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0년 - 포스트코로나 시대 읽기 ①환란일지 ②2030년 서울, 그리고 레이턴시 ③바이러스와 함께 돌아보기 ④마스크에 관한 학교괴담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 일본에서 그린 특이한 형식의 그림
①완성의 속도 ②코로나 여름, ‘국뽕 아재’의 기원 ③적막과 고요와 침묵
아무일 일어나지 않는 40호 남짓 시골마을, 그 사람들과 정서
①일상과 일상 너머를 아우르는 탄력있는 상상력 ②포스트코로나 시대 한국문학의 흐름과 성취는?
“일본 동북사투리가 너무 어려웠어요. 게다가 한국역사도…”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대산세계문학총서
2020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제28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자 선정 김소월 등단 100주년 기념 시그림전 -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
가상인터뷰
2020년 여름, 서울. 이곳이 파리의 노천카페라면 좋을 텐데,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바람에 겨우 광화문 스타벅스라니 별로 로맨틱하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다(그중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다. 음료를 마셔야 하고 대화도 해야 하니까.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내려 턱에 걸쳤고, 나는 숨이 답답해져서 잠시 벗어 놓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을 기다리고 있다. 아, 물론 그는 내가 4살인가 5살일 때 스위스에서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책이나 티브이 화면으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설마 뜨내기 분장을 하고 오지는 않겠지? 우리가 잘 아는 그 모습, 콧수염과 작은 중절모에 꼭 끼는 상의, 그리고 헐렁한 바지에 커다란 구두 말이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 그런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간 당장 각종 SNS에 그의 사진이 넘쳐날 것이다.
한참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수줍게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키가 작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한 영국인이 서 있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났다.
■ 박시하(이하 박) : 아, 안녕하세요? 정말로 와 주셨네요!
■ 찰리 채플린(이하 찰리) : 흠흠(매우 부끄러워하며 기침). 네…… 사실 여기를 찾느라 한참 헤맸어요.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는 평범한 흰색 폴로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파란 눈을 반짝이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굉장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거나 힐끗거리지 않았다. 하긴, 이건 내 상상 속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찰리를 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박 찰리, 제가 음료를 주문해 올게요. 커피 괜찮으세요?
찰리 저는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서 잘 모릅니다. 알아서 가져다주세요. 커피라, 물론 좋아요.
찰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소 낯설어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아이스커피 한 잔씩을 탁자에 놓고 마주 앉았다.
박 처음 뵙겠습니다. 메일로 말씀드렸지만,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시인이고 이름은 박시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찰리 음…… 상당히 오랜만에 지상 구경을 하니 좀 어지러워요. 일본에는 그래도 가끔 가는데, 한국은 처음 와 봅니다. 여긴 또 분위기가 다르네요.
박 네, 아시겠지만 요즘 지구 전체에 역병이 돌거든요. 가능하면 제가 찰리에게 익숙한 나라에 가서 뵙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만나게 되었네요. 그런데 참 좋아 보이세요. 지내시는 곳은 어떤가요?
찰리 뭐 거기야 늘 평온하지요. 흥미로운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지만. 요즘 넷플릭스에 푹 빠져 지냅니다. 음악은 너무 오랫동안 들어서 좀 질렸거든요.
박 아, 그곳에서도 넷플릭스 시청이 가능하군요? 재미있죠, 넷플릭스 드라마들! 그런데 저는 지난 세기보다 영화나 드라마 수준이 좀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에요.
찰리 오, 그건 맞는 말입니다. 한동안 멋진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굉장히 뿌듯했는데, 최근에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그리고 너무 폭력적이기만 해서 말이에요. 난 자본주의가 언젠가 영화를 망칠 줄 알았어요.
박 그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첫 번째 질문을 드릴게요. 찰리에게 영화란 어떤 것인가요?
