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0년 - 포스트코로나 시대 읽기 ①환란일지 ②2030년 서울, 그리고 레이턴시 ③바이러스와 함께 돌아보기 ④마스크에 관한 학교괴담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 일본에서 그린 특이한 형식의 그림
①완성의 속도 ②코로나 여름, ‘국뽕 아재’의 기원 ③적막과 고요와 침묵
아무일 일어나지 않는 40호 남짓 시골마을, 그 사람들과 정서
①일상과 일상 너머를 아우르는 탄력있는 상상력 ②포스트코로나 시대 한국문학의 흐름과 성취는?
“일본 동북사투리가 너무 어려웠어요. 게다가 한국역사도…”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대산세계문학총서
2020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제28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자 선정 김소월 등단 100주년 기념 시그림전 -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
우리문학의 순간들
소설가 상허 씨의 일일1)
소설가 상허 씨는 지루한 장마 끝에 모처럼 외출을 꾀한다. 성북동 집을 빠져나온 뒤 큰길까지 걸어 내려와 총독부행 버스를 탔고 이어 안국동에서 전차로 갈아탄다. 안국정이지만 아직 안국동이래야 말이 되는 것 같다, 고 생각한다.
사실 상허 씨는 동이나 리를 깡그리 ‘정화(町化)’시킨 데에는 불만이 무척 많았다. 비즈니스의 능률만 본위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릇된 나치스의 수입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제 사는 성북동을 성북정이라 불러보면? 소름이 끼쳤다. ‘이 주사’하고 불러야 할 어른을 ‘리상’ 하고 남실거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몇 해 후에는 이가니 김가니 박가니 정가니 무슨 가니가 모두 어수선스럽다고 시민의 성명까지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통제할는지도 모른다.’
미리 밝히지만, 이 불길한 예상은 머잖아 현실이 된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의 시작이다. 그러나 소설 「장마」를 쓸 당시인 1936년의 상허는 그저 툴툴거릴 뿐, 아직 그런 날이 진짜 오리라곤 저도 믿고 있지는 않았다.v 상허 씨는 조선중앙일보 앞에서 내렸다. 일 년이나 근무하던 데라 일이 없어도 종종 들러본다. 그래봐야 “재미 좋으십니까?” 소리밖에는 주고받을 게 없다. 편집실 안 풍경이 눈에 훤하다. 여수 박팔양 같은 이가 사회부장 자리에서 강도나 강간 기사 제목에 눈살만 찌푸리고 앉아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극이다. 그는 세속을 떠난 신선미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동아일보에서는 빙허 현진건이 그 자리에서 오래 썩고 있다. 수주 변영로는 부인잡지에서 세월을 보낸다. 상허 씨는 다들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장 자리에 있다면 저마다 어울리는 자리로 재배치를 해줄 것인데……
“왜 벌써 가시렵니까?”
“네.”
“거 소설 좀 몇 회치씩 밀리게 해주십시오.”
“네.”
대답만은 시원하게 하고 출판부로 내려간다. 거기서 ‘바다’라는 제목으로 수필 하나를 청탁받았다. ‘바다!’ 멀리 쳐다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북한산이다. 들리는 건 처맛물 떨어지는 소리와 공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다.
잠깐 없는 바다를 꿈꾸다 바로 낙랑 파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호텔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초입에 양옥으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입구에서는 남양에서 이식해 온 듯한 파초가 손님을 맞이한다.2) 실내에 들어서면 대팻밥과 흰모래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예술가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데생 작품도 몇 개 적당히 걸려 있다. 영화 <파리의 지붕 밑>에 나오는 세트 속 한 조각 같기도 하다. 이상은 “이것으로 낙랑은 이 도시의 배가본드들의 교실이 되었습니다” 운운의 낙서를 벽에 써 놓았다. 그 ‘배가본드들’은 당연히 그와 정신없이 어울려 다니는 화가 구본웅과 소설가 구보 박태원을 포함한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즐겨 찾는 다방답게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도 모던하고 이국적이다. 과연 서울에서 문인과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끽다점답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허 씨가 찾은 날에는 웬일인지 누구 하나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심부름하는 애를 시켜 주인을 불러오게 했다. 소설에는 주인의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화가 이순석으로, 상허 씨하고는 도쿄 시절의 친구였다. 이층에 아틀리에를 두었다. 낙랑 파라는 그가 자본금을 한 2천 원 투자하여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그때 북촌도 아니고 손님들이 오겠느냐고 말들이 많았는데, 전차의 소음을 피하여 자리 잡은 것이 오히려 크게 인기를 끌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빅타레코드의 신곡 발표회가 열린다. 일본인촌과 가
까워 일본인들도 제법 찾았다.
