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萬里城 만리성

소설에 새긴 이름, 영원의 장소들

수필은 삶의 모습을 그대로 남긴다

서울,2030년 - 포스트코로나 시대 읽기 ①환란일지 ②2030년 서울, 그리고 레이턴시 ③바이러스와 함께 돌아보기 ④마스크에 관한 학교괴담

군함도가 울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을 기억하는 이유

유머는 엄숙함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늘 지루하고 딱딱한 아버지의 설교

소설가 상허 씨의 일일

찬탄과 논란의 굴곡, 미녀 뽑기 90여 년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2001년 봄, 젊은 시조시인들

당산대형의 꿈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 일본에서 그린 특이한 형식의 그림

①울릉도,초생활 ②미의,저쪽은 모른다

①그분이 오신다 ②기미

화내지 마세요!

①완성의 속도 ②코로나 여름, ‘국뽕 아재’의 기원 ③적막과 고요와 침묵

아무일 일어나지 않는 40호 남짓 시골마을, 그 사람들과 정서

진퇴양난의 그해 겨울 막바지에 쓴 시

7월은 가장 잔인한 달

①일상과 일상 너머를 아우르는 탄력있는 상상력 ②포스트코로나 시대 한국문학의 흐름과 성취는?

한반도, “지리의 포로”에서 “지리의 힘”으로

인간의 눈, 개의 마음

첫 책, 『자연사박물관』 그 예측을 넘어

어떤 가족의 우스꽝스러운 비극

“일본 동북사투리가 너무 어려웠어요. 게다가 한국역사도…”

새로운 창작품을 읽는 느낌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대산세계문학총서

2020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제28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자 선정 김소월 등단 100주년 기념 시그림전 -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군함도가 울고 있다.

- 우리의 역사왜곡3 : 언제까지 ‘죽창가’를 불러야 하나

한수산
소설가, 전 세종대학교 교수, 1946년생
장편소설 『부초』 『해빙기의 아침』 『엘리아의 돌계단』 『유민 1, 2, 3』 『용서를 위하여』 『군함도』 등