찰리 나는 평생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가 나의 모든 것이었죠. 미국에서 카노 극단의 순회공연을 하다 키스톤 영화사에 스카우트된 것이 영화와 만나게 된 계기였어요. 첫 출연을 하면서 뜨내기라는 인물을 만들어냈어요. 그러고 나서 감독까지 하게 됐죠. <비를 만나다>라는 영화가 감독을 한 첫 영화였는데,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출연하는 모든 작품을 감독했어요. 스물다섯 살이던 1914년 무렵엔 이미 영화에 푹 빠져 있었죠. 나중에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스위스에 정착할 때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 제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제작 방식을 넘어 극적 효과를 얼마나 살릴 수 있느냐에요. 예술적 재능을 발휘해야 하는 겁니다.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매우 흥미로운 일이지요.
신선함, 독창성, 단순한 접근 방식이 중요합니다. 카메라 트릭이나 기계를 이용한 효과는 부수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박 찰리의 뜨내기…… 때론 친구로 번역되기도 하더라고요.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친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예요. 계속 넘어지고, 엉뚱한 실수를 하고, 정의롭거나 비장하지도 않고, 촌스럽고 가난한데 어쩌다 출세를 하기도 하고, 따뜻하고 인간적이죠. 무엇보다 너무 웃겨요. 뜨내기의 탄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무척 궁금해요.
찰리 굉장히 즉흥적인 거였어요. 사실 제 시작은 항상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왔죠. 키스톤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는 방식은 세트장부터 지어 놓은 후 시나리오도 없고 별다른 줄거리도 없이 웃기는 장면만 연출하는 거였는데, 저에게 아무거라도 좋으니 우스운 분장을 하고 나와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콧수염을 붙이고, 전체적으로 부조화스러운 걸 생각했죠. 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상의, 작은 모자에 큼지막한 구두가 좋을 것 같았어요. 분장을 마치고 무대에 서자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인물이 태어났죠. 머릿속에서 온갖 우스운 몸짓과 희극적인 장면들이 솟구쳐 올랐어요.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 시인,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제가 처음 설명한 뜨내기는 이런 사람이었어요.
박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에도 찰리는 무성영화를 고집했죠. 그랬던 이유가 있나요?
찰리 뉴욕에 머무르던 시절 영화 동시녹음이 시작됐어요. 1962년에 워너브라더스 영화사가 처
음으로 토키영화(발성영화 또는 유성영화)를 제작했지요. 처음에는 음향 효과가 유치하고 어색했지만 차차 모든 극장이 토키용 음향설비를 갖추기 시작했어요. 당시 무성영화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죠.
그래도 나는 무성영화를 고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때 나는 그 분야의 대가였고, 모든 예술 형식이 나름대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고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시티 라이트>를 만들었죠. 영화는 대성공이었어요. 가끔 나도 유성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 무성영화보다 뛰어난 유성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뜨내기에게 말을 시킬 수도 없었고요. 뜨내기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고유의 정체성을 잃게 될게 뻔했거든요.
박 히틀러를 조롱하는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만드셨지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히틀러를 소재로 저렇게 웃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찰리 채플린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죠.
찰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4년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전쟁의 지옥과도 같은 상흔을 재빨리 잊어버렸지만 말이죠. 나는 가증스러운 히틀러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죠. 나치의 순혈주의라는 억지 주장을 비웃고 싶었어요. 물론 당시 내가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제작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내 영화 중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죠.
하지만 그 이후 미묘하게 언론이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연히 하게 된 ‘러시아 전쟁구제 미국위원회’에서의 연설로 인해 후에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게 됐죠.
박 그건 아무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겠네요. 그럼 화제를 돌려 볼까요? 여러 유명 인사들, 정치가, 예술가와 폭넓은 교류를 가지셨잖아요. 기억나는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
찰리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폴레트(<위대한 독재자>의 여주인공)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러 일본 선박에 오른 적이 있어요.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한 사람이 보낸 쪽지를 받았는데 서명을 보니 장 콕토라고 되어 있더군요.
