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커피」 전문

아버지는 양양군 도촌면 논산리(지금은 속초시)에서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너무도 가난한 집안을 꾸려 나갈 수 없어 가솔을 이끌고 함경북도 마천령 용솟골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주하셨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셨는지는 아버지의 대표시 중 「어머님의 아리랑」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함경북도 마천령, 용솟골 / 집이 있었다. / 집이라 해도 십 분의 4는 집을 닮고 / 그 남은 6은 토굴이었다.
// 어머님은 / 봄 산에 올라 / 참꽃(진달래)을 한 자루 따다 놓고 / 아침과 점심을 대신하여 / 왕기에 꽃을 담아 주셨다.(중략)

그때 그 시절 아버지는 할머니와 더 없이 애틋한 정을 나눈 시절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시 곳곳에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으니까요.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내신 아버지는 그곳 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하여 많은 책을 접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모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잠을 쫓으며 공부하던 일본 동경에서의 유학시절 중 춘원 이광수 선생님을 만나면서 꿈은 현실이 되었고 많은 습작을 하셨습니다. 그때 공장에서 왼손 약손가락 끝마디를 잃으셨다며 웃으시던 아버지. 힘든 유학시절 가장 행복한 때는 어렵게 구한 커피를 마시며 같은 처지의 유학생들과 문학에 대한 토론을 할 때였다고 회상하셨습니다.

고향 양양으로 돌아와서는 화일리의 작은 마을 간이학교(4년제)에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천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는 학생들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당장 우리글로 된 책이 없어 6명의 교사들이 밤샘해가며 가리방을 긁어 프린트한 우리말 책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삼팔선 이북이었던 양양은 공산당 창립 모임에서 공산주의 유물론을 채택했고 기독교적 사상인 유심론을 가지신 아버지는 제거대상에 오르면서 삼팔선 이남인 강릉으로 탈출하여 강릉에 정착하셨습니다.
강릉농고와 강릉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후학들과 함께 활발한 문학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주재하신 동인지 『청포도』는 아마도 강릉에서는 처음 나온 시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집(관사)에 드나들며 나를 귀여워해 주시던 제자분들 중 작고하신 극작가 신봉승선생님, 시인 함혜련 선생님, 지금도 강릉에서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시인 효봉 허숙랑 선생님 등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서울 인창고교를 거쳐 혜화동 동성고교로 직장을 옮기시며 서울로 집을 옮긴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셨던 첫 시집 『현장』을 세상에 내셨을 때 거나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셔서 명동에서 박목월 선생과 한잔했지 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많은 불행을 겪으셨는데 그 첫 번째가 병중에 있던 사랑하는 딸 애리가 이화여대 졸업 20여일을 앞두고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입니다. 애리가 떠나던 날 가족이 모인 가운데 아버지가 마지막 임종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제5시집 『산새』에 수록된 「기도」라는 제목으로 탄생되었습니다,

하느님! / 지금 한 어린영혼이 / 당신이 계시는 나라로 / 떠나갔습니다. / 제 딸 애리의 영혼입니다.(중략)

그리고 몇 년 후 어머님께서 환후로 하나님 곁으로 떠나셨을 때 출타 중인 나에게 슬픔 가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울렸습니다.

“애비야! 엄마가 하나님 곁으로 갔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명보극장에서 “황야의 7인”이라는 영화를 아버지와 함께 보고 오셔서 그렇게 행복해 하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어머님에 대한 사랑은 말과 행동이 아닌 마음과 영혼으로 표현되어 시집 『현장』에 수록된 「바느질하는 손」에 잘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정이 넘는 시각에도 아내는 / 바느질을 하고 있다(중략) //
손마디가 굵은 아내의 손은 / 얼음처럼 차다 / 한평생 살면서 위로를 모르는 내가 / 오늘따라 면경을 본다(중략)

2009년에는 같은 시인의 길을 걷고 있던 맏아들 황도제 시인을 잃고 망연자실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 형님 황도제 시인의 「고별」이라는 시를 보시면서 더 애통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자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봅니다. / 가만히 손도 잡아 봅니다. / 사랑이 따스하군요.(중략) // 어린놈도 함께 우는군요. 용서해 주세요. / 변명과 이유는 구차스러워 접습니다. / 이제 고별입니다.(중략)

모든 슬픔을 감내하시며 한평생을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며 시를 쓰시다 하나님께로 소천받으신 아버지! 같은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시던 아버지, 시란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 커피를 마실 때가 늘 즐겁다고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와 마지막이 된 그 커피를 마시면서 하신 말씀조차 한 편의 시였습니다.

아버지! / 커피 한잔하셔야지요. // 좋지 // 이 커피가 애비와 마시는 / 마지막 커피구나. // 마지막 커피라도 / 난 / 참 행복했다. // 애빈 천사야 // 우리 하늘나라에서 / 만나자.

한없이 그리운 아버님! 이제 일주기가 되어 둘째 아들도 아버님께서 바라시던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