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의 좀비 아포칼립스 장편 『창백한 말』을 읽고 나서 한국소설에서 계급 적대 등의 사회적인 문 제는 장르소설을 통해 오히려 명시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장 르소설이 사회적 적대의 문제를 다룬다거나 장르소설에서 계급갈등을 읽어낸다는 생각은 아직까지는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본격 문학비평에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낯설거나 자의적인 무리수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단선적인 선입견에 불과하다. 적어도 『창백한 말』은 단도직입적 으로 싱글맘 노동자의 ‘해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자신을 해고시킨 회사와 그것의 인격적인 화신 인 사장에 대한 그녀의 앙갚음으로 끝난다. 한마디로 노예가 주인에게 복수하는 스토리다. 스토리를 관통하는 일관된 동력을 계급 적대가 부여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니겠다. 그리고 최 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가운데 계급 적대가 서사의 동기와 문법을 이루는 소설이 얼 마나 있었는지에 대해 질문해 보면 계급 소설로서의 『창백한 말』의 의의는 충분히 강조해도 좋다.
소설의 구성적 측면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적절히 사건을 배분하고 교차하 며 전개하는 방식은 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의도의 산물로 보인다. 부조리한 현실을 묘사하고 서술하는 문장은 시종 건조한 톤을 고르게 유지하며, 어떠한 희망조차 암시하지 않고 돌이 킬 수 없는 파국으로 결말을 맺는 방식에서는 작가의 냉혹한 현실 인식마저 돋보인다. 그간 한국의 여 러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은밀한 방식으로나마 희망과 비전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전개다. 좀비들을 묘사하는 소설의 첫 문장 “그것은 파도처럼 보였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들은 시체의 의무를 다하려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었다”와 대응한다.1) 소설의 시작에서 TV에 재 현된 좀비들은 화면 밖으로 흘러넘치고, 결말에 이르면 누구도 좀비의 재난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게된다. 이 소설에 출몰하는 좀비는 그저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혐오스러운 면면을 부각시킨 비체 (卑體/非體, abject)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좀비는 『창백한 말』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 적대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우화에 필요한 장치로 선택된다. 어떻게 그러한지를 살펴보겠다. 『창백한 말』은 서울의 남북부로 짐작되는 미래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6년 전 최초로 좀 비 사태가 발생한 이후, 서울의 남쪽과 북쪽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설치된다. 남쪽은 좀비 유전자를 지닌 잠재적인 보유자와 살아있는 시체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상시적인 비상사태의 공간이며, 북 쪽은 이와 전혀 다르게 20퍼센트의 면역자가 안전을 보장받은 삶을 살고 있는 공간이다. 보유자와 면 역자라는 인간에 대한 분리는 남부와 북부라는 공간의 분리로 재배치되는데, 물론 이러한 분할은 기 본적으로는 20 대 80이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 분할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태어나면서부터 그가 좀비 바이러스의 보유자인지 면역자인지가 결정되는 미래의 시공간은 계급적이거나 신분적인 이동이 나 변화 자체가 더는 불가능해져 거의 선험적인 운명으로 각인된 현실에서 상상적으로 유추된 결과다. 『창백한 말』에서 인용해보겠다.
면역자 중 일부는 보유자를 세상에서 멸종시켜야 할 존재로 취급했는데, 그들을 통칭해서 포비아라고 불렀다.
- 37쪽
세상은 면역자와 보유자로 양분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면역자와 보유자 그리고 보유자의 운명 이 될 ‘세상에서 멸종시켜야 할’ 시체로 나뉘는 것이다. 수진의 고용주였던 석호의 말처럼 “사장과 종 업원의 순서”, 곧 “면역자, 보유자, 시체의 순서”는 결코 바꿀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이 곧 “질서”다 (226쪽). 보유자에게 미래란 다만 좀비로 더 빨리 변할 수 있는 시간에 불과하며, 현재의 삶이란 그것 을 최대한으로 늦추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수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유자인 딸의 생계와 약 값을 위해 좀비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을 제조하는 구인제약에서 일한다. 소설에 표현된 것처럼, 보유자들의 “인건비”는 “무지하게 싸다”(38쪽). 그런 그녀에게 해고란 다만 죽음의 선고가 아니다. 해 고는 보유자가 좀비로 변해버리는 시간을 재촉하는 가장 확실한 절차다. 보유자는 마음대로 죽지 못 한다. 또 죽어서도 매장되지 못한다. 소설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무덤을 뚫고 나온 시체들 덕에 매 장 금지법이 제정”(49쪽)되었다고 적고 있다.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는 오래전에 이러한 종말론적인 사태를 염두에 둔 듯이 인간(humanitas)의 어원이 매장(humando)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인간 (성)의 종말이란 그가 매장되지 못하는 때의 도래다. 인간은 죽으면, 소설에서 북쪽에 나타난 좀비를 괴롭힌 끝에 죽이는 잔인한 고등학생의 말처럼, “살처분”될 뿐이다(52쪽). 보유자는 살처분을 기다리 는 잠재적인 좀비다. 그것이 그의 존재론적인 운명이다. 그런데 계급이 존재론이 되고 운명으로 간주되는 현실은 더는 노동자와 자본가로 고착된 계급사회가 아니라, 노예와 주인이 새롭게 등장하는 신분사회로 봐야 한다. 그런데 신분적인 지배관계는 이미 종료된 중세 사회에 한정된 것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한 근대 이후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시대착오적 인 것이 아닌가. 당연히 중세 사회에서 신분은 그의 종속적인 지위에 대한 법적인 신분에 한정되는 방 식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그 누구도 법적으로 영주이거나 그에게 신 분적으로 예속된 농노의 지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금융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자본의 추상적 인 지배가 강화되면 될수록 그 추상성의 정반대의 형식이라고 할 만한 인격적인 대면을 통한 지배관 계가 새로운 분할과 배제, 위계화로 폭발적으로 귀환하는 것을 도처에서 심심찮게 목도하고 있다. 그 것은 금융자본(의제자본)의 자본증식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기호인 자본-자본‘(M-M’)의 운동이 구체 적인 사회적 현실에서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인격적인 대면으로 현상화될 때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채 권자와 채무자 간의 구별짓기와 배제, 위계화는 비물질적인 노동 사회에서 정보를 독점하는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비전문가의 구별, 국민국가 안에서의 시민과 사회적 소수자의 구별, 국민국가 안팎의 시 민과 난민의 구별, 자본의 유동에 따른 국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의 현상적인 구별들로 끊임없이 재현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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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 최민호, 『창백한 말』, 황금가지, 2017, 9쪽, 323쪽. 앞으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를 표시한다. 2) 슬라보예 지젝, 「의제자본과 인격적 지배의 귀환」, 정용택 옮김, http://fabella.kr/xe/blog11/83489, 2018. 6.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