콕토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는 프랑스어를 몰랐어요. 콕토의 비서가 통역을 맡았는데, 그녀도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었어요. 콕토는 손을 가슴에 대고 기관총이라도 쏘는 듯 빠르게 말했는데 비서는 느릿느릿 띄엄띄엄 통역을 했죠. “콕토 씨는 그러니까…… 저…… 당신이 시인… 태양의 시인이고 자신은 저… 음… 밤의 시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이었어요. 밤새도록 이런 식으로 철학과 예술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서로의 의견에 일치하는 것이라도 있으면 와락 끌어안고 기뻐했죠.
하지만 다음 날 점심 약속을 해 놓고 우리는 똑같이 나가지 않았어요. 사실은 말이 안 통하니까 불편했던 거예요. 우리는 선상에서 서로 숨바꼭질을 하듯이 서로를 피해 다녔어요. 그래도 미국까지 함께 가는 동안 콕토는 이따금 내 선실에 와서 도쿄에서 산 애완 귀뚜라미를 보여주곤 했어요. 이름은 피루였죠. 콕토가 말을 걸면 노래로 응답을 한다며 매우 영리한 놈이라고 하더군요.
박 찰리의 희극영화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봐도 너무 우스워요. 표정이랑 몸짓만으로 그렇게 웃길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게다가 품격마저 있어요! 그런 고품격 유머를 잃어가고 있어서 인류가 면역력이 약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찰리는 유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찰리 아, 아직도 내 개그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네요(웃음).
물론 웃음을 주는 것에도 철학이 있지요. 매우 민감하고 정교한 것이 유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유머는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에서 분간해낼 수 있는 행동의 미묘한 불일치 또는 어긋남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유머를 통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서 불합리한 것을 봅니다. 또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보지요.
한편 유머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고양하고, 우리가 ‘제정신’이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유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부침을 견뎌낼 수 있는 거죠. 유머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엄숙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박 와, 역시 당대를 주름잡은 희극 배우다운 말씀이세요. 유머를 시로 바꿔서 저 문장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찰리는 유머를 예술의 수준까지 발전시킨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시인이라서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은데, 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찰리 저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인 하트 크레인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시의 목적에 대해 생각을 교환했는데, 나는 시가 세상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했지요. 하트는 우수 어린 표정으로 “이 좁은 세상에”라고 말하더군요.
박 찰리는 사르트르나 피카소, 딜런 토머스, 버나드 쇼 같은 분들과도 만나셨잖아요. 그 시절은 전쟁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나 시인, 화가, 그리고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서로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이 조금 부럽기도 해요. 현대에는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을 뿐이고, 예술가들이 폭넓게 서로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이 거의 없거든요. 세계화되고 획일화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신문물이 발달했는데도 오히려 모두가 소외되고 고립되어 있죠. 사람들 간의 진실한 소통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워요. 참, 찰리의 가족도 모두 배우였지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찰리 그래도 제가 그 먼 곳에서도 이렇게 당신의 메일을 받지 않았습니까? 연락이 편리해진 건 사실이지요. 사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모두 자그마한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좀 기괴해요. 혹시 저렇게 들여다보면 황금이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죠?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런던은 지금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었어요. 건물이 모두 이렇게 딱딱하지 않았죠. 자연 환경도 아름다웠고요. 하지만 어머니와 형, 그리고 저는 아주 가난해서 고생이 심했어요. 어느 시대나 그런 것 같아요.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장 먹을거리가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잖아요.
어머니는 원래 보드빌 배우셨어요. 재능이 많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죠. 하지만 역시 배우였던 아버지와 이혼한 후 어느 날 목소리가 망가졌어요. 배우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바느질을 해서 우리를 돌봤어요. 아버지가 양육비로 보내주는 돈은 적은 데다 끊길 때도 많아서 우리의 궁핍은 매우 심각했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흐트러지지 않고 우리를 따뜻하게 사랑해 주셨어요.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서 빈민구호소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힘들었죠.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거든요. 빈민구호소를 전전하는 동안 어머니는 상태가 더 악화되셔서 결국 영양실조로 인한 정신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나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 평생 잊지 않게 됐어요.