소설에서 주인은 언젠가 상허 씨에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떤 미인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했더니 부인은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만두라고 했더니, 영원히 순결한 정신적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이냐며 징징거렸다. 얼마 후 보니 얼굴이 몹시 상했고 한쪽 손 무명지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상허 씨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쉽게 대답했다.
“생인손을 앓아 잘라버렸네.”
상허 씨는 감격했다. 감격성 많고 선량한 그가 그 연애사건으로 단지(斷指) 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은 이층에 없었다. 구보도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밖으로 나와 구질구질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문득 고향 친구들이 떠오른다. 용기, 흥봉이, 학순이, 봉성이…… 참, 지난봄 학순이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지. 어느 잡지책에선가 상허 씨가 쓴「달밤」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자기가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줄 알면서 어찌 한 권 보내주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제목을 『추월색』이니 『강상명월』처럼 운치 있게 짓지도 못했노라 핀잔도 보탰다. 상허 씨는「달밤」을 『추월색』이나 『강상명월』 따위에 비기는 친구에게 보내 줄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발길은 서점을 찾는다. 일한서방으로 가니 누가 알은체를 하고 다가선다. 상허 씨는 중학교 때 친구로 그의 성이 강이라는 것을 겨우 기억해 낸다. 그가 상허 씨를 본정그릴로 데리고 가는데, 레인코트를 벗고 보니 양복저고리 깃에는 일장기 배지를 척 꽂았다.
상허 씨는 그날 오후 황해도 어디에서 간사지 사업을 한다는 그 ‘옛 친구’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못 먹는 맥주를 두어 컵이나 먹은 상허 씨는 등허리가 후끈거린다. 강은 사업을 위해 ‘본부’를 들락거린다고 했다. 본부가 어디냐고 하니까 “허, 이 사람! 서울 헛 있네그려. 본불 몰라? 총독부를?” 한다. 이야기 끝에 다시 정색을 하고선 상허 씨가 여학교에 관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갑자기 중신을 서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것저것 두루 다 가당치도 않았다.
아내 생각이 났다. 어제 아이가 볕도 안 나는 장마에 자꾸 옷을 버려놓는 문제로 말다툼을 했는데, 아침에도 볼이 부어 있었다. 상허 씨는 강과 헤어지는 길로 중국집 천증원에 들러서 돼지족을 제일 큰 것으로 하나 샀다. 그리고 한성도서로 가 단편집 『달밤』(1933)을 한 권 사서 학순이에게 부쳤다.
쳐다보니, 성북동 쪽 산들은 그저 뽀얀 이슬비 속에 잠겨 있었다.
집에 온 상허 씨는 곧「바다」를 썼을 것이다.3) 거기서 정지용 형이 언젠가 한 말을 인용했다. 바다는 ‘바다’라야 진짜 바다답다는 말이었다. ‘우미(うみ)’니 ‘씨(sea)’니 해서는 넓디넓은 바다 전체보다 기껏 그 위에 든 섬 하나 배 하나쯤을 가리키는 느낌이 든다나?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원고지 첫 줄에 ‘바다’ 이렇게 써 놓으니, 그의 말마따나 넓은 바다뿐만 아니라 바다를 덮은 하늘까지도 풍성하게 펼쳐지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을 끝까지 살려 마무리를 지을 때는 멋도 좀 부렸다.
- 바다는 영원히 희랍(希臘)으로 즐겁다.
