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터스텔라>를 볼 때였다. 표를 늦게 사는 바람에 맨 앞좌석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옹색스럽게 영화를 보았다. 또 다른 삶의 근거지를 찾아 사람들이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화면 오른쪽 아래쪽에 자그마한 소년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우주의 미아(迷兒)들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영화의 스토리나 배역에 그런 소년은 아예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화면 아래쪽에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작고 외로운 등이 보였다. 실재하지 않는데도 그 존재가 느껴졌고,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소리로 운 것이 아니라 몸으로 울었다. 눈물은 속수무책으로 하염없이 흘렀고,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하던 소년도 화면이 어두워지자 사라졌다. 영화관을 나왔고 곧 그 소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2013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1970년 겨울 서울로 올라와 터를 잡고 산 지 43년 만에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이사하기 전날 밤, 짐을 모두 싸두고 홀로 사당동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열한 살에 남원역에서 용산행 완행열차를 탔으니……. 지금도 남원역 대합실에서 붉게 타오르던 톱밥 난로 도라무통의 옆구리가 떠오르곤 한다. 홀로 용산역에 내려 마중 나온 어머니의 손에 끌려 도착한 곳이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바뀐 사당동 산24번지였다. 경남 함양 마천의 지리산 골짜기의 촌놈이 서울의 변두리 사당동 판자촌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렇게 사당동에서 43년을 살았고 이사하기 전날 밤, 이수역 근처의 골목을 걷고 있는데 문득 어떤 소년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인터스텔라> 속의 그 소년이었다. 소년은 내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넌 누구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만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과 나 사이에는 깊은 시공간이 있었고, 그 사이로 실재의 사람들이 오고갔다. 소년은 울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골목 중간에 서서 50대 중반의 남자 홀로 꺽꺽거리며 울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부끄러워 벽에다 이마를 붙이고 울었다.소년은 나의 이런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가!” 한참을 울다가 소년에게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너 해가 흘러갔다. 그 사이사이에 소년은 잠깐씩 나타나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사라지곤 했다. 얼마 전 회의가 있어 광주에 갈 일이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저녁 무렵, 일몰 속에 잠긴 옛 전남도청을 보고 있는데 또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나를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걸었다. 나는 소년의 뒤를 따랐다. 소년은 나보다 먼저 기차에 탔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소년과 함께 차창에 눈길을 던졌다. 기차가 속도를 내며 달려가자 차창 밖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뒤로 멀어졌다.

뒤로 멀어지는 풍경과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 그리고 소년……. 문학이 내게 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소년은 풍선이 터지듯 바람처럼 스러졌지만 내 감각 안에서는 아주 또렷한 형상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작품을 써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새로 쓰고자 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그러나 소년이 아니다. 소년은 내 문학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런데 왜 소년은 자꾸만 나를 찾아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것일까? 이유도 묻지 않고 해답도 찾고 싶지 않다. 소년이 내게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