‘여덟 명의 랭커셔 소년들’의 단원이 되었을 때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어요. 그 이후에도 지독하게 가난해서 나는 신문팔이, 인쇄소 일, 장난감 만드는 일, 유리 부는 일, 병원 잡부, 장작 패는 일 등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러다 열두 살 무렵 우연히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되었죠.
박 어린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 섰던 경험이 후에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양분이 되었겠군요. 그렇게 극단 순회공연을 하다가 미국에도 처음 가게 되신 거고요. 그런데 찰리는 미국에서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추방당했어요. 미국이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시나요?
찰리 나는 청춘을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며 불살랐어요. 그리고 대성공을 거뒀죠. 그만큼 자유로운 나라였지만 끝까지 미국 시민권을 만들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고향인 영국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무국적인 셈이었죠.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았어요. 여하튼 내가 <위대한 독재자>를 만든 후에 미국 언론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치적인 흐름에 휘말렸어요. 결국 미국은 저를 추방했지요. 그러면서도 엄청난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했고요.
내가 지은 죄라면 언제나 내가 일반적 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을 거예요. 하지만 누굴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박 마지막으로, 당신이 가진 인생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군요.
찰리 나는 내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이 내게 유리했다는 걸 잘 알아요. 세상은 내게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동시에 선사했죠. 나는 행운과 불운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놀라고 기뻐했죠. 나는 인생에 대해 어떤 구상도 철학도 없었어요. 인생이란 그저 투쟁일 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인생의 후반기에 충분히 행복한 생을 살다가 죽었고, 그래서 우나1)에게 늘 감사하고 있어요.
인터뷰 내내 찰리는 매우 진지했고 조금은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영화 속 ‘뜨내기’는 자신의 화신이나 다름없었지만, 실제의 찰리는 실수로 넘어지거나 바지가 내려가는 익살스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배우이자 감독, 음악가, 예술가이면서도 줄곧 매우 겸손하고 소탈해 보였다. 아마도 이런 면이 전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찰리 채플린의 진면목이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 앞에는 빈 커피 잔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일 뿐이다. 나는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자극과 강한 충동을 한 몸에 지닌 개인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나일 뿐이다. 나는 꿈, 욕망 그리고 독특한 경험의 역사를 한 몸에 지닌 나일 뿐이다.” 그가 남긴 것은 많지만, 결국 그도 한 명의 개인이었을 뿐이다. 나는 찰리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 이 가상인터뷰는 찰리 채플린이 집필한 자서전(『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류현 옮김, 김영사, 2007)을 참고로 구성하였다.
우나 오닐 :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1942년에 찰리와 만나 다음해에 결혼한 찰리 채플린의 네 번째 아내. 찰리의 마지막까지 여생을 함께 보냈다.
유머는 엄숙함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 다재다능한 뜨내기 찰리 채플린과의 한때
박시하
시인, 1972년생
시집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 산문집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등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등 수 많은 희극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국을 떠난 뒤인 1972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1977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2020년 여름, 서울. 이곳이 파리의 노천카페라면 좋을 텐데,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바람에 겨우 광화문 스타벅스라니 별로 로맨틱하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다(그중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다. 음료를 마셔야 하고 대화도 해야 하니까.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내려 턱에 걸쳤고, 나는 숨이 답답해져서 잠시 벗어 놓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을 기다리고 있다. 아, 물론 그는 내가 4살인가 5살일 때 스위스에서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책이나 티브이 화면으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설마 뜨내기 분장을 하고 오지는 않겠지? 우리가 잘 아는 그 모습, 콧수염과 작은 중절모에 꼭 끼는 상의, 그리고 헐렁한 바지에 커다란 구두 말이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 그런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간 당장 각종 SNS에 그의 사진이 넘쳐날 것이다.
한참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수줍게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키가 작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한 영국인이 서 있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났다.
■ 박시하(이하 박) : 아, 안녕하세요? 정말로 와 주셨네요!
■ 찰리 채플린(이하 찰리) : 흠흠(매우 부끄러워하며 기침). 네…… 사실 여기를 찾느라 한참 헤맸어요.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는 평범한 흰색 폴로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파란 눈을 반짝이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굉장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거나 힐끗거리지 않았다. 하긴, 이건 내 상상 속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찰리를 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의 찰리 채플린 |
찰리 저는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서 잘 모릅니다. 알아서 가져다주세요. 커피라, 물론 좋아요.
