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최치언 희곡「미친극」

이야기꾼이 나왔구나, 최치언의 희곡 「미친극」을 읽고 난 첫 소감이 그러했다. 난 이 희곡을 읽는 동안 남루한 나의 일상과 사랑의 비탄이 떠올랐고 욕망, 독단, 좌절, 창조, 권력, 충돌, 파괴, 구속, 인내, 복종, 섹스 등의 세속적 언어들이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각 장면 장면이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막이 오르면 여자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고 남자는 침대에 누워 여자를 보고 있다.

여자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야요?
남자 - 오늘은 화장이 너무 야하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소?
여자 - 무슨 말씀?
남자 - 뭔가를 하는 사람은 화장을 하는 여자와 같소. 온 정신을 다해 거울 속 자신만을 들 여다 보오. 남자가 아무리 재촉을 하고 다그쳐도 여자는 꼼꼼히 바르고 문지르고 그리오. 그것은 얼굴위에 또 다른 얼굴을 얹는 것이오. 진창 속에서 연꽃이 피듯 화려한 외출은 그렇게 시작되오.

1930년대가 떠오르고 이상의 소설 「날개」가 떠오른다. 하여튼 강한 여운과 함께 급발진 하는 이 희곡은 우리들을 점점 광풍, 광란, 광기로 몰고 간다.

「미친극」은 두 개의 희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연출가가 쓰고 있는 희곡이다. 여기엔 술집 여자와 그녀의 남편인 극작가가 나온다. 이들 부부 사이에 사채업자가 끼어든다. 사채업자는 술집 여자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 받지 못하자 차용 계약서에 따라 술집 여자의 남편이 된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불편한 동거는 이렇게 시작된다.

다른 하나는 극작가가 쓰고 있는 희곡이다. 여기엔 연극 연습중인 연출가와 배우들이 등장한다. 여기에도 사채업자가 나오는데 사채업자는 연출가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가 받을 길이 막막해지자 연출가가 제기에중인 연극에 받을 돈을 투자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희곡의 내용에 사사건건 간섭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개의 희곡이 서로 겹치며 충돌한다. 연출가가 쓰고 있는 희곡과 극작가가 쓰고 있는 희곡의 장면들이 서로 겹치고, 극작가와 연출가의 캐릭터가 겹치고, 사채업자와 또 다른 사채업자가 겹치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의문에 의문이 겹치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미쳐가는 것이다. 극중 캐릭터가 미쳐가고 이 걸 연습하는 배우들이 미쳐가고 연극이 미쳐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친극」인 것이다.

무대 한가운데 있는 나무를 작가와 연출가는 감나무라 하고 사채업자와 배우들은 배나무라 한다. 소품으로 사온 총을, 누구는 진짜 총이라 우기고, 누구는 장난감 총이 맞다고 한다. 극의 종반엔 장난감 총이 실제로 발사되며 사채업자에 의해 연출가가 죽고 만다.

「미친극」이 이렇게 끝나나 싶을 때쯤 마지막 반전이 또 이루어진다. 두 개의 희곡은 제3의 작가인 어느 여성작가가 구상중인 스토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아마도 나의 짧은 소견으론, 최치언의 「미친극」은 현실과 무대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이런 것을 말하려 했던 듯 싶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연극이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시대는 가고 있는가?’ 이 같은 관념적인 질문에 대해 「미친극」은 전혀 관념적이지 않은 답을 해주고 있었다. 관념적이기는 커녕 재미라는 틀 안으로 관념을 끌고 들어와, 한 판 걸판지게 놀아보자는 심산으로 기이하면서도 생경한 체험을 신명나게 선동케 하는 것이었다. 분명 본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무거운 주제를 입심 좋은 이야기꾼처럼 광기와 장난을 섞어가며 재치 있게 풀어내고 있었으며 다음 장면을 궁금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잘 짜 여진 코미디처럼.

그리고 「미친극」의 또 다른 매력은 문장의 격이었다. 최치언의 문장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고 쉽고도 깊이가 있었다.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감성적인 영상언어에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최소한 최치언은 자기주장이나 철학을 지루하거나 재미없게 풀어낼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 점이 내겐 아주 좋게 느껴졌다. 극작가에게 있어서 지루하다는 건 최고의 악평이니까. 문장의 격과 이야기꾼의 면모를 갖춘 최치언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