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애란 ㅣ 소설가, 1980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졸업. 사소한 소재들에서 사소하지 않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감수성과 함께, 화려한 수식어나 관념적 묘사를 배제하고 짧은 호흡을 구사하는 문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등의 작품이 있다. 대산대학문학상, 이상문학상, 신동엽창작상, 동인문학상, 프랑스 비평가와 기자들이 선정한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Prix de L’Inapercu)' 등을 수상했다.
빛과 빚
‘전통’이란 말을 들으면 죽은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내게 준 것과 주지 않은 것, 준지 잘 모 르고 건넨 것들이 생각난다. 동시에 내가 받은 것과 받지 않으려 한 것, 받은 줄 모르고 받아온 것도. 오래된 것들은 대부분 작아지고 작아져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데 유독 옛날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왜 빛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오랜 이야기 속 어떤 불빛이 불현듯 서사의 온도를 바꿀 때, 누군가의 얼굴 을 낯설게 비출 때 내 몸에 인 긴장이 감광필름처럼 남은 탓인지 모르겠다. 혹은 이야기가 태어난 자 리에 빛(光)이, 불(火) 있는 자리에 입과 귀가 늘 있어왔기 때문인지도. 나는 여전히 경험과 지혜가 부족하지만 책을 통해 여러 가지 빛과 만났다. 그중에는 어두운 심해를 더듬는 탐조등이 있고, 신념으로 타오른 횃불도 있다. 누군가 밥 짓는 불과 총구 속 화염, 수난자의 별 빛을 비롯해 사람들이 흔히 도깨비불, 혼불이라 부르는 푸르스름하고 불가해한 물질도 있다. 그 가운데 어떤 불은 지금도 내게 원초적 두려움을 일깨우는데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이 그렇다. 한밤중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불. 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도무지 저쪽 실체가 보이지 않아 얼어붙은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겐 저 눈부신 추궁 혹은 폭력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처럼 여겨지는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많은 갈등 이면에 저 전짓불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다른 세대 작가가 쓴 조금 다른 빛도 기억한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내가 가장 예뻤 을 때」에 나오는 반복 문구를 인용해 돌림노래처럼 만든 글로, 몇 해 전 신문에 난 칼럼을 보고 나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밤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했다.”1) 어두운 방에 쪼그리고 앉아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의 테두리를 구경하는 꼬마 아이. 그런 아이 의 가슴은 우물처럼 깊게 파여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것이 고일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 이다. 글은 그 후에 쓰면 된다.2) 한밤중 노트북 앞에 앉아있으면 이따금 저 문(門)과 내 창(WINDOW)이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간 또 누군가 어둠 속에서 네모난 틀을 환하게 오려내고 있다 상상하면 안심된다. 문 앞에 쪼그 려 앉은 저 아이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작가들이 내게 어둠을 극장으로 바꾸는 법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우연히 폴란드의 한 국립묘지에 갔을 때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11월 1일, ‘죽은 자의 날’을 맞아 거기 모인 이들이 모두 초를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빛을 통해 저마다 다 른 세계와 연결되는 문을, 시간의 테두리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가장 현대적인 기기에 기대, 손바닥 위 GPS 빛을 바라보며, 이국의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간 내 모습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거기 까지 가는 동안 길을 헤매며 몇몇 산 사람에게 받은 위화감과 거기 도착하자마자 느낀 어마어마한 안 도에 대해서도. 묘지니까, 그곳에는 산 자뿐 아니라 죽은 자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를 켜는 마 음’이 있었다. 그게 나를 안심시켰다. 어둑한 바르샤바 하늘 아래 일렁이는 수천 개의 불빛을 보며 나 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곤 묘지 입구에서 산 초 세 개를 각각 다른 곳에 남겨두고 떠났다. 하나는 쇼팽 가족을 위해, 다른 하나는 카틴(Katyn) 숲 희생자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하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며칠 뒤 내가 폴란드를 떠나던 날, 바르샤바 시내에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10만 명도 넘는 시민이 모 여 ‘유럽은 백인들의 것’이라며 횃불을 들고 행진했다. 사진 속 그을음과 화염을 보니 두렵고 서글픈 마 음이 들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포바스키국립묘지에서 한 말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전통이 있습니다. ‘배제와 멸시, 모욕과 살육의 전통이 있지요. 그것은 역사나 제도뿐 아니라 내 피 안에도 있습니다. 나는 내게 그런 게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종종 책을 읽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다른 불이 필요하다는 걸, 다른 매체가 알려주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배우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빛’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장면 하나. 몇 해 전 한국의 작가3)가 독일에서 출판기념 회를 가진 적이 있다. 한국의 근대와 분열, 분단을 다룬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독일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어느 편이란 말인가?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작가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나는 죽은 사람 편입니다. 만일 문학에 전통이란 게 있다면 그 중 우리가 이어나갈 게 있다면 그건 단순히 소재나 형식이기 전 에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어떤 태도 혹은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가 죽은 자를 기리려 한다는 건, 잘 묻으려 한다는 건 결국 삶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겐 ‘나는 죽은 사람 편’이라는 저 말이 우리 문학의 아프고 소중한 유산 그리고 전통으로 느껴진다. 문학이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시대물을 쓰지 않더라도 살면서 한번쯤 전짓불 앞에 서봤 거나 서게 될 작가로서 그렇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빛의 테두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렇다.
1) 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 파이를 먹었다」, 『피터래빗 저격사건』, 랜덤하우스중앙, 2005. 2) 윤성희 칼럼,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 《경향신문》, 2010.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