소설가 상허 씨는 이렇게 써 놓고 스스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는 아내가 삶는 돼지족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1) 상허(尙虛)는 소설가 이태준(1904~?)의 호. 이 글은 이태준의 단편소설 「장마」(『조광』, 1936.10)를 기본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오윤정,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호, 2017.7.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3) 이 부분은 수필 「바다」 참고. 「바다」 는 실제로는 8월에 쓴 것으로 나온다. 수필집 『무서록』 수록.
소설가 상허 씨의 일일
김남일
소설가, 1957년생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산문집 『책』 『수원을 걷는 것은 화성을 걷는 것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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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상허 씨는 지루한 장마 끝에 모처럼 외출을 꾀한다. 성북동 집을 빠져나온 뒤 큰길까지 걸어 내려와 총독부행 버스를 탔고 이어 안국동에서 전차로 갈아탄다. 안국정이지만 아직 안국동이래야 말이 되는 것 같다, 고 생각한다.
사실 상허 씨는 동이나 리를 깡그리 ‘정화(町化)’시킨 데에는 불만이 무척 많았다. 비즈니스의 능률만 본위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릇된 나치스의 수입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제 사는 성북동을 성북정이라 불러보면? 소름이 끼쳤다. ‘이 주사’하고 불러야 할 어른을 ‘리상’ 하고 남실거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몇 해 후에는 이가니 김가니 박가니 정가니 무슨 가니가 모두 어수선스럽다고 시민의 성명까지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통제할는지도 모른다.’
미리 밝히지만, 이 불길한 예상은 머잖아 현실이 된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의 시작이다. 그러나 소설 「장마」를 쓸 당시인 1936년의 상허는 그저 툴툴거릴 뿐, 아직 그런 날이 진짜 오리라곤 저도 믿고 있지는 않았다.v 상허 씨는 조선중앙일보 앞에서 내렸다. 일 년이나 근무하던 데라 일이 없어도 종종 들러본다. 그래봐야 “재미 좋으십니까?” 소리밖에는 주고받을 게 없다. 편집실 안 풍경이 눈에 훤하다. 여수 박팔양 같은 이가 사회부장 자리에서 강도나 강간 기사 제목에 눈살만 찌푸리고 앉아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극이다. 그는 세속을 떠난 신선미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동아일보에서는 빙허 현진건이 그 자리에서 오래 썩고 있다. 수주 변영로는 부인잡지에서 세월을 보낸다. 상허 씨는 다들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장 자리에 있다면 저마다 어울리는 자리로 재배치를 해줄 것인데……
“왜 벌써 가시렵니까?”
“네.”
“거 소설 좀 몇 회치씩 밀리게 해주십시오.”
“네.”
대답만은 시원하게 하고 출판부로 내려간다. 거기서 ‘바다’라는 제목으로 수필 하나를 청탁받았다. ‘바다!’ 멀리 쳐다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북한산이다. 들리는 건 처맛물 떨어지는 소리와 공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다.
잠깐 없는 바다를 꿈꾸다 바로 낙랑 파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호텔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초입에 양옥으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입구에서는 남양에서 이식해 온 듯한 파초가 손님을 맞이한다.2) 실내에 들어서면 대팻밥과 흰모래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예술가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데생 작품도 몇 개 적당히 걸려 있다. 영화 <파리의 지붕 밑>에 나오는 세트 속 한 조각 같기도 하다. 이상은 “이것으로 낙랑은 이 도시의 배가본드들의 교실이 되었습니다” 운운의 낙서를 벽에 써 놓았다. 그 ‘배가본드들’은 당연히 그와 정신없이 어울려 다니는 화가 구본웅과 소설가 구보 박태원을 포함한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즐겨 찾는 다방답게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도 모던하고 이국적이다. 과연 서울에서 문인과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끽다점답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허 씨가 찾은 날에는 웬일인지 누구 하나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심부름하는 애를 시켜 주인을 불러오게 했다. 소설에는 주인의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화가 이순석으로, 상허 씨하고는 도쿄 시절의 친구였다. 이층에 아틀리에를 두었다. 낙랑 파라는 그가 자본금을 한 2천 원 투자하여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그때 북촌도 아니고 손님들이 오겠느냐고 말들이 많았는데, 전차의 소음을 피하여 자리 잡은 것이 오히려 크게 인기를 끌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빅타레코드의 신곡 발표회가 열린다. 일본인촌과 가
 상허 이태준 『달밤』 표지 (삼성출판박물관 제공) |
소설에서 주인은 언젠가 상허 씨에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떤 미인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했더니 부인은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만두라고 했더니, 영원히 순결한 정신적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이냐며 징징거렸다. 얼마 후 보니 얼굴이 몹시 상했고 한쪽 손 무명지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상허 씨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쉽게 대답했다.
