술계의 위작·대작 사건 톺아보기 ④기계적 친절이 싫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첫 번째｜내설악 겨울나기 두 번째｜대한민국에서 경차 타기 세 번째｜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넘어 네 번째｜이렇게 길을 달리다 보면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한국문학의 푸른빛을 보다 소설 부문｜분단문학을 넘어선 연대기적 가족서사 시 부문｜주체 없는 어떤 영원성 평론 부문｜흔들릴수록 더욱 뚜렷이 보이는 희망의 불빛 번역 부문｜유려하고 성취도 높은 스페인어 문장의 진경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레테는 마르지 않는다
김별아 ㅣ 소설가. 1969년생
소설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채홍』 『가미가제 독고다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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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상속 지분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김준행이 언제 죽어야 하는지가 타협되고 결정되고 유예되고 있는 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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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테는 마르지 않는다 |
P신문의 부고(訃告)는 보통 경제면과 사회면 사이의 ‘인물’란 A14나 A23에 실렸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와 보궐선거를 포함한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두 번의 지방선거까지 치른 후 그는 집에 배달시키던 일간지 두 개와 지하철역에서 가끔 사보던 경제지와 스포츠신문을 모두 끊었다. 고속열차를 타고 주소지인 고향까지 달려가서 투표를 했건만 그가 찍은 후보는 단 한 번도 당선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홧김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실도피라는 비난을 듣든 말든 괴로운 뉴스를 최대한 피하는 것뿐이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사서 고생하며 찾아서 고통을 느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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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신문 대신 인터넷 뉴스나 가끔 보고, 그마저도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선별된 기사만 대충 훑어보던 그가 요사이 구립도서관에 꼬박꼬박 들러 신문 거치대를 찾는 것은 부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발행부수가 많다는 P신문부터 살펴보았고, 혹시나 하여 메이저 신문 대열에 낀다는 T신문과 S신문, 그리고 정치적 논조가 다른 R신문과 K신문까지 들춰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정도의 인물이면 나름 명사라 할 만한데 고작 부고 몇 줄로 처리될 리 없다는 데 생각이 미처, 곧바로 3층의 전자정보실로 뛰어올라가 컴퓨터를 예약하고 최근 1달 내 보도된 유명인들의 사망 기사를 검색했다. 하지만 김준행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휴대폰 메신저가 지르르 울었다. 예상대로, 지민이었다.
- 어디?
- 도서관
- 소식 있어?
- 아직
- 그럼
어떡하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는 대답으로 보낼 이모티콘을 뒤적거렸다. 좌절해 주저앉은 고양이, 땀을 뻘뻘 흘리는 개, 펑펑 우는 오리를 들여다보다가, 지난 번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ㅠㅠ)을 보냈다가 진지하지 않고 경박스러운 반응이 실망스럽다며 한참을 냉전 상태로 보냈던 기억이 났다.)
- ...
경박한 것보다는 우유부단한 게 낫다 싶어 점 세 개만 찍어 보냈더니 지민은 그대로 ‘읽씹’을 했다. 다시 대화를 이어가 볼까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해야 할 말이 있었고 하고 싶은 말도 있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필요한 돈은 일이 끝나야 받을 수 있다. 일이 끝나려면…… 신문의 부고란에서 그 이름을 발견해야 한다.
도서관에 온 김에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구내식당에 갔다. 매번 신중하게 살펴보고 머릿속으로 맛의 배합까지 그려보지만 먹고 돌아서는 즉시 잊어버리는 ‘오늘의 메뉴’ 3천5백 원짜리 백반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폰게임을 했다. 목표도 의미도 없이 퍼즐을 맞추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조차 애를 써야 겨우 가능했다.
밥을 먹고 나와 도서관 뒤편으로 돌아들어가 한구석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공원 쪽으로면한 도서관 앞은 금연 구역이라 도서관에서 온종일 죽치는 실업자, 취준생, 공시생, 고시생 흡연자들은 후미진 그곳에서야 겨우 한 모금을 빨 수 있었다. 그조차 어린이도서관을 이용하는 학부모들에게 민원이 들어와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구차한 공간이었다. 올해 초 값이 두 배로 인상되면서 하루에 반 갑으로 줄였지만 그곳까지 금연 구역으로 정해지면 기어코 담배를 끊으리라, 시름없이 다짐했다.
마약 혐의를 받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며 자신을 변호한 프랑수아즈 사강이 멋있어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녀는 늙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젊다고도 할 수 없는 50대의 나이까지 끝내 반성하지 않는 인간, 반항하는 인간이었다. 내 눈에 멋있어 보이는 게 남의 눈에도 멋있게 보이지 않을 리 없어서 그 말을 제목으로 삼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그때는 건설하든 파괴하든 자기가 자기 삶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지금은 파괴할 궁리 따윈 언감생심 하지도 않고 그저 버티기만 하려는 데도 맥없이 파괴당한다. 야만과 잔혹의 세계에서 권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남은 건 어떻게든덜 파괴당하도록 스스로를 지킬 의무뿐이다. 어쨌거나 그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쓴 소설가도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그는 까닭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둘을 동시에 아는 사람들은 지민이 남자 같고 그가 여자 같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질이 생물학적인 성(性)을 바꾸어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 지민의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 위해 골몰할 필요는 없을 테다. ‘여자답지’ 않게 담담하고 선선한 지민은 그저 알바 중에 틈을 내 상황을 확인한 것이고, 상황이 확인되자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간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점 세 개에 대한 ‘읽씹’이 무책임에 대한 비난인지, 무능에 대한 비웃음인지, 그 둘 다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다 결국 아점으로 먹은 백반이 체하고 만 그는 정녕 ‘남자답지’ 못하게 옹졸하고 소심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여자가 되고 지민이 남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수 없기에 그들은 지난 보름 동안 애를 끓이며 마음을 부대꼈다. 지민이 보낸 초음파 사진 속에 손가락 한 마디만한 둥근 점은 ‘생물적 성 정체성’의 막강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 이게
아기집이래.
- 뭐?
- 아기집
그리고 난황
- 난황?
- 그래
달걀의 노른자위
같은 거
- 그럼...?
- 점심시간에
병원 갔었어
그때 그는 대답으로 문제의 ‘눈물을 흘리는(ㅠㅠ)’ 이모티콘을 보냈다가 치도곤을 당했다. 뒤처리를 하며 ‘모자’를 벗을 때 평소와 달리 남아있는 분량이 너무 적어서 뭔가 이상스럽다는 걸느끼긴 했다. 하지만 지민이나 그나 병원에 가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야 한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그는 단기 알바로 대형마트의 창고에서 야간작업을 마친 후였고 지민은 친구의 땜빵으로 PC방에서 밤샘 알바를 한 뒤였다.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섹스는 완전한 숙면을 위한 안전한 수면제에 다름 아니었다. 삶의 조건이 금욕을 강요하면 이 욕망에서 저 욕망까지 건너가는 데는 그처럼 옹색한 징검다리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발을 헛디뎌 빠져버렸다. 그자체로 위험한 삶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유유, 눈물이라도 펑펑 흘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왕이면 다리까지 쭉 뻗고 버둥질하며 울고 싶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엄연한 어른이었는데, 그 일로 생긴 결과 앞에서는 여전히 아이일 뿐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해결하겠노라고 아직 거세되지 않은 수성의 영혼까지 그러모아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잠시 움찔, 해결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손톱을 짓씹으며 고민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