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 ㅣ 시인, 1980년생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등
작은 방을 버린 나는 더 작은 방을 얻었다. 더 작은 방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름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 열기를 어쩌지 못한다. 보내지도 가둬버리지도 못한다. 뜨끈해진 방바닥에 앉아서 글월놀이나 하고 있는 나는 덥다고 투덜거리기나 하고 있으면서 대단한 일을 꿈꾼다. 이것이 슬픔이다! 슬픔은 언어와 현실 사이 양(洋)나팔꽃 줄기처럼 빙빙 돌면서 자라난다.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 택시 안에서 K에게 존재하는지 마는지 모를 K에게 이제 명확한 것들을 쓰겠다고 말했다. K는 물었다. 명확한 것이 뭔데. 들리는 것 보이는 것. 나는 대답 끝에 웃었다. K는 딴짓을 하면서, 뭐든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좋네, 그랬다. 나는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말하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것은 명확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것을 쓰지 않을 것이다. 쓰지 못할 것이니까. 둘의 차이는 있으니만 못하다. 나와 K의 사이처럼. 이것이 나의 차례. 빈 테이블에 올려 있는 나의 서사.
이것이 나의 차례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 거리 아직 우산을 접지 않은, 우산도 접는 것 도 잊고 소리 내어 웃고 있는 남녀가 있다 통화 도중 성을 내고 끊은 둘째 동생이 있다 (너의 옆에는 무엇이 살고 있니) 나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어 드러낸 맨살 만진다 닿음과 닿음 사이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거기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것이 나의 차례 그것이 나의 기회 肉도 骨도 얻지 못 한 나의 한계를 생각한다 설명도 조립도 되지 않는 의심과 희망은 알아서 잘도 자라난다 여전히 덥고 그저 덥다 쓸모가 없이 물기 먹은 한여름보다 더 가문 손금이 말라가는 모양을 숨기는 더는 비가 내리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더위를 쓰고 덮고 있다 말라가고 있다 의미를 지우며 열심히 다음으 로 걸어가 다음을 걷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