찰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소 낯설어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아이스커피 한 잔씩을 탁자에 놓고 마주 앉았다.
박 처음 뵙겠습니다. 메일로 말씀드렸지만,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시인이고 이름은 박시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찰리 음…… 상당히 오랜만에 지상 구경을 하니 좀 어지러워요. 일본에는 그래도 가끔 가는데, 한국은 처음 와 봅니다. 여긴 또 분위기가 다르네요.
박 네, 아시겠지만 요즘 지구 전체에 역병이 돌거든요. 가능하면 제가 찰리에게 익숙한 나라에 가서 뵙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만나게 되었네요. 그런데 참 좋아 보이세요. 지내시는 곳은 어떤가요?
찰리 뭐 거기야 늘 평온하지요. 흥미로운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지만. 요즘 넷플릭스에 푹 빠져 지냅니다. 음악은 너무 오랫동안 들어서 좀 질렸거든요.
박 아, 그곳에서도 넷플릭스 시청이 가능하군요? 재미있죠, 넷플릭스 드라마들! 그런데 저는 지난 세기보다 영화나 드라마 수준이 좀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에요.
찰리 오, 그건 맞는 말입니다. 한동안 멋진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굉장히 뿌듯했는데, 최근에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그리고 너무 폭력적이기만 해서 말이에요. 난 자본주의가 언젠가 영화를 망칠 줄 알았어요.
박 그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첫 번째 질문을 드릴게요. 찰리에게 영화란 어떤 것인가요?
찰리 나는 평생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가 나의 모든 것이었죠. 미국에서 카노 극단의 순회공연을 하다 키스톤 영화사에 스카우트된 것이 영화와 만나게 된 계기였어요. 첫 출연을 하면서 뜨내기라는 인물을 만들어냈어요. 그러고 나서 감독까지 하게 됐죠. <비를 만나다>라는 영화가 감독을 한 첫 영화였는데,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출연하는 모든 작품을 감독했어요. 스물다섯 살이던 1914년 무렵엔 이미 영화에 푹 빠져 있었죠. 나중에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스위스에 정착할 때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 제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제작 방식을 넘어 극적 효과를 얼마나 살릴 수 있느냐에요. 예술적 재능을 발휘해야 하는 겁니다.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매우 흥미로운 일이지요.
신선함, 독창성, 단순한 접근 방식이 중요합니다. 카메라 트릭이나 기계를 이용한 효과는 부수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박 찰리의 뜨내기…… 때론 친구로 번역되기도 하더라고요.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친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예요. 계속 넘어지고, 엉뚱한 실수를 하고, 정의롭거나 비장하지도 않고, 촌스럽고 가난한데 어쩌다 출세를 하기도 하고, 따뜻하고 인간적이죠. 무엇보다 너무 웃겨요. 뜨내기의 탄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무척 궁금해요.
찰리 굉장히 즉흥적인 거였어요. 사실 제 시작은 항상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왔죠. 키스톤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는 방식은 세트장부터 지어 놓은 후 시나리오도 없고 별다른 줄거리도 없이 웃기는 장면만 연출하는 거였는데, 저에게 아무거라도 좋으니 우스운 분장을 하고 나와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콧수염을 붙이고, 전체적으로 부조화스러운 걸 생각했죠. 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상의, 작은 모자에 큼지막한 구두가 좋을 것 같았어요. 분장을 마치고 무대에 서자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인물이 태어났죠. 머릿속에서 온갖 우스운 몸짓과 희극적인 장면들이 솟구쳐 올랐어요.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 시인,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제가 처음 설명한 뜨내기는 이런 사람이었어요.
박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에도 찰리는 무성영화를 고집했죠. 그랬던 이유가 있나요?
