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십여 년의 절집 생활을 끝내고 내 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향 강릉 에 우뚝 서있는 굴산사 당간지주(보 물 제86호)였다. 학산리 마을의 제일 높은 지대에 자리한 높이 5미터 40센티의 이 굴산사 당간지주는, 당간지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위상을 자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연미, 남성미, 검박미가 돋보이는 하나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다.

대개의 당간지주가 위쪽의 크기를 줄이거나, 바깥쪽 모서리의 모를 깎아서 유려한 느낌을 강조한 데 반해, 굴산사 당간지주는 그냥 큰 막돌 두 개를 세워놓은 듯 자연미가 도드라진다. 지주의 표면도 돌을 다듬 을 때 생긴 정 자국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어떤 장식도 더하지 않아 돌의 재질, 돌의 멋이 그대로 느껴지도 록 했다. 한마디로 묵직한 남성미와 검박미가 돋보이는 조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대 젊은 날 처음 이 당간지주를 접한 이래 나는 마음이 허하거나, 쓸데없이 삶이 무상해 보일 때면 마치 스승을 참배하듯 당간지주 앞으로 향하곤 했다. 당시 내가 쓴 시 「굴산사 당간지주」는 “산들은 낮고 / 하늘은 높고도 높아서 / 나는 속절없이 죄인이다”로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신심 깊은 신도처럼 틈만 나면 굴산사 당간지주를 찾았다. 거기에는 화려한 불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구절절한 팔만대장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마치 불상을 경배하듯, 팔만대장경을 열람하듯 당간지주와 마주하곤 했다. 저 멀리서 당간지주가 보이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어느덧 성소에 들어선 듯이 맑고, 정결하게 정화되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스승을 찾아 절집으로 들어간 것도, 유발상좌로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있게 된 것도 이 굴산사 당간지주에게서 얻은 그 어떤 힘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해맑은 청춘 시절, 남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 홀로 폐사지의 당간지주를 찾아 든 것 을, 숱한 유세를 떨 수 있는 지방 일간지 기자를 그만두고 황량한 절집을 찾아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갈수록, 굴산사 당간지주는 마치 선불교에서 수행자들에게 길을 인도해주는 선 지식처럼 다가왔다. 아무런 장식이 없이 그저 큰 막돌 하나를 박아놓은 듯한 이 당간지주의 모습에서 세상의 알음알이와 분별심을 일거에 물리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의 정신을, 에두르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바로 직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경지를 느꼈다. 당간지 주에서 느낀 이러한 정신과 경지가 이곳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의 선사상과 닮아있다는 것을 안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요즘 한참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굴산사는 예나 지금이나 폐허에 가깝다. 하지만 굴산사는 당간지주의 위상에 걸맞게, 우리나라 선불교의 문을 연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지였다. 사굴산문의 개조 가 바로 이곳 굴산사의 중흥을 이끈 범일국사이다. 범일국사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강릉 단오제의 주신으로, 승려가 성황신으로 모셔져 오랜 세월 마을주민들의 추앙을 받아온 신비로움을 간직한 인물이다. 선사가 국사가 되고, 국사가 다시 성황신으로 등극하는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그의 출발은 무엇보다 선사였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고향에서 처음 온 청탁이 바로 범일국사의 추도시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20대 초입에 홀로 굴산사 당간지주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리면서 나는 참으로 기이하고도 오랜 인연에 대하여 깊이 참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