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를 써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장래희망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불쑥 시인이 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드물었고, 나 자신도 내가 사용한 어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학자와 교수가 되겠다는 다짐은 없었다. 시를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시 모교에 돌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나는 착실한 직장인이되면 좋겠다는 타인들의 바람과 기대를 유예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안도했다.
1990년 겨울 한 선배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한 달이 지나기전에 다른 선배가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시인과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군대에 가야 했다. 대학 시절에 끄적였던, 시 같은 글 전부를 태웠다. 깨끗했다. 군대에서는 글에 관련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패했다. 작전과에서 정훈과로 강제 이직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긴 산문을 써내려갔다. 전역 6개월 전이었다.

▲ 2002년 신춘문예 시상식

97년부터 주위 동학들이 등단 소식을 알려왔다. 시 쓰는 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겼다. 영문과 출신

이었던 덩치 큰 선배가 내게 말했다. 너는 다른 시를 쓰고 싶어 하는구나. 시인이 된 선후배들을 부러워했다. 시의 어려움만 쌓이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시를 써야겠다는 의지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하면서,이용악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고 나서, 김수영 읽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시를 쓰는 시간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 열렬”(김수영, 「사랑의 변주곡」)했다. 많이 읽고 많이 썼다. 한 달에 20편 정도. 원고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과격하고 도발적이고 비서정적인 시가 등단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미등단자’라는 차별적 호칭이 지도학생 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신춘문예가 공고된다. 지금도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에 들뜬 문청들이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그때, 등단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의 가을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시인의 겨울은, 새해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시들이 많았다. 첫 시집 『아나키스트』에 실려 있는 긴 시들이 신춘문예에 당선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본선에만 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이 비등했지만 결과는 뻔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서 오전에 두 시간 이상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와 상관없는 책들. 문학사 전공 책들. 2001년 11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문장 하나가 노트에 기록되었다. 노래 부르듯이 단숨에 메모했다. 수정은 거의 하지 않았고, 제목도 손쉽게 정했다. 합평회를 같이 하던 동료들이 말했다. 예선 통과할 수 있을 거야. 나의 데뷔작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를 그 달 29일에 썼다. 

이 시는 비교적 짧은 시이다. 또, 비교적 서정적인 작품이다. 서정시라는 단어의 개념 정립과 별개로, 우리가 시적인 어떤 정서와 상황을 ‘서정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시의 감정과언어의 응축과 시·공간의 압축은 그 조건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다른 시들의 산문성에 대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시가 아니라 ‘서정적인 것’이 중요하다. 등단 후 여러 번들은 말. 가장 너답지 않은 시인데, 그것이 너를 등단하게 했구나. 맞는 말이다. ‘너답지 않은 시’에 뼈가 들어 있다. ‘나’다운 시는 어떤 것인가. 줄글의 형태를, 행과 연으로 분리되었다는 형식 지표를, 나는 ‘나답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시가 지니고 있는, 돌아보는 시선과 감정의 고요가 지극히 낯설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내가 쓴 시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 다시 그런시를 쓸 수 있다는 기대는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침묵과 적막이 들어 있었다니…… 데뷔작은 어쩌면 운명이 지정해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거창하게 무슨 운명같은 말을 하냐 싶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시는 다시 쓰지 못했고, 다시 쓸 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 아닌 사실을 흐릿하게 깨닫는 지금, 나에게는 그런 작품을 다시 써야 한다는 약속도, 쓰고 싶다는 희원도 없다. 그 작품보다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말도 거짓일 것이다. 그만한 작품이라도 한번 더…… 이런 생각도 틀렸다.

그 시가 아닌, 다른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입을 열고 있다. 닳고 닳은 서정시가 아니라, 서정적인 것의 새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 나 아닌 다른 나를 만나고 싶다. 전투적으로 시를 쓸 때, 그시절의 눈먼 열정이 먼지처럼 바스라져 사라진 지금, 내가 바라는 바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나의 육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새로움을 모색해야 한다. 저 세계의 리듬과 나의 리듬이 결합되기를 꿈꾼다. 나의 이미지가 생성하는 꿈의 세계와 현실의 이미지가 하나 되기를 염원한다. 분명한 것은, ‘수련’이 낙하하여 나에게 다가왔다는 사실. 시를 바라고 실천하고 사랑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 다른 시가 나에게 찾아올 것이다. 수련이 다시 필 것이라는 기다림, 그 행복을 선사한 그 시를 읽어본다, 다시. 영원한 가을이다.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고, 바람은 그때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피곤한 바람이다. 나는 백 송이 수련이 내뱉은 한숨이다.

햇빛이 몸을 데워 비상했고, 몸속에는 한 방울 물이 갈증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지금 구름빛이다.

나는 가볍다. 후두둑 떨어지는 붉은 열매처럼 가까운 미래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마에 떨어지는 것, 얼굴에 번지는 것

내게 쇄도하는 현기증. 그대 몸에 얼룩지는 오래된 바람, 흰 손길에 갇혀 나는 물 밑에 있고 나는 오므라들어 졸고,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고, 물 위를 지나던 나는 바람이요 장막이요, 그때 저기 부유하는 꽃잎.

-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전문 (『대한매일』 2002년 신춘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