찰리 뉴욕에 머무르던 시절 영화 동시녹음이 시작됐어요. 1962년에 워너브라더스 영화사가 처
 영화 <위대한 독재자> 포스터 |
그래도 나는 무성영화를 고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때 나는 그 분야의 대가였고, 모든 예술 형식이 나름대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고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시티 라이트>를 만들었죠. 영화는 대성공이었어요. 가끔 나도 유성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 무성영화보다 뛰어난 유성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뜨내기에게 말을 시킬 수도 없었고요. 뜨내기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고유의 정체성을 잃게 될게 뻔했거든요.
박 히틀러를 조롱하는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만드셨지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히틀러를 소재로 저렇게 웃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찰리 채플린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죠.
찰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4년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전쟁의 지옥과도 같은 상흔을 재빨리 잊어버렸지만 말이죠. 나는 가증스러운 히틀러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죠. 나치의 순혈주의라는 억지 주장을 비웃고 싶었어요. 물론 당시 내가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제작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내 영화 중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죠.
하지만 그 이후 미묘하게 언론이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연히 하게 된 ‘러시아 전쟁구제 미국위원회’에서의 연설로 인해 후에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게 됐죠.
박 그건 아무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겠네요. 그럼 화제를 돌려 볼까요? 여러 유명 인사들, 정치가, 예술가와 폭넓은 교류를 가지셨잖아요. 기억나는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
찰리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폴레트(<위대한 독재자>의 여주인공)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러 일본 선박에 오른 적이 있어요.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한 사람이 보낸 쪽지를 받았는데 서명을 보니 장 콕토라고 되어 있더군요.
콕토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는 프랑스어를 몰랐어요. 콕토의 비서가 통역을 맡았는데, 그녀도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
이런 식이었어요. 밤새도록 이런 식으로 철학과 예술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서로의 의견에 일치하는 것이라도 있으면 와락 끌어안고 기뻐했죠.
하지만 다음 날 점심 약속을 해 놓고 우리는 똑같이 나가지 않았어요. 사실은 말이 안 통하니까 불편했던 거예요. 우리는 선상에서 서로 숨바꼭질을 하듯이 서로를 피해 다녔어요. 그래도 미국까지 함께 가는 동안 콕토는 이따금 내 선실에 와서 도쿄에서 산 애완 귀뚜라미를 보여주곤 했어요. 이름은 피루였죠. 콕토가 말을 걸면 노래로 응답을 한다며 매우 영리한 놈이라고 하더군요.
박 찰리의 희극영화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봐도 너무 우스워요. 표정이랑 몸짓만으로 그렇게 웃길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게다가 품격마저 있어요! 그런 고품격 유머를 잃어가고 있어서 인류가 면역력이 약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찰리는 유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찰리 아, 아직도 내 개그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네요(웃음).
물론 웃음을 주는 것에도 철학이 있지요. 매우 민감하고 정교한 것이 유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유머는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에서 분간해낼 수 있는 행동의 미묘한 불일치 또는 어긋남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유머를 통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서 불합리한 것을 봅니다. 또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보지요.
한편 유머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고양하고, 우리가 ‘제정신’이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유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부침을 견뎌낼 수 있는 거죠. 유머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엄숙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박 와, 역시 당대를 주름잡은 희극 배우다운 말씀이세요. 유머를 시로 바꿔서 저 문장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찰리는 유머를 예술의 수준까지 발전시킨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시인이라서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은데, 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찰리 저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인 하트 크레인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시의 목적에 대해 생각을 교환했는데, 나는 시가 세상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했지요. 하트는 우수 어린 표정으로 “이 좁은 세상에”라고 말하더군요.
