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서울에 있는 한 대학 국문과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자기 학교 재학생이 올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되었는데 3월초에 한 중견출판사 편집자가 같이 식사나 한번 할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 출판사에서 내는 문예지에 후속 지면이 갈 수도 있는 등 앞으로 여러 모로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당 학생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학생의 첫 반응은 “저 이미 1월말에 다른 출판사와 출판계약서 썼는데요”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편집과 장편소설 2권을 계약했다고 했다. 등단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인 작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어떻게 봐야할지 한동안 멍했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일이 그 학생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신춘문예나 주요 문예지로 등단한 괜찮다 싶은 신인이라면 등단일로부터 몇 달 내에 출판사들로부터 출판계약을 제안 받고 계약을 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신인 작가들을 두고 출판사 간의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 년 치 일감을 일찌감치 계약했다는 신인 작가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일면 이런 일이 젊은 작가들에게 고무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등단한, 즉 등단작 1편만 보고 단편집과 장편을 계약하자고 나서는 출판사들의 과감한 혹은 무모해 보이는 배팅에는 한국문학의 어두운 현실이 고스란히 드리워져 있다는 데 그리고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데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씁쓸한 술잔이 몇 순배 더 돌고 자리는 파했지만 한국문학이 처한 우려스러운 현실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 독서 시장에서 시집이 안 팔린다는 이야기는 다 아는 구문이고 소설집의 초판 발행부수가 2천부 이하로 내려가고 이마저도 대부분 초판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인터넷 연재지면의 대폭적인 확대와 장편소설을 장려하는 분위기로 장편의 생산량은 크게 늘었지만 시장에서는 소수의 몇몇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주목조차 받기 어렵게 된 것이 최근의 현실이다. 과거에 3만~5만부 정도의 독자를 가지고 있던 검증된 중견 작가들도 1만~2만부 수준으로 독자가 줄어들었고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는 위기감이 점점 더 팽배해 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출판계는 상업성 있는 소수의 몇몇 작가에게 목을 매고 매달리거나 아니면 일찍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새로운 독자를 발굴하는 데 눈을 돌려 승부를 거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시장을 돌파하는 즉시적 대증요법으로 신진 작가들을 수혈하고 돌려쓰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고 이는 한국문학 전체에 있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막 문단에 첫발을 내디뎌 자신만의 문학관이나 문학세계가 미처 갖추어 지지 않은 아니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창작집과 장편을 계약하는 일은 마치 도박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신인의 입장에서는 당장 알아주는 이가 있고 그가 다름 아닌 이름 있는 출판사라는 사실이 격려와 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길게 볼 때는 내적인 역량을 키울 정신적 물리적 기회를 생략한 채, 소위 변변한 무장도 하지 못한 채 막 바로 시장이라는 정글에 내던져지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많지 않은 돈으로 새로운 작가를 일찍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 선점이라는 눈앞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크고 좋은 물건이 될 수 있음에도 당장을 위해 치어나 새싹 수준에서 과실을 조기에 따 버림으로써 더 큰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우물을 고갈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실제로 소액의 계약금을 주고 계약을 했지만 받은 작품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신통치 않아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출판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계약금을 포기하는 일도 심심치 않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작가나 문학이 그때그때 쓰고 버리는 소모품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등단하고 몇 년 동안 청탁 한 번 받지 못해 전전긍긍 했다는 말이 정설과 같았다. 이 말의 의미는 문학적으로 상당 시간동안 스스로를 검증하고, 숙련하고 또 내적 역량을 키우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작품의 생산자이자 정신세계를 다룬 온전한 문인으로, 즉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장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한국문학의 미래를 숙성시키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현상이 한국문학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성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진지한 작품세계나 문학관을 가지고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다양성을 확보해온 문학성 있는 작가와 작품들의 설자리가 점점 상업논리에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몇몇 인기작가에 매달리는 현상과 신진 작가들을 그때그때 소모하는 현상을 낳고 그리하여 우리 문학 전체가 소진되고 취약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낳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계에서 문학출판이 가장 진입장벽이 높은 폐쇄적인 시장이고 동시에 점점 자가 발전, 자가 수요 시장화 되어가고 있다는 혹은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출판시장, 특히 문학시장이 어렵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호흡을 더 길게 하고 한국문학 전체를 살피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