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 강이가 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 장 큰 효도는 부모를 뛰어넘는 ‘승어부(勝於父)’인 데, 진짜로 효도를 받은 거죠.” 한강 소설가의 아버지인 한승원 소설가는 3월 산 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 이날 한강 의 『흰(The White Book)』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 13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질문의 절반 이상은 한강 작가에 대한 내용이었지 만 한승원 작가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신명이 가득 했다. 부모는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존재라 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 순간이었다. 강보, 배내옷, 달, 쌀, 수의 등 세상의 하얀 것 들에 대해 시 소설 에세이의 형식을 섞어 쓴 『흰』 은 이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 에 올랐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로 2016 년 이 상을 수상한 지 2년 만이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작가 특유의 낮고도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들 리는 듯한 『흰』이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판매량은 평소의 100배 이상으로 급 증했다. 이번에도 데버러 스미스가 번역을 맡았다. 한강 작가는 2년 전 그랬듯이 이번에도 침체된 한 국 문학에 힘을 불어넣는 낭보를 전했다. 영화 개봉도 소설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 다. 베스트셀러인 『7년의 밤』(정유정), 『나미야 잡화 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은 동명 영화가 상영되 자 판매에 가속도가 붙으며 순위가 껑충 뛰었다. 덕 분에 올해 1월 출간한 소설 『연애의 행방』(히가시노 게이고)도 함께 주목을 받으며 반가운 ‘동반 역주행’에 합류했다.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기적
같은 사랑을 그린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치카와 다쿠 지), 자유로운 스물네 살 남성 철학 교수와 피아노, 책에 빠진 열일곱 살 소년의 사랑을 섬세하 게 그린 『그해, 여름 손님』(안드레 애치먼) 역시 영화 개봉으로 관심이 높아졌다. 위안을 주는 에세이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삶에 지쳐 마음의 토닥임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 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곰돌이 푸가 전하는, 자그마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조언을 담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곰돌이 푸 지음)는 3월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사랑 을 받았고 이내 주요 대형 서점에서 판매 1위를 휩쓸었다. 곰돌이 푸의 강세는 캐릭터의 힘을 보 여준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 『보노보노의 인생 상담』(이가라시 미키오) 등은 어릴 때부터 접했던 익숙한 캐릭터에 마음을 열고 삶의 지혜와 행 복을 느끼는 방법에 귀 기울이는 독자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달콤하면서 보드라운 위로의 말을 담은 에세이 『모든 순간이 너였다』(하태완)도 강세를 보였다. 『언어의 온도』(이기주)는 판매 량 100만 권을 돌파했다. 위안이 필요한 현대인들은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의 방패를 준비할 필요도 있다. 『무례한 사람 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정문정),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나이토 요시히토), 『신경 끄기 의 기술』(마크 맨슨) 등 제목만 봐도 마음을 무장하게 만드는 책을 집어 드는 독자들이 많았다. 『구름빵』, 『이상한 엄마』, 『알사탕』 등으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의 신작 그림책 『이상한 손님』도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로 곧바로 진입했다. 늘 툭탁거리는 남매 앞에 나타난 길 잃은 꼬 마 손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따뜻한 이야기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의 마음도 사로잡았다는 평 가를 받았다.
방송이 출판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tvN 예능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에서 출연자가 읽었던 『죽는 게 뭐라고』(사노 요코)는 방송 직후 판매량이 100배 가까이 급증했다. 사노 요코가 쓴 『사는 게 뭐라고』, 『친구가 뭐라고』, 『이 것 좋아 저것 싫어』 등에도 독자들의 관심이 확대되고 있고, 『요코 씨의 말 1·2』도 발 빠르게 출 간됐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또 다른 책 『파리의 아파트』(기욤 뮈소)도 판매가 4배 이상 늘었 다. 이런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유명 연예인이 자사의 책을 읽거나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게 만들기 위해 출판사 관계자들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며 고심한 지는 오래됐다.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은 소설책을 넘어서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여성 아이돌 그 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은 한 방송에서 이 책을 읽었다고 밝혔다가 일부 남성들로부터 페미 니스트 책을 거론했다며 집중 공격을 받은 일까지 발생할 정도였으니. 논란이 불거지면서 책 판 매량이 다시 상승했음은 물론이다. 한편 다양한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눈에 띄는 이른바 ‘굵직한’ 신간은 줄어든 것 같다. 동아일보 서평면인 ‘책의 향기’에 쓸 책을 정하는 회의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을 보며 이를 느낀다. 톱기사로 쓸 책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톱 거리용 책 가뭄에 허덕이다 고심 끝에 결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한 해 한 해 가 다르게 갈수록 심화되는 듯하다. 출판 시장이 위축되는 가운데 올해는 남북 정상회담, 미투 운동 등 파급력 큰 사회 이슈가 이어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출판계도 사회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신간이 좀 더 자주 등장해 활기를 불어넣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