소설 『군함도』를 써내려가던 고비고비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각인시킨 말이 있다. 해저탄광 군함도(하시마)에는 상징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에게 가한 일본의 국가범죄가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군함도』 취재노트에 새긴 명문(銘文)이다. 첫 현장취재에서 마지막 책 『군함도』가 나올 때까지 나는 이 각성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일본의 재단법인 석탄에네르기센터의 자료 ‘석탄의 종류’에 의하면 군함도에서 채굴되던 석탄은 일본 제1의 품질을 자랑하는 ‘역청탄(瀝靑炭)’으로 탄소함유율이 90% 이상이며 발열량이 킬로그램 당 4,500~8,000킬로칼로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 양질의 석탄은 전량이 야하타제철로 납품되어 제련용 석탄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철강이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로 보내졌던 것이다. 말을 바꾸면, 미쓰비시가 군함도에서 캐낸 석탄은 전량이 야하타제철로 와서 철을 만들었고, 그 철은 다시 미쓰비시 조선소로 보내져 전쟁의 도구인 전함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전쟁을 뒷받침하는 무기생산의 거대한 고리가 이루어진 시발점에 해저탄광 군함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군함도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침략전쟁의 첫 단추가 끼워진 공간으로서의 군함도를 이해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이 탄광에 우리의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 ‘묻지 말아, 갑자생’들이 끌려가 굶주림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하루 15시간의 강제 노역에 내몰려야 했던 비극이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지난해 봄, 일본인 친구의 1주기를 맞아 나가사키로 떠났던 나는 하루 시간을 내어 군함도를 찾았었다. 이 섬을 에워싸고 흐르는 해류는 난해하다. 세 번쯤 찾아오면 한 번쯤은 풍랑 때문에 섬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섬이다.
그날 ‘견학장소’라는 그 이름부터가 말도 안 되는 세 곳에서 이 섬의 주민이었다는 관광안내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군함도의 폐허를 둘러보았다. 세계문화유산이 아니었다. 다만 포클레인으로 부셔놓고 시멘트 길을 낸 폐허일 뿐이었다. 다만 그곳에는 1990년 무렵 취재 과정에서 드나들던 방파제의 추억이 있었다. 배를 대고 드나들던 방파제 바위의 커다란 구멍이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해안가로 다가가자 안내원들이 뒤따라와 시간이 다 되었으니 빨리 나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섬을 나와 다시 배에 올랐다. 겨우 이십오 분 동안 부서진 건물 쪼가리를 바라보며 군함도에 머무는, 그것은 턱없이 비싼 4천7백 엔짜리 군함도 관광이었다.
다시 배에 올랐다. 멀어져가는 군함도를 바라보았다. 저 군함도는 내가 처음 찾아왔던 군함도가 아니었다. 섬은 허물어지고 주저앉고 색깔마저 검게 변한 채 형체도 3분의 1쯤으로 초라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어느새 그 섬과 나 사이에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던 내 검고 길었던 머리에도 이제는 흰 서리가 내렸다. 가슴속에서 빛바랜 옛 군함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수없이 찾아왔던 군함도였다. 취재가 끝나고 책이 나왔을 때마다 한글판 『까마귀』와 『군함도』를 붙안고, 일본어판 『군함도』는 움켜쥐고, 중국어판 『군함도』는 들고 찾아왔던 섬이었다. 멀어져 가는 군함도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잘 있거라 군함도여.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이제 다시 너를 찾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떠나온 군함도를, 다시 또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시간들이 찾아왔다. 일본이 도쿄에 문을 연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군함도 전시관)’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행태 때문이었다. 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실들을 보고 있자면 분노를 넘어서서 허탈하다. 새삼스럽게, 일본은 이렇게도 졸렬하고 비루한 나라였던가 싶다. 이 나라가 문명국가인가 묻게 된다.
일본은 8개 현에 걸쳐 최대 1,300km나 떨어져 있는 23개 시설을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여기에 군함도를 포함시킨 것은 ‘역사왜곡을 넘어선 사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일본이 인류를 향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가지고 벌이는 사기가 아닌가. 강제 노역을 당해야 했던 피해 당사자인 한국인과 중국인에게만도 아니다. 자국민 일본인들에게까지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사기란 위계에 의해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이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하여는 다른 장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기에 잘못이 있었다면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시간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코로나로 길이 막혀 찾아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이 전시관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반론은 훗날의 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어쩔 수 없이 몇몇 신문과 방송 매체에 나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이야기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생각했다. 나는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나 군함도에 한 발을 담그고 있을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일본의 국가범죄가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군함도의 문제를 소설이라는 허구가 아닌 산문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충분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나와 군함도에 얽혀 있는 30여 년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책을 쓰자는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

