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넘실대는 여름 나무들을 바라보며 Ustad Vilayat Khan의 음반을 들었다
저런 음악에 악보가 있을 리 없다
거대한 존재의 흐름에 악보 따위가 있을 리 없어
저것은 그저 그때그때 생겨난 조건에 따라 흐르는 것이어서 그 도도한 흐름 속에서 몇몇 생명이 들고 나는 자리 같은 건 눈에 띄지도 않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뒤섞으며 흐르는 저것은 깨지지 않아
그런 생각에 한참을 잠겨 있다가 네가 부르는 소리에 그만 깨어나고 말았다
깨어났다, 깨어났다
깨어나도 그 흐름은 여전히 내 눈앞에서 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 홀로 동시에 저들 모두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고구마의 말

신기하다
신문지로 돌돌 말아 놨더니
싹이 난 고구마를 반으로 잘라
물속에 담가 뒀을 뿐인데
웅크리고 있던 보랏빛 핏줄들 밖으로 튀어나오고
고이 접혀 있던 연둣빛 심장들 주르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최첨단은
여기저기서 바닥을 기다 말고 위로
벌떡! 일어나
위에서 누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있기라도 하듯
허공에 손톱 열 개를 모조리 박아 넣고 있기라도 하듯
고요히 거기
정지해 있어
잘린 고구마 아래는 둥글게 뭉쳐진 뿌리로 가득해
그건 꼭 새집처럼 보이고
그러면 고구마 줄기에 줄줄이 매달린 잎사귀들은 다시
새집이 키워 내 하늘로 뻗어 올린
저마다 활짝 펼쳐진 날개들로 보인다
싹이 난 고구마는 그냥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물에만 담가 놓아도 번성한다
새절역 앞에서 늘 단내 풍기는 화로 속 군고구마는 누려보지 못한 경지
처음에는 귀엽더니

너무 많이 자라니까 징그럽다고
그건 사람이랑 똑같다고
고구마를 물속에 집어넣은 장본인이신 김 여사께서는 말씀하시지만
나는 오늘 이 고구마 옆에 배 깔고 누워
무엇보다 하루 종일 번역했던 그 세계명작보다 더 감탄하며
예전에 주워 왔다 잃어버린 작은 새집이 고구마 뒤꽁무니에서 다시 자라
나온 걸 보고
고구마가 첨탑처럼 들어 올린 위세 등등한 세 첨단을 본다
고구마는 여전히 말이 없지만
나는 저 새집과 첨탑을
고구마의 말로 듣는다
고구마가 뱉어낸 말은 고구마보다 부피가 크고
고작 고구마의 말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해
보랏빛 혈관 속 피는 당최 연해지려 들질 않고
고구마는 다시 혈관을 거둬들이는 일이 이젠
무리라는 걸 안다
이제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걸
다시 예전의 단단하고 심플한 고구마로
되돌아갈 순 없다는 것도
보라, 일이 이렇게나 커져 버렸다!
이제 물이 없으면 아쉬워질 것이다
햇볕이 들지 않으면 아쉬워질 것이다

고구마는 어제의 고구마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안다
그래도 고구마는 첨탑을 떨어뜨리지 못해
끝까지 들고만 있고
고구마야 고구마야
아파트 거실 한구석에 대자연을 모셔 왔구나
대성당으로 자라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구나
이렇게 할 말이 많았으면서
그동안 혼자 참고만 있었다니
구워지고 튀겨지고만 있었다니
그리고 그건 하나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고구마야 고구마야
너의 그런 묘기와 발악과 경건함이
정말이지 나는 하나도 안 신기하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너무나도 신기하고 하나도 안 신기한 이 토막 난 삶을
정말 어쩌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