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속도의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미(美)로 풍요로워진 세상의 위대함을 인정한다…… 투쟁 속이 아니라면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관념들……” 최근 한형곤 교수가 쓴 『이탈리아 문학의 연구』를 읽다가 눈여겨 본 대목에서 그냥 마음 가는대로 인용해본 구절이다. 1909년 미래주의 문학의 선언문 가운데 등장한다. 또한 매너리즘을 설명한 대목에서 요즘의 한국시의 현상과 겹치어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본연의 자질을 소유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보이기를 원하고 보통의 것과 구분되기를 탐하는 것이 매너리즘”이라는 인용이었다. 암튼 요즘 그런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다. 나는 미래주의도 황혼주의도 아닌 것 같고 아니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오직 시인이기를 바란다.
시의 주제에 어떤 주장을 내포하고 있는 시를 써야 할 때가 있다. 주장이라기보다 기실 비명이라고 해야 옳다. 비명을 지를 때면 목에 힘을 빼고 저 깊은 곳으로 부터 차오르는 노래를 끌어 올려 보려고 한다.
<속치마>만 입고 이 글을 쓰니 참 즐겁다.
속치마
나의 속치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보이는 바다의 다락방이다 숨 쉬는 야생을 감싸는 어지러운 커튼이다 속치마 속에 젖통 아닌 전통이 숨 쉬는 것을 너는 아는가 레이스로 지은 아름다운 암컷들의 숙소 긴 속눈썹들이 출렁이는 비밀의 파도를
사과는 춥다
수사관 앞에 사과가 놓여있다 큰 집은 춥다 가을에 그걸 알았다고 한 시인*처럼 사과는 입술을 오도도 떨었다 수사관의 칼이 피부에다 날카로이 칼집을 내자 이내 속살이 드러났다 사과는 시처럼 그냥 맛있게 먹고 나면 거기 비타민 C까지 먹는다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는데 수사관이 껍질을 찌르자 시금털털한 과즙과 군데군데 피딱지가 전부였다 시장에 섞이지 않고 간빙기의 과일처럼 얼어 터지며 표표히 허공을 숨 쉰 결과가 이것인가 “이건 뭐요?” “평생 모은 원고료요” 평생과 원고료가 동의어처럼 나뒹굴었다 숫자처럼 맑은 시는 없다 수사관은 남루의 숫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쏘아보았다 진딧물이나 앵무새가 쪼지 못하게 속살에 저장한 신선한 햇살 언어가 투명하게 드러났다 뼈 조각 하나 없이 소멸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빌딩 사이로 걸어가는 달처럼 한 시인이 허공에 걸려있다
*하우게; 노르웨이 시인
따라라는 이름의 토불들
서울의 쓰레기통에는 따라*라는 이름의 토불(土佛)들이 나뒹굴고 있다 따라(多羅)! 눈물에서 태어난 딸 영원한 소녀들 비명 지르고 있다 * * * 지난해 서울을 떠난 갈색머리 셀른도 아직 거기 있다 시를 쓰고, 영어를 가르치던 이방의 친구 초여름 한 밤 택시 타고 가다가 택시기사에게 폭행당한 뒤 크리넥스에 증거를 얼른 닦아들고 지혜롭게 파출소로 뛰어간 여자 하지만 파출소에서 증거물 얼른 받아 보존하질 않고 속으로 킥킥 조롱을 숨기며 “옷차림이 너무 야했던 거 아냐?” “너도 좋았으면서 뭘”하는 표정으로 영어 서툰 척 골치 아픈 일 생겼다는 듯 늑장 부리자 증거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지고 서울을 떠나버린 여자 지금도 슬픈 스러트* 크리넥스 휴지가 되어 장자연*의 유서와 함께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 * * 서울의 쓰레기통에는 눈물에서 태어난 딸들의 비명이 있다
*따라(Tara 多羅 觀音);범어(梵語)에서 유래한 딸의 어원 *스러트(slut): 잡년 *장자연 ;출연을 미끼로 하는 성 상납을 고민하다 자살한 여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