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 기획하며｜2016 우리 문화의 아젠다 혹은 쟁점들 ①국가라는 신체, 애국이라는 증상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③미술계의 위작·대작 사건 톺아보기 ④기계적 친절이 싫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첫 번째｜내설악 겨울나기 두 번째｜대한민국에서 경차 타기 세 번째｜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넘어 네 번째｜이렇게 길을 달리다 보면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한국문학의 푸른빛을 보다 소설 부문｜분단문학을 넘어선 연대기적 가족서사 시 부문｜주체 없는 어떤 영원성 평론 부문｜흔들릴수록 더욱 뚜렷이 보이는 희망의 불빛 번역 부문｜유려하고 성취도 높은 스페인어 문장의 진경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기억하면 정릉 집이 떠오른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동 화 같은 플래시백으로 남아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가 가장 젊 었던 시절,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우리 가족은 두 개의 방과 흙 마당이 있 는 기와집을 우리 집으로 갖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 내 고향 정 릉은 넝쿨 장미가 환하게 담벼락을 장식하고 골목골목마다 아이 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던 동네였다. 그곳에서 나와 동생은 온종일 뛰어놀았다. 놀다보면 석양녘이 되고 운이 좋으면 아버지를 태우 고 마을로 들어오는 신문사 지프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빠다!”
지프차가 마을 어귀 돌다리를 건너오면 우리는 소리 지르며 차를 따라 달려갔다. 차는 빠르게 우리 눈앞에서 멀어져갔고 이내 집 앞에 도착해 아버지를 내려놓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아버지는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기골이 장대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마가 훤하고 적은 머리칼조차 하얗게 변해가는 아버지는 친구들의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아버지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일제히 ‘아빠’를 외치며 달려갔다. 아버지가 흐뭇한 표 정으로 걸음을 멈추면 아귀 같은 자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늘 똑같았다.
“아빠, 뭐 사왔어?”
아버지의 손에 호떡이라도 들려있으면 우리는 환호했지만 빈손인 경우에는 툴툴대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철부지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집으로 돌아오면 부엌에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쌀과 연탄에 대해 얘기했고, 학교에서 상장 하나 받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탄했다. 소설가 아버지도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버지는 일상 속에 서 자신은 절대 전업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저녁 풍경이었지만 이런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통음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신념으로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유신이 공포되고 70년대가 중반을 넘어 가는 동안 한번 술잔을 잡으면 끝을 보고 마는 아버지의 주벽은 날로 심각해졌다.
통금이 있던 시절, 누군가 취객을 떠메고 와 집 앞에 내려놓으면 아버지는 혀 풀린 소리로 온 동네 에 당신의 귀가를 알렸다.
“에헤…… 히히익…… 헤에라…… 네가 뭔데……”
대문에서 집안까지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아버지가 갈지자걸음으로 삼십 분 걸려 도착하는 동 안 곤히 잠들었던 동네 개들은 모두 깨어나 화답해주었다. 퀄퀄퀄 캥캥 왁왁 이이잉 퀄……
“얘들아, 나다 나야……”
그런 밤이면 나는 그냥 누워있었다. 일어나면 노래를 부르거나 아버지의 주정을 받아야했으니 자는 체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며, 다른 아버지들처럼 성실하지 못한 나의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저히 고독한 상태였다.
겉만 강했던, 내면은 유약했던 아버지는
그것을 견뎌낼 내공이 부족했다. 세상이 주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아버지는 한없이 쓸쓸했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을까.
조용한 동네의 밤을 망쳐놓고 난 다음 날이면, 어머니는 동네 창피해 못살겠다며 아버지를 질책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풀 죽은 얼굴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거듭 미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술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정 도의 통음이 아니었다. 빈도와 주량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었다.
그 즈음 집안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 ‘네 엄마 잔소리’라고 못 박았던 말들이었다. 애들도 어린데 술 좀 그만 마셔라, 당신은 눈치도 없느냐, 사람들이 뭐랄지 뻔한데 왜 그러느냐는등 의 말이었다. 조숙한 척 했지만 실은 덜 떨어진 아이였던 나는 이해가 가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네 엄마 잔소리’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 혼자 집을 지키던 무료한 휴일 이었다. 낯선 사람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 속의 남자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거, 거어 말이 야, 글이 말이야, 왜 그 따위로 쓰냐고 전해. 내가 옛날에는 좋아했었다는 말도 전하고…… 그 후에 도 그런 식의 전화는 몇 번 더 왔다. 심지어는 대학생들이 아버지 모형물을 만들어놓고 화형식을 했 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냥 너털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열심히 읽어주니 고맙다. 그 사람들 덕에 오래 살겠구나.”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통이 크고 사사로운 일에 초연한 진짜 사나이였다.