 박시하 |
박 찰리는 사르트르나 피카소, 딜런 토머스, 버나드 쇼 같은 분들과도 만나셨잖아요. 그 시절은 전쟁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나 시인, 화가, 그리고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서로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이 조금 부럽기도 해요. 현대에는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을 뿐이고, 예술가들이 폭넓게 서로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이 거의 없거든요. 세계화되고 획일화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신문물이 발달했는데도 오히려 모두가 소외되고 고립되어 있죠. 사람들 간의 진실한 소통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워요. 참, 찰리의 가족도 모두 배우였지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찰리 그래도 제가 그 먼 곳에서도 이렇게 당신의 메일을 받지 않았습니까? 연락이 편리해진 건 사실이지요. 사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모두 자그마한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좀 기괴해요. 혹시 저렇게 들여다보면 황금이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죠?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런던은 지금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었어요. 건물이 모두 이렇게 딱딱하지 않았죠. 자연 환경도 아름다웠고요. 하지만 어머니와 형, 그리고 저는 아주 가난해서 고생이 심했어요. 어느 시대나 그런 것 같아요.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장 먹을거리가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잖아요.
어머니는 원래 보드빌 배우셨어요. 재능이 많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죠. 하지만 역시 배우였던 아버지와 이혼한 후 어느 날 목소리가 망가졌어요. 배우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바느질을 해서 우리를 돌봤어요. 아버지가 양육비로 보내주는 돈은 적은 데다 끊길 때도 많아서 우리의 궁핍은 매우 심각했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흐트러지지 않고 우리를 따뜻하게 사랑해 주셨어요.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서 빈민구호소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힘들었죠.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거든요. 빈민구호소를 전전하는 동안 어머니는 상태가 더 악화되셔서 결국 영양실조로 인한 정신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나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 평생 잊지 않게 됐어요.
‘여덟 명의 랭커셔 소년들’의 단원이 되었을 때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어요. 그 이후에도 지독하게 가난해서 나는 신문팔이, 인쇄소 일, 장난감 만드는 일, 유리 부는 일, 병원 잡부, 장작 패는 일 등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러다 열두 살 무렵 우연히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되었죠.
박 어린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 섰던 경험이 후에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양분이 되었겠군요. 그렇게 극단 순회공연을 하다가 미국에도 처음 가게 되신 거고요. 그런데 찰리는 미국에서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추방당했어요. 미국이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시나요?
찰리 나는 청춘을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며 불살랐어요. 그리고 대성공을 거뒀죠. 그만큼 자유로운 나라였지만 끝까지 미국 시민권을 만들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고향인 영국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무국적인 셈이었죠.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았어요. 여하튼 내가 <위대한 독재자>를 만든 후에 미국 언론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치적인 흐름에 휘말렸어요. 결국 미국은 저를 추방했지요. 그러면서도 엄청난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했고요.
내가 지은 죄라면 언제나 내가 일반적 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을 거예요. 하지만 누굴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박 마지막으로, 당신이 가진 인생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군요.
찰리 나는 내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이 내게 유리했다는 걸 잘 알아요. 세상은 내게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동시에 선사했죠. 나는 행운과 불운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놀라고 기뻐했죠. 나는 인생에 대해 어떤 구상도 철학도 없었어요. 인생이란 그저 투쟁일 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인생의 후반기에 충분히 행복한 생을 살다가 죽었고, 그래서 우나1)에게 늘 감사하고 있어요.
인터뷰 내내 찰리는 매우 진지했고 조금은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영화 속 ‘뜨내기’는 자신의 화신이나 다름없었지만, 실제의 찰리는 실수로 넘어지거나 바지가 내려가는 익살스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배우이자 감독, 음악가, 예술가이면서도 줄곧 매우 겸손하고 소탈해 보였다. 아마도 이런 면이 전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찰리 채플린의 진면목이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 앞에는 빈 커피 잔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일 뿐이다. 나는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자극과 강한 충동을 한 몸에 지닌 개인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나일 뿐이다. 나는 꿈, 욕망 그리고 독특한 경험의 역사를 한 몸에 지닌 나일 뿐이다.” 그가 남긴 것은 많지만, 결국 그도 한 명의 개인이었을 뿐이다. 나는 찰리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 이 가상인터뷰는 찰리 채플린이 집필한 자서전(『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류현 옮김, 김영사, 2007)을 참고로 구성하였다.
우나 오닐 :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1942년에 찰리와 만나 다음해에 결혼한 찰리 채플린의 네 번째 아내. 찰리의 마지막까지 여생을 함께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