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거리

어디쯤에서 이 생에 급히 붙잡혀 온 이유일까
숨 쉬는 게 이토록 힘겨운 건
처음 지상에 발을 디뎠을 때, 들었던 것 같다
어떤 신의 키득거림

백 년의 시간이 하룻밤 개화(開化) 같더란 늙은 여자의 말 앞에서

그 악마 같은 웃음소리가 뼛속을 파고드는데
깊은 밤 집집마다 낮은 자장가들
그 환각과도 같은 멜로디 없인 밤새 칭얼대야만 하는 우린
서로에게 주술사가 되어주려 거리에서 잔을 기울이지

나를 낳은 여자의 내 탄생을 위로하는 술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나이는 없지
부끄러움이 매일밤 우리를 괴롭히는 한
소파 다리에 끼여 수십 년을 꿈틀대는 신음들
서랍장에서 굴러다니는 치졸함들
침대 위의 머리카락들

엉킨 실타래여도 좋았을 걸 왜 그리 끙끙대며
뜨개질 하려 했을까, 낱낱의 관계들을
지친 그녀의 잠꼬대 옆에 누워

매일 동화책을 펼쳤던 건
사탕가게 앞의 천사는 영원히 어디에도 없는 천사여서

평생이 정류장에 서 있는 것 같았단 늙은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새벽

눈 질끈 감고, 이제 사랑을 해볼까
생에 최선을 다해볼까 사탕 껍질을 까며 대문을 여는데

정류장에 신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줄줄이 줄을 서 있다
어디로 가는지, 눈이 펑펑 내린다


묘지 식탁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도시에서 하룻밤 묵어갈 생각이다. 은은한 교회 종소리. 도착한 아담한 별장 정원엔 나무 덤불 가득하고 장미꽃 만발하다. 가죽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집주인이 그를 반갑게 맞는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이 허공에서 부서진다. 그는 가방을 들고 정원을 둘러보다 이층으로 올라간다. 집주인의 세 친구가 왁자하게 들어온다. 네 사람은 늘 그렇다는 듯 춤을추며 인사를 나눈다. 식탁에 일제히 둘러앉는다. 숙박객인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모두가 흥미롭다는 듯 그를 관찰한다. 요리사가 첫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평생토록 삼킨 짐승들의
묘지, 그 셀 수 없는 십자가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일제히 포크와 나이프를 든다, 마치 의례를 시작하듯 흥분의 구둣발 소리.
요리사가 두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인간에게 이토록 환희에 찬 표정은 있을 수 없다. 요리사가 세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네 번째 접시를 들고나온다. 다섯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갈라 뼈를 바르고 살점을 뜯어

여섯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저녁의 정취를 더하는 음악, 그릇 부딪는 소리,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 점점 해가 이울어 대기가 황금빛으로 빛나자 정원은 더욱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스물일곱 번째 접시를 들고 나온다. 깡마른 남자가 질긴 고깃덩이를 신경질적으로 자른다. 그 어떤 일에도 이토록 집요하고 폭력적일 수 없다.


피 튀기며

그가 이내 고기와의 사투에서 승리하자 모두 환호와 박수. 그때 또 다른 남자가 실수로 나이프를 떨어뜨려 한순간 일제히 침묵. 모두가 이토록 큰 범죄는 없다는 듯, 그를 식사에서 제외시킨다. 그때 요리사가 집채만 한 접시를 들고 나온다. 그러자 모두 기립해 포효하는 짐승의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 아흔아홉 번째 접시. 멀리서 교회종소리, 열두 번.

그러니까 당신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늦은 밤, 아껴둔 은수저 세트를 하나 더 꺼내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