군함도를 통해서 본 우리의 역사왜곡1) - 3

우리의 모든 언론이 그렇게 써 왔다. 군함도에서 있었다고 하는 조선인 122명 사망설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22명의 조선인이 군함도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맞다. 그러나 122명이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사망했다고 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군함도의 조선인 122명 사망설의 근거는 군함도 옆 무인도 나카노시마[中ノ島] 화장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군함도 거주민의 ‘사망확인서 및 화장, 매장 허가증’을 모아서 묶어놓은 책자에 근거한다. 이 자료는 익명의 일본인이 오카 마사하루[剛政治]목사가 주재해 온 시민단체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에 제공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출되었다.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는 이 약속을 지켜 자료의 취득경위를 밝히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발간하는 책자 ‘원폭과 조선인’에 자료와 함께 상세한 분석과 해제를 더해 처음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그 후 이 자료는 규슈대학 석탄연구소에 기증되었고, 현재 규슈대학이 소장하고 있다(한국언론이 이 책자가 시민단체 회원들이 군함도 내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습득한 것이 아니라 익명의 인사에 의해 제공된 것이다).
이 책자에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20년간 나카노시마 화장장에서 이루어진 조선인과 중국인 138명의 사망기록으로, 상세한 인적사항과 함께 병명 및 사인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중국인과 국적을 확정하기가 불분명한 한 사람을 뺀 나머지가 122명의 조선인이다.
122명이 모두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인가. 아니다. 이 사망자 명부에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산모도 있고, 사산된 남자아이도 한 사람의 사망자로 기재되어 있다. 영양실조 혹은 알콜 중독 간장경변으로 사인을 적시해 놓은 조선인 사망자도 있다. 1925년에 이미 군함도에서 조선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조선인 광부와 그 가족이 강제연행이 아닌 형태로 군함도에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일제가 조선인 강제동원을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군수품의 조달은 물론 전시에 필요한 병사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국내는 물론 그들이 내지라고 말하는 일본 그리고 먼 남양군도에까지 조선인을 강제 연행해 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복사를 해서 손수 풀을 붙여가며 책으로 만들어 나에게 전해준 이 사망자 화장 기록은 내 소설 『군함도』의 집필 과정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자료를 살피다가, 크레졸을 먹고 투신자살한 젊은 조선 여인의 기록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여자다!’하면서 가슴을 쳤었다.
한밤의 방파제를 지키는 경비원에게 술을 먹이며 사랑하는 남자의 탈출을 돕고 난 후 끝내는 바다에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하는 여주인공, 유곽의 여인 ‘금화’의 모티브를 얻은 것이 이 화장 기록이었다. 이 여인은 그렇게 해서 나에게로 와 소설 『군함도』의 여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탄광 관리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엽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아 그랬구나. 사람들은 찻잔 하나에도 모란꽃을 그려 넣으며 살아가는 거였구나’하고 되뇌던 여인 금화는 결국 방파제로 걸어 나아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 안개가 깊구나……’ 그 한마디였다.
단언하건대 강제징용된 조선인 122명이 군함도에서 죽지 않았다. 이 문건의 중요성은 ‘122명의 조선인 사망’이 아니다. 이 기록은 1925년 3명을 시작으로 1942년 5명까지 한 자리 숫자에 머물렀던 조선인 사망자(화장자)가 1944년 15명, 1945년 17명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강제 동원이 가열화하면서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이 미숙련 상태로 가혹한 노역에 내던져졌다는 희생의 반증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입증된 자료를 주장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를 근거로 ‘군함도에서 강제 연행 조선인 122명 사망’이라고 주장하는 치졸함은 이제 거두었으면 한다. 이것 또한 왜곡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것이 ‘뉴욕 중심 타임스퀘어에 뜬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물이다. 서 모 교수라는 사람이 주도한 이 영상물에는 ‘The Island of Hell’이라는 자막에 이어 ‘120 killed...’라고 자막이 흐른다. 더욱이 이때 배경으로 쓴 사진에 나오는 광부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패전 후 일본 부흥의 산업현장을 알리는 홍보성 기획물 ‘패전 후 노동에 전념하는 일본인’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사진작가 사이토 고이치[齊藤康一]의 작품사진이었다. 하필이면 열심히 일하는 일본 광부를 홍보하는 사진을 가혹한 노동에 처해진 조선 징용자로 둔갑시킨 횡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또한 kill이 단순한 사망이 아니라 ‘살해하다’라는 뜻임은 인터넷 게임을 좋아하는 한국의 초등학생도 안다. 왜, 무엇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 탄광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인가.
일제강점기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과 야만적 국가범죄는 정확한 사실과 실증적 자료를 가지고 그들의 역사왜곡과 과거사 날조를 낱낱이 말하기에도 차고 넘친다. 저 수많은 것들을 제쳐놓고 졸렬하고 구차하기 짝이 없는 120 killed라는 억지 ‘죽창가’를 불러댐으로써 ‘그것 봐라. 한국인 너희들은 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항의와 비아냥거림의 빌미를 일본에 제공하는지, 그 저의를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위해 불행했던 역사까지 들먹이며 우리 스스로를 모욕하고 참담하게 하는지 그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뿐인가.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에 일본의 탄광 벽에 쓰여있다고 알려진 낙서가 있다.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라는 낙서다.
2000년 1월 3일, 후쿠오카에서 발간되는 서일본신문은 사회면 기사에서 이 낙서가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당사자들의 증언과 사과까지 싣고 있는 기사이다. 1965년 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라는 조총련 단체는 한일수교 반대 운동의 하나로 <을사년의 매국노(乙巳年の賣國奴)>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이때 촬영팀의 한 여자 스태프가 감독의 지시에 따라 벽에 한글로 이 낙서를 썼고, 이것을 촬영하여 조선인들이 탄광 합숙소에 쓴 낙서라고 조작, 영화에 사용했던 것이다.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가 지목하는 매국노는 1905년 한일늑약이 체결되는 을사년의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가 아니다. 영화에서 을사년의 매국노로 지목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 1965년(을사년)의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인사들이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은 후에 북한으로 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프로파간다 영화를 위해 날조된 낙서가 우리의 교과서에까지 실려 어린 학생들의 반일감정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밝혀져 있는데도 ‘군함도 취재를 가서 탄광 벽에 쓰여있는 이 낙서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는 날조 기사를 쓴 여기자의 글이 오늘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지금의 군함도에는 아예 탄광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쓰비시는 군함도의 폐광과 함께 일부 지하 시설물을 반출한 후 갱도를 파괴했다고 밝히고 있다. 광부들이 드나들며 지옥문이라고 불렀다는 선착장 앞 갱도 입구가 콘크리트로 봉쇄되어 있음을 내가 확인한 것은 이미 1990년 여름 오카 마사하루 목사와 함께 취재를 위해 군함도에 상륙했을 때였다. 붕괴와 폭발의 위험에 대비해 사람의 출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때는 30여 미터 안까지는 들어가 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아예 입구 바로 앞을 또 막아 버리고 위험표지를 해 놓고 있다. 파괴 후 폐쇄 봉인된 지하에 무슨 탄광의 유적이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것인가.
군함도에 산재한 해저탄광 유적과 아파트군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 100년이 넘게 비바람 속에 방치되어 있는 광부 숙소 30호동 아파트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의 자연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건축자산이기도 하다. 1916년 일본 최초로 세워진 후 증개축을 거듭한 아파트이다. 그랬기에 나는 2009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업혁명 유산 따위로 위장하지 않는 군함도 자체만의 세계유산 등재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가혹한 강제 노역이 있었음을 명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거듭 말하자면, 일본이 군함도를 7개 현에 널려진 23개 물건에 포함시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며 벌이고 있는 작태는 오직 관광 수입을 위한 돈벌이일 뿐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도금된 가식이다. 지방 도시의 관광수입을 위해 유네스코를 이용하는 사기행각인 것이다.