어느 설날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세배를 하고 돌아간 오후, 머리가 헝클어지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어른이 집에 찾아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남자가 집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잠들어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열고 형님 형님, 하며 불렀지만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곤히 주무시는 모양이라며 손님은 민망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 좋아하는 아버지가 집에 온 손님을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이었다.
“나도 더는 상대하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의 손님은 한 때 동지였지만 아버지와 노선이 달라지면서 멀어졌고 그가 속한 단체 에서 아버지를 호되게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아마 그는 화해의 인사를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념보다 의리가 먼저였던 아버지는 충격과 허탈감 으로 만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쓰는 글마다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있을 때 직설어법으 로 전쟁과 반공을 줄기차게 얘기했다. 찬사도 받았지만 비난과 협박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무슨 일 인지 중앙정보부에 소환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저히 고독한 상태 였다. 겉만 강했던, 내면은 유약했던 아버지는 그것을 견뎌낼 내공이 부족했다. 세상이 주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아버지는 한없이 쓸쓸했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술주정이 싫었던 열 살 소녀는 이른 새벽 불 켜진 서재를 본 일이 있다. 아버지는 돋보기 를 쓴 채 글을 쓰고 있었다. 남들처럼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는 밤새워 소설을 썼다. 주변의 바스락거림에도 아무 동요 없이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골방 같았던 서재에서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원고지 넘기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려왔다. 어린 나도 그 모습은 경건하게 느껴졌다. 아, 우리 아빠는 술만 먹는 사람이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평생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추억과 사연 많은 정릉집에서 많은 일을 했다. 욕도 술도 많 이 먹었지만 글도 왕성하게 썼던 황금시대였다. 집안 뜰에 햇살이 가득했듯 내 삶에서도 가장 따뜻 했던 시절이었다. 나의 유년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가족은 정릉을 떠났다. 그리고 십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욕 먹고 화형식을 당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은 아버지에겐 들어맞지 않은 셈이다. 가슴 한구석에 감춰놓 았던 전업 작가의 꿈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떠나신지 30년, 아버지와 산 시간보다 아버지 없이 산 시간이 더 길어졌다. 무정한 자식은 아버지를 많이 잊어간다. 하지만 열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이른 새벽 원고지와 마주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이상적인 아버지의 초상으로 남아있다.
불꽃같은, 그러나 쓸쓸했던
글 선우숙임 ㅣ 선우휘의 셋째 딸, 소설가. 1964년생
소설 『눈』 『차남』 『당신의 저녁』 등
선우휘 ㅣ 소설가. 1922~1986년
소설 「테러리스트」 「오리와 계급장」 「깃발 없는 기수」 「십자가 없는 골고다」 『불꽃』 『반역』 『아아 산하여』 『사도행전』 『노다지』 등
불꽃같은, 그러나 쓸쓸했던 - 나의 아버지 선우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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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이사 끝에 우리 가족은 두 개의 방과 흙 마당이 있 는 기와집을 우리 집으로 갖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 내 고향 정 릉은 넝쿨 장미가 환하게 담벼락을 장식하고 골목골목마다 아이 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던 동네였다. 그곳에서 나와 동생은 온종일 뛰어놀았다. 놀다보면 석양녘이 되고 운이 좋으면 아버지를 태우 고 마을로 들어오는 신문사 지프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빠다!”
지프차가 마을 어귀 돌다리를 건너오면 우리는 소리 지르며 차를 따라 달려갔다. 차는 빠르게 우리 눈앞에서 멀어져갔고 이내 집 앞에 도착해 아버지를 내려놓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아버지는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기골이 장대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마가 훤하고 적은 머리칼조차 하얗게 변해가는 아버지는 친구들의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아버지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일제히 ‘아빠’를 외치며 달려갔다. 아버지가 흐뭇한 표 정으로 걸음을 멈추면 아귀 같은 자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늘 똑같았다.
“아빠, 뭐 사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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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에 호떡이라도 들려있으면 우리는 환호했지만 빈손인 경우에는 툴툴대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철부지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집으로 돌아오면 부엌에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쌀과 연탄에 대해 얘기했고, 학교에서 상장 하나 받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탄했다. 소설가 아버지도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버지는 일상 속에 서 자신은 절대 전업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저녁 풍경이었지만 이런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통음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신념으로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유신이 공포되고 70년대가 중반을 넘어 가는 동안 한번 술잔을 잡으면 끝을 보고 마는 아버지의 주벽은 날로 심각해졌다.
