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상(1910~1937)은 시, 소설, 수필 등에 걸쳐 두루 작품활동을 하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날개」는 매춘부 아내에게 기생하며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나’의 일상과 의식을 ‘위트와 파라독스’로 그려냅니다. 그로부터 82년이 지난 오늘 이승우 강영숙 최제훈 김태용 임현 박솔뫼 등 여섯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으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초상을 새롭게 표현합니다. 이상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 「날개」 줄거리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33번지 유곽에서 아내 연심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해가 들지 않는 내 방(윗방)에서 낮이고 밤이고 잠을 잔다. 아내가 없을 때는 아내가 사용하는 아랫방에서 화장품 병들과 돋보기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며 아내의 체취를 느껴보기도 한다. 아내는 밤낮으로 외출을 하고 밤에는 내객을 데려온다. 내객들은 장지 저쪽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는 채 아내와 좀처럼 하기 어려운 농을 서슴지 않고 던진다. 아내가 내객과 함께 있는 시간, 대개 정오에서 자정까지는 아랫방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 규율만 잘 지키면 아내는 밥도 가져다주고, 은화를 저금통에 넣어 준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바깥으로 나와 그동안 쌓인 은화를 지폐 5원으로 바꿨다. 그러나 돈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다 피로에 지쳐 자정이 못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내객과 함께 있었으나, 윗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랫방을 지나갈 수밖에 없어 하는 수없이 헛기침을 하고는 아내의 방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객을 보내고 노기에 차 있는 아내에게 나는 5원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33번지에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내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남에게 돈을 쥐어 주는 쾌감을 알아낸 것 같아 다시 단벌 골덴 양복을 걸치고 거리로 나섰다. 이번에는 경성역 대합실 옆 티룸에 들러 커피도 마셨다. 이곳은 어느 곳보다도 정확한 시계가 있는 곳이다. 이따금 들리는 우렁찬 기적 소리는 모차르트의 음악 소리와도 같다. 그러나 티룸은 열한 시가 조금 지나 문을 닫았다.
어디에서 자정을 넘길까 걱정을 안고 거리를 나섰는데 굵은 비가 온다. 우비도 우산도 없이 길을 걷다가 오한을 견딜 수가 없어 결국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노크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방에 들어선 나는 내가 보면 ‘아내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고 말았다.
아내는 감기가 걸린 내게 약을 준다. 아스피린인가 싶은 약을 먹고서는 으스스 춥고 골치가 아파서, 또 졸음을 견딜 수 없어서 나는 몇 날 며칠 밤낮으로 잠을 잤다. 감기가 다 나은 것 같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외출을 하지 말라며 아스피린을 주었다. 아마 한 달쯤 이렇게 지내다가 머리와 수염이 너무 자라서 견딜 수 없게 되어나는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아내의 화장대 앞에 앉아 보았다. 그리고 최면약 아달린갑을 발견하였다. 열어 보니 꼭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 네 개의 아스피린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 산을 찾아 올라갔다. 양지 바른 자리에서 아내에 관하여,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기 위해서이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고 곧 심술이 나 아달린 여섯 개를 한꺼번에 먹고 일주야를 벤치에서 잔 나는 정작 아내가 근심되는 일이 있어 아달린을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이내 이렇게 큰 의혹을 품은 것이 미안하여 아내에게 사죄하고자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그만 또 노크를 잊고 방문을 열었다.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는 불쑥 나와 내 멱살을 잡고 내 살을 물어뜯었다.
줄달음질 쳐 집에서 나와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 몇 시간을 쏘다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 것인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때 뚜우하고 정오의 사이렌이 울렸다.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머릿속에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번뜩였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