“생인손을 앓아 잘라버렸네.”
상허 씨는 감격했다. 감격성 많고 선량한 그가 그 연애사건으로 단지(斷指) 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은 이층에 없었다. 구보도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밖으로 나와 구질구질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문득 고향 친구들이 떠오른다. 용기, 흥봉이, 학순이, 봉성이…… 참, 지난봄 학순이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지. 어느 잡지책에선가 상허 씨가 쓴「달밤」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자기가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줄 알면서 어찌 한 권 보내주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제목을 『추월색』이니 『강상명월』처럼 운치 있게 짓지도 못했노라 핀잔도 보탰다. 상허 씨는「달밤」을 『추월색』이나 『강상명월』 따위에 비기는 친구에게 보내 줄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발길은 서점을 찾는다. 일한서방으로 가니 누가 알은체를 하고 다가선다. 상허 씨는 중학교 때 친구로 그의 성이 강이라는 것을 겨우 기억해 낸다. 그가 상허 씨를 본정그릴로 데리고 가는데, 레인코트를 벗고 보니 양복저고리 깃에는 일장기 배지를 척 꽂았다.
상허 씨는 그날 오후 황해도 어디에서 간사지 사업을 한다는 그 ‘옛 친구’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못 먹는 맥주를 두어 컵이나 먹은 상허 씨는 등허리가 후끈거린다. 강은 사업을 위해 ‘본부’를 들락거린다고 했다. 본부가 어디냐고 하니까 “허, 이 사람! 서울 헛 있네그려. 본불 몰라? 총독부를?” 한다. 이야기 끝에 다시 정색을 하고선 상허 씨가 여학교에 관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갑자기 중신을 서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것저것 두루 다 가당치도 않았다.
아내 생각이 났다. 어제 아이가 볕도 안 나는 장마에 자꾸 옷을 버려놓는 문제로 말다툼을 했는데, 아침에도 볼이 부어 있었다. 상허 씨는 강과 헤어지는 길로 중국집 천증원에 들러서 돼지족을 제일 큰 것으로 하나 샀다. 그리고 한성도서로 가 단편집 『달밤』(1933)을 한 권 사서 학순이에게 부쳤다.
 낙랑파라 전경 |
집에 온 상허 씨는 곧「바다」를 썼을 것이다.3) 거기서 정지용 형이 언젠가 한 말을 인용했다. 바다는 ‘바다’라야 진짜 바다답다는 말이었다. ‘우미(うみ)’니 ‘씨(sea)’니 해서는 넓디넓은 바다 전체보다 기껏 그 위에 든 섬 하나 배 하나쯤을 가리키는 느낌이 든다나?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원고지 첫 줄에 ‘바다’ 이렇게 써 놓으니, 그의 말마따나 넓은 바다뿐만 아니라 바다를 덮은 하늘까지도 풍성하게 펼쳐지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을 끝까지 살려 마무리를 지을 때는 멋도 좀 부렸다.
- 바다는 영원히 희랍(希臘)으로 즐겁다.
소설가 상허 씨는 이렇게 써 놓고 스스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는 아내가 삶는 돼지족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1) 상허(尙虛)는 소설가 이태준(1904~?)의 호. 이 글은 이태준의 단편소설 「장마」(『조광』, 1936.10)를 기본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오윤정,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호, 2017.7.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3) 이 부분은 수필 「바다」 참고. 「바다」 는 실제로는 8월에 쓴 것으로 나온다. 수필집 『무서록』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