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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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에게 학림다방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른바 역사와 추억을 간직하고 쌓아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과의 단절을 조건으로 하는 듯한, 조금은 불편하고 낯선 장소가 되었다.그곳이 어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혼자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자리

네 명 중에 한 명이 혼자 사는 시대라고 한다. 지금은 2인 가구가 가장 흔한 형태라고 하지만, 20년 후면 1인가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구의 형태가 될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살아가는 형태가 그 시대 삶의 방식과 감각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부정할 수 없이 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 중 대다수가 ‘혼자’이기를 선택하고 있다. 이 선택에는 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통계적인 방식으로는 수렴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다양한 문제들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떠안고 가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그 문제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그 고민들이 없었대도 과연 사람들은 예전처럼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갈까. 사람들은 누구나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티비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까.

작년 겨울이었다. 이틀 후면 새해를 맞게 되는 날이었다. 거리는 온통 연말 분위기로, 연인과 가족의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곳이 각종 공연과 행사가 즐비한 대학로였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근처에서 누군가와 만날 일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나온 참이었다. 어디에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을지 잠깐 고민했다. 거리는 추웠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었으나 언제나 북적이는 유명 카페로는 선뜻 발길이 향하지 않았다. ‘학림다방’이떠오르자마자 그리운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 듯, 그 이름이 반가웠다. 어쩐지 그곳에는 따뜻함과 조용함이 고여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분주한 때와 장소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미술관의 정물처럼 고요하게 놓여 있기를 바라고, 그처럼 역설적인 바람이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오래된 건물의 2층에 위치한 학림다방으로 들어가려면 좁고 낡은 나무 계단을 눌러 밟아야만 한다. 그 계단을 오르다보면 왼편에는 성당 같은 데에서나 볼 법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작은창문이 있고, 그 창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그림에는 피리를 부는 남자가 한쪽 다리를 허벅지까지드러내고 웃고 있다. 왠지 나무 계단 하나에 십 년 정도의 시간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을 밟고 오르며 그 벽의 수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나긴 삶을 통과하는 느낌이 든다. 마침내 나무 계단을 다 올라 그 끝에 놓인 유리 격자 미닫이문을 밀거나 당겨서 들어가면 눈앞에는 아주 고전적인 실내 풍경이 펼쳐진다. 누구나 그 순간에는, 나무 계단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기분으로 그 풍경 속에 한 발을 내디디며 어떤 특별한 시간 속에 제 몸을 미끄러뜨리게 되는 것이다.
얼핏 봐도 낡은 소파와 테이블. 그 각각의 자리를 나누어 놓은 낮은 울타리들. 빈자리가 있나 싶어 한번 올라가 훑어본 게 전부인, 침침한 다락층의 낮은 천장. 마로니에 공원을 향한 커다란 유리창과 벽마다 붙어 있는 유명한 음악가의 초상들. 커피를 내리는 쪽 수납함에 빽빽이 꽂힌 LP. 보기만 해도 마음이 그윽해지는 고운 찻잔들. 벽에 붙은, 예전 다방의 모습과 그곳을 둘러싼 풍경, 그리고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 무엇보다도 시간이 고인 듯 느리게 흐르는 그곳에 가득한 커피향과 음악과 적당히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말소리. 그런 것들은 그날도 여전했다.

달랐던 것은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누군가는 출입구 쪽에 선 채로, 누군가는 여분의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의 순번을 헤아리며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커피를 나르던 아르바이트생이 이제 막 들어선 나에게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둘이거나 셋이거나 넷이거나, 일행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그 곳에서는 나만 혼자였다. 딱히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기에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했다. 정말로 삼십 분 정도가 지나자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라 그가 안내하는 내 자리로 갔다.
내가 앉아야만 했던 자리는 기다리던 많은 이들이 순번을 헤아리던 중에도 거듭 눈길을 주던,누구나 탐내던 구석진 창가 자리였다. 게다가 그 자리는 널찍한 테이블이 놓인 6인석이었다. 선뜻앉기가 민망해 다른 자리에 앉으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규정상 순서대로 앉을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앞에서 자리를 배정받은 한 커플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코너에 있는 좁은 이인석에 앉아서 아쉬운 듯, 부러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6인용 테이블 앞에 엉거주춤 서서 저들과 자리를 바꿔주어도 되지 않겠냐고 묻자 아르바이트생은 더 대답하기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대꾸도 없이 그 자리를 떴다. 한겨울 늦은 오후의 환한 햇살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가 내 자리였고, 자리를 앞에 두고 내내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 학림다방

커피를 주문하고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냈다. 책을 읽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 넓은 책상에뭐라도 펼쳐 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커피가 도착하기 전 6인용 테이블 위에는 얇은 시집 한 권과그것을 펼쳐 든 내 두 손, 얄팍하게 비쳐 드는 겨울 햇빛과 빛을 따라 들어온 나뭇가지의 앙상한그림자뿐이었다. 성급하게 마신 비엔나커피는 뜨겁고 썼다. 가장 귀한 자리에 홀로 앉게 된 나는 마치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들어선 이름 없는 방문객처럼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날 궁리만을 했다. 결국 삼십 분을 기다려 차지한 자리에서 나는 삼십 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 학림다방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른바 역사와 추억을 간직하고 쌓아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과의 단절을 조건으로 하는 듯한, 조금은 불편하고 낯선 장소가 되었다. 그곳이 어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혼자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학림다방은 나에게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가령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믿음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관계들, 독립적인 삶의 방식을 지지하는 가족 등 개인을 괴롭히는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할까. 그처럼 함께있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때 사람들은 공평하게 행복할까. 왜 사람들은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의 눈동자를 확인하고 입술의 들썩임을 관찰하고 따뜻하고 달고 쓴 것들을 나눠 마실까.
당연하게 생각했던 물음들이 그 넓은 테이블 위에 찍힌 이름 모를 자국, 얼룩들에서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