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신조_소설가. 1974년생
소설 『나의 검정그물스타킹』 『새로운 천사』 『감각의 시절』 『기대어 앉은 오후』 『가상도시백서』 『29세 라운지』 등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이 균질(均質)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은 곧게 내달리다가도 완만히 커브를 돌고, 잰걸음으로 종종거리다가도 어깃장을 부리며 드러눕는다. 시간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깨금발로 겅중거리고, 뱀처럼 구불구불 미끄러진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이 균질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1분은 그저 60초일 수 없고, 어떤 하루는 그저 24시간이지 않다. 내내 멱살잡이를 당하는 듯했던 세 시간, 돌이킬 수 없이 삶이 방향을 튼 사흘, 맹렬히 부풀어 기어이 터졌던 석 달, 무력한 괄호 속에 묶여버린 삼 년.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지 않으며, 균질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시간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다.
그렇게 균질하지 않은 ‘어떤 시간들’이 존재한다. 그 어떤 시간들이 ‘어떠하다’고 표현하려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한 시도다. 그 곤란함을 어떻게든 감내하고 싶어지기에 더욱 곤란한 시도다. 어떤 시간들은,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이 어떠하다.
빈센트 반 고흐, 고통과 불행에게 각별히 총애 받았던 남자. 고통과 불행에 의해 아름다운 채집 샘플이 되어버린 남자. 그의 어떤 시간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어떤 시간들이 어떻게 미술사의 별이 되었는지는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예술적 합일의 열망에 젖어 애타게 고갱을 기다렸던 다섯 달의 시간, 숨 막히는 집착과 극단의 애증이 뒤범벅된 두 달 남짓 동거의 시간, 매정하게 버림 받은 이별의 시간, 칼로 베어낸 제 귀를 매춘부의 손에 쥐어주던 시간, 결국은 자진해서 입원하기를 청했던 정신병원에서의 시간, 동생 테오에게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겠다 호언하고 그 몇 줄 아래 생활비가 떨어져간다고 편지를 쓰던 시간.
반 고흐의 어떤 시간들 중 가장 어떠하다 표현하기 어려운 시간은 그의 마지막 시간일 듯하다. 권총으로 제 가슴을 쏴 자살을 시도, 그러나 즉사(卽死)하지 못하고 평생의 고통과 불행을 낱낱이 되새기며 몸부림쳐야 했던 이틀의 시간. “나는 왜 이렇게 모든 일에 서툴지, 총 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니 말이야”라는 말을 남겨야 했던 최후의 시간.
시인 김수영의 어떤 시간들도 있다. 그의 어떤 시간들이 다시없을 시가 되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굴종과 환멸과 유예의 시간, 뜨겁게 푸르던 혁명의 거리에서의 시간, 생활을 위해 닭을 기르며 강바람 속에 시어를 다듬던 시간. 그보다 먼저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의 시간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 김수영은 일군의 문인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간다. 굶주림과 구타와 강제노동과 의용군 군사훈련의 시간, 살인마 폭군처럼 발광하는 시간. 몇 개월 뒤 김수영은 탈출을 감행한다. 민간인 옷을 구해 입고, 총과 군복은 산 속에 파묻고, 미친 듯이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 인민군에게 체포된다. 총살을 면하기 위해, 자신이 의용군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땅 속에 파묻는 총과 군복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운 산 속을 꼬박 사흘 밤 사흘 낮 헤맨 끝에 김수영은 파묻었던 총과 군복을 찾아낸다. 훗날 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간.
“내가 6․25 후에 개천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 북원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 내수성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 사흘 동안에 김수영이 흘렸을 땀, 얻어맞았을 뺨, 공포에 질려 괴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더듬어댔을 거짓말. 흙과 피가 새카맣게 맺혔을 손톱 밑. ‘꿈’처럼 총살을 면한 김수영은 다시, 탈출을 감행한다. 그 시간은 당연히 어떤 시간들이다.
과연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지 않고, 균질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균질하지 않은 ‘어떤 시간들’이 어떠하다고 표현해보려, 예의 시간을 애써 찾고 느끼고 되새기고 재구성하는 깊은 밤의 어떤 시간. 헛손질의 안간힘, 접신(接神)한 자가 겪는 무병(巫病)과도 같은 통증, 진실의 무서움, 무서움의 아름다움. 모든 글 쓰는 자들의 ‘어떤 시간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