통금이 있던 시절, 누군가 취객을 떠메고 와 집 앞에 내려놓으면 아버지는 혀 풀린 소리로 온 동네 에 당신의 귀가를 알렸다.
“에헤…… 히히익…… 헤에라…… 네가 뭔데……”
대문에서 집안까지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아버지가 갈지자걸음으로 삼십 분 걸려 도착하는 동 안 곤히 잠들었던 동네 개들은 모두 깨어나 화답해주었다. 퀄퀄퀄 캥캥 왁왁 이이잉 퀄……
“얘들아, 나다 나야……”
그런 밤이면 나는 그냥 누워있었다. 일어나면 노래를 부르거나 아버지의 주정을 받아야했으니 자는 체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며, 다른 아버지들처럼 성실하지 못한 나의 아버지를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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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저히 고독한 상태였다.
겉만 강했던, 내면은 유약했던 아버지는
그것을 견뎌낼 내공이 부족했다. 세상이 주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아버지는 한없이 쓸쓸했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을까.
조용한 동네의 밤을 망쳐놓고 난 다음 날이면, 어머니는 동네 창피해 못살겠다며 아버지를 질책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풀 죽은 얼굴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거듭 미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술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정 도의 통음이 아니었다. 빈도와 주량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었다.
그 즈음 집안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 ‘네 엄마 잔소리’라고 못 박았던 말들이었다. 애들도 어린데 술 좀 그만 마셔라, 당신은 눈치도 없느냐, 사람들이 뭐랄지 뻔한데 왜 그러느냐는등 의 말이었다. 조숙한 척 했지만 실은 덜 떨어진 아이였던 나는 이해가 가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네 엄마 잔소리’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 혼자 집을 지키던 무료한 휴일 이었다. 낯선 사람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 속의 남자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거, 거어 말이 야, 글이 말이야, 왜 그 따위로 쓰냐고 전해. 내가 옛날에는 좋아했었다는 말도 전하고…… 그 후에 도 그런 식의 전화는 몇 번 더 왔다. 심지어는 대학생들이 아버지 모형물을 만들어놓고 화형식을 했 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냥 너털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열심히 읽어주니 고맙다. 그 사람들 덕에 오래 살겠구나.”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통이 크고 사사로운 일에 초연한 진짜 사나이였다.
어느 설날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세배를 하고 돌아간 오후, 머리가 헝클어지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어른이 집에 찾아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남자가 집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잠들어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열고 형님 형님, 하며 불렀지만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곤히 주무시는 모양이라며 손님은 민망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 좋아하는 아버지가 집에 온 손님을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이었다.
“나도 더는 상대하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의 손님은 한 때 동지였지만 아버지와 노선이 달라지면서 멀어졌고 그가 속한 단체 에서 아버지를 호되게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아마 그는 화해의 인사를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념보다 의리가 먼저였던 아버지는 충격과 허탈감 으로 만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쓰는 글마다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있을 때 직설어법으 로 전쟁과 반공을 줄기차게 얘기했다. 찬사도 받았지만 비난과 협박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무슨 일 인지 중앙정보부에 소환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저히 고독한 상태 였다. 겉만 강했던, 내면은 유약했던 아버지는 그것을 견뎌낼 내공이 부족했다. 세상이 주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아버지는 한없이 쓸쓸했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술주정이 싫었던 열 살 소녀는 이른 새벽 불 켜진 서재를 본 일이 있다. 아버지는 돋보기 를 쓴 채 글을 쓰고 있었다. 남들처럼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는 밤새워 소설을 썼다. 주변의 바스락거림에도 아무 동요 없이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골방 같았던 서재에서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원고지 넘기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려왔다. 어린 나도 그 모습은 경건하게 느껴졌다. 아, 우리 아빠는 술만 먹는 사람이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평생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추억과 사연 많은 정릉집에서 많은 일을 했다. 욕도 술도 많 이 먹었지만 글도 왕성하게 썼던 황금시대였다. 집안 뜰에 햇살이 가득했듯 내 삶에서도 가장 따뜻 했던 시절이었다. 나의 유년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가족은 정릉을 떠났다. 그리고 십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욕 먹고 화형식을 당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은 아버지에겐 들어맞지 않은 셈이다. 가슴 한구석에 감춰놓 았던 전업 작가의 꿈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떠나신지 30년, 아버지와 산 시간보다 아버지 없이 산 시간이 더 길어졌다. 무정한 자식은 아버지를 많이 잊어간다. 하지만 열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이른 새벽 원고지와 마주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이상적인 아버지의 초상으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