나의 대학시절 은사이신 박용주 교수님이 항암치료를 시작하던 날이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교수님은 어지럽게 흔들리던 나와는 달리, 언제나 그랬듯이 평온했고 쾌활하기까지 하셨다. 심지어 병실 탁자 속의 담배를 꺼내놓으면서 ‘우리 한 대씩 피우자. 간호사 오나 잘 봐. 병원에선 간호사가 제일 무섭단다’ 하며 웃기까지 하셨다. 마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나를 달래기나 하듯이.
그렇게 앉아 밖을 내다보던 교수님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이 병실 바로 밑이 응급실이고 그 옆이 영안실이라고.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를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옮기기도 편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 뒤에 이어지던 교수님의 말씀이 내 귓가에 깊고 낮은 목소리로 웅웅거리며 남았다. ‘어젯밤 여기 앉아 밖을 내다보자니,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 그냥 그렇게, 참 쓸쓸할 수가 없 더라.’
그 말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눈물 때문에 한강 고수부지에 차를 박아놓고, 울었다. 쓸쓸하다는 말이 그렇게도 힘찬 슬픔을 가진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흐린 눈길로 한강물을 바라보며 처음 알았다.
요즈음 나는 군함도를 떠올리며 그때와는 다른 질량으로 쓸쓸해지곤 한다. 한국과 일본이 진실을 앞에 놓고 역사의 탁자에 마주앉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독립기념관의 입장객 수까지 부풀려 조작하는 우리가 아닌가. 한국판 야드 바셈2)을 가질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다만 허망한 꿈이어야 하나.


이 항목은 군함도 르포를 주제로 준비하는 책의 한 부분이다. 역사에 대한 실증적 검증도 현장에 대한 탐구도 없이 저질러지는 현실을 향해 ‘우리의 역사 왜곡은 없는가’를 성찰하는, 비늘같이 작은 부분의 하나이다.
2)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953년 설립된 이스라엘의 공식 추모 기념관, 예루살렘 헤르츨 언덕, 숲 인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