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인환_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6년생
저서 『언어학과 문학』 『비평의 원리』 『상상력과 원근법』 『한국고대시가론』 『동학의 이해』 『문학과 문학사상』 『다른 미래를 위하여』 『의미의 위기』등
신달자 시집『종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종이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사물표상과 단어표상을 함께 다루면서 파피루스, 점토, 나뭇잎, 댓조각, 비단, 동물가죽 등에서 시작하여 종이의 발명과 전파 과정을 추적한다. 시인이 보기에 한지에는 세상이 뱉어내는 것을 다 안아 들이는 허공의 질감이 있고 선비들이 시를 적어 여심의 구석구석까지 먹이 배어들게 하던 기생의 치마에도 정신의 절실함이 있다.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종이와 사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에게 종이의 이미지는 사물표상을 넘어 확대된다. 인생은 글이 적혀 있는 종이이다. 여름 나뭇잎은 너무 진해서 붓을 밀어내는 초록 종이이고 파도는 아무리 구겨 놓아도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푸른 종이이고 눈은 용서를 배우지 못한 자는 손댈 수 없는 순은의 종이이다. 시인은 목련에서 생의 시 한 줄 녹여 묻어두고 싶은 종이를 보며, 가을들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종이의 고요를 느낀다. 시인은 종이에 쓴 자신의 시가 모든 걸 내어준 사람의 얼굴에 깊게 파이는 주름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 주름은 깊은 계곡에 지어 놓은 절과 같아서 물살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시인은 종이가 지폐를 가지고 가서 필요한 물건과 바꾸면 모든 일이 종결되는 마케팅 사회의 부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소통이 두절되고 관계가 단절된 마케팅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비극적 운명이라고 하겠지만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거꾸로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경고이므로 우리는 종이 앞에서 소통과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하고 마케팅 사회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시인은 그 자신의 고유한 통찰이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함으로써만 성취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관습적인 삶의 형식을 포기할 때 찾아오는 위기는 새로운 통찰이 싹틀 수 있는 창조의 모판이 된다. 관습적인 삶의 형식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호소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귀를 닫아버린다. 그들은 마케팅 사회가 강조하는 가치들 안에서 사람됨의 바탕을 망각하고 돈과 명예와 안정을 찾아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시각과 그것에 따라다니는 편협함은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마케팅 사회의 편의주의로 본다면 모든 시인은 배교자나 망상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위기를 조작하고 유발하려는 행동은 오만한 월권이다. 삶의 한복판을 깨고 들어오는 절대적 운명으로서의 타자의 개입만이 협소한 자아를 초월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어떤 깊은 본질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종이에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면의 근거 깊숙한 곳까지 흔들고 마는 어떤 역설이다. 종이 앞에서 시인은 자신을 안전하게 숨길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호소하면서 물어나가는 것뿐이다. 위험과 파멸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우울한 시대를 버텨내고 견뎌내는 것 이외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 종이만이 생의 온갖 굴욕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시인은 종이 이외에 달리 의지할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시인은 “입은 닫고 귀는 열어//귀는 닫고 눈은 열어//낮게//낮게//엎드려”(「성소」) “임종을 안고 종이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고”(「임종」) 있다. 근원적인 대답이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기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자기탐구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인간에게 불변은 몽상이고 망상이다. 누구에게나 생은 부동화(不動化)할 수 없는 편력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사막을 걷는 사람의 강인함이 요구된다. 시인은 “사막 위를 절룩이며”(「백지3」) “모래 씹히는 사막의 지문”(「핸드 프린팅」)을 보여 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