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뒤에 봄이 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맨 처음 겨울을 겪어 본 이는 그 뒤에 찬란한 생명의 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극적인 반전을 궁금해 하며 가만히 겨울을 바라보니 생명이 사라진 줄 알았던 땅에 올라온 푸른 보리싹들이 보입니다. 삭막해 보이던 겨울 역시 그 안에 여전히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들을 가만히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겨울을 보 며 함부로 ‘끝’을 떠올린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이번에는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기보다는 가만히 다가가 그 안의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리라 다짐해봅니다. 그것이 겨울이든, 사람이든.
────── 광화문글판 선정회의 ──────
2018년 겨울편 문안 선정을 위한 인터넷 공모와 선정위원들 의 추천을 통해 총 32편의 후보문안이 올라왔다. 총 7명의 선 정위원(박웅현 TBWA KOREA 대표, 신준봉 중앙일보 문화부 부장, 이승우 소설가, 진은영 시인, 윤상철 교보생명 고문, 김 성한 교보생명 전무,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 이를 대상 으로 투표와 토론을 거쳐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 와 정순재 작가의 에세이 『다 그렇게 산대요』 중 일부를 최종 문안후보로 선정했다. 이어 교보생명 브랜드통신원의 선호도 조사와 내부 논의를 종합하여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겨울 문 안으로 최종 결정했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