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날 일이다. 오래전 잡힌 일정으로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대학원수업에 이어 괴테대학에서 ‘아시아에서 노동과 결혼의 이주’ 관련 국제회의로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 마침 설 명절을 맞아 전화로 문안인사를 대신했다. “아버님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터져 나오는 호통소리. “썩어문드러진 정권을 온힘으로 메쳐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어딜 외국에 나가? 엄중한 때 투쟁현장을 떠나 있는 것도 역사적 반역이야!” 통화는 그대로 끊기고 동료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좌초지종을 설명하니 아연실색 말들을 잇지 못했다.
사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매주 토요일 광화문 집회현장에 빠짐없이 동참했으며 맨 앞자리를 지키고 계신 아버님은 물론 남편과 아들딸까지 삼대가 나란히 “박근혜는 퇴진하라” 목청을 높이고청와대까지 행진을 하곤 했다. 독일에서도 괴테 동상 앞에서 교민들이 옹기종기 촛불을 밝혔을 때 달려가 함께 구호를 외치고 정권 교체와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다짐을 했건만 졸지에 피 흘리는 조국을 두고 혼자 망명길에 오른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힌 낭패스러움이라니. 며칠 뒤 귀국하자마자 다시 광화문에 나섰고 정권이 바꾼 오늘을 살지만 그때 등골 서늘함의 기억으로 올해는 아예 일체의 해외 일정을 가지지 않았다.

▲  자진농촌계몽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아버지 백기완

▲필자가 성남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다리가 부러졌던 1986년 겨울 무렵 맘판이라는 비합법공간을 열고 노동자들과 창작공연 및 임투를 준비하던 모습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런 기막힌 장면은 그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31년 전 나의 젊은 날,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성남 공단을 오르내리던 당시, 그곳 민주노조 지도부들과 상반기 공동임금투쟁계획을 세우고 나오다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에 실려 가면서 뼈가 부서진 고통보다 애써 준비한 임투를 그르칠 걱정에, 국가보안법위반 수배자 신분에 가명으로 활동 중이었으니 들통이 날 두려움에 뜬눈으로 지새운 아침 아버님이 어찌어찌 찾아오셨다.
“이제 우리 딸이 어디 있는지 알았구나.” 나의 상태를 염려하시면서도 반가움에 자리에 앉으시는데 갑자기 보안사요원들이 들이닥치고 신분확인을 요구했다. 아버님은 처녀 병실에 웬 놈들이냐고 특유의 호통으로 쫓아 보내셨지만 그로서 내 신분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니, 이제 끌려가면 싸움도 벌이기 전 박살이 날 현장과 동료들, 더구나 전두환의 보안사라니 이 꼴로 모진 고문을 버텨낼까 정신이 아득한 순간, 아버님은 준엄한 한마디로 나의 초조를 가차없이 내리치셨다.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다리가 부러지는 것도 역사적 반역이야.” 그 당장 서울 병원으로 옮겨가는 구급차 안, 조각난 뼈들이 온몸의 신경줄을 다 잡아당기는 듯 고약한 진통 속에서도 아버님의 그 역사적 반역이라는 한 말씀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세상의 가장 혹독한 뼈저림으로 나를 통곡하게 했었다.

▲  여동생 백미담의 <장산곶매> 그림마당 전시회에서 필자와 아버지

▲   아버지의 최근 모습

사실 어렸을 때부터 하도 겪어온 일이라 이력이 날 만도 하다. 그러나 환갑을 코앞에 둔 나이에 이른 지금까지 아차하면 들이닥치는 아버님의 서릿발 질정은 그 어떤 형벌보다도 무섭고 아프다.
물론 입장 차이로 논쟁할 때면 부녀지간에 추호의 양보도 없다. 밥상머리에서든 전화통화에서든신문칼럼을 가지고도 여차하면 첨예하게 맞붙는데 그 또한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단련된 결과일것이다. 요즘도 아버님이 불쑥 “올해 우리나라 예산이 얼마지? 중국의 외화보유액이 어떻게 되나?” 물어보실까 통계숫자를 꼼꼼히 외우고 부연설명까지 준비해둔다. 어영부영 우물쭈물 하다간 대학교수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길래 통계수치하나 제대로 모르냐고 바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로 정권을 바꾼 오늘도 여든다섯의 노구를 끌고 이 땅의 가장 후미진 곳 억눌린 곳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 않고 선뜻 나서시는 아버님, 당신의 하루는 이십대 젊은 날 전쟁통에 무수한 해골들로 가득한 한강변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푸른 녹화계몽대를 이끌고 나무를 심고, 수천 년 어둠에 잠긴 농촌을 일깨우고자 자진농촌계몽대를 조직하여 강원도 두메산골로 어촌으로 나서던 그때부터,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등 한평생 한결같이 끈질긴 싸움의 한복판에서 지고 샌 투사의 일생으로 오롯함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새벽이면 한겨울에도 화들짝 창문을 열며 아침을 맞고, 7시 반 두 부부가 단출하게 아침을 드시고 아홉시면 다시 길을 나서는 당신의 일상. 십년 전쯤 이제 좀 쉬엄쉬엄 살아온 일생을 정리도 하시고 백범 선생과 장준하 선생에 이어 한국 진보적 민족주의사상의 맥을 다잡는 집필작업에 몰입하시는 것이 어떠시냐고 여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나를 박물관의 유물로 박제화시키겠다는 것이냐, 오늘의 진보적 민족주의는 바로 분단독재에 맞서 통일의 단꿈을 이루고 신자유주의적착취체계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으로 노나메기세상을 일궈낼 때 그 전통을 확연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니 내가 쓰러지더라도 병원에 호흡기 달아 하찮은 목숨 연명시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일갈이 불화살처럼 바람벽에 꽂혀 깃발처럼 나부낄 뿐이었다.

무엇보다 걱정은 탈수현상이다. 중요한 싸움에 나설 때면 전날부터 물을 단 한모금도 입에 대지않으시기 때문이다. “늙은 내가 오줌이 마려워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건, 여럿을 힘들게 하는 일이잖아.” 당뇨 때문에 가뜩이나 소식을 하시는데 물까지 안 드시는 타는 목마름조차 넘어서는 당신의 인고, 그 역사적 긴장을 감당할 길은 정말 없는 듯하다. 얼마 전에는 고질병이 된 기침과 가래가 각혈상태에까지 이르러 호흡기내시경검사를 받으셨다.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두 볼은 푹 파이고 불면 날아갈 듯 앙상한 체구는 80년 초 전두환정권의 살인적인 고문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 감옥에서 실려 나온 순간보다도 더 안타까울 정도이다. 그러나 퇴원 다음날로 언론파업 현장, 트럼프 방한 반대시위, 전국노동자대회, 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한 노동자들 지원, 당신의 숨 가쁜 일상은 멈출 줄을 모른다.
작년 여름엔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겠다는 문화예술일꾼들의 부탁을 내치지 못해붓글씨 40점을 위해 몇날며칠 천장도 넘게 쓰고 또 쓰고 마침내 떠도는 일꾼들이 잠시나마 눈 붙
이고 쉬어갈 자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셨다. 문화예술일꾼들은 그런 아버님과 문정현 신부님을이 시대의 두 어른으로 아로새기는 두 분의 댓거리를 책으로 출간해내기도 했다.
연로하신 아버님을 언론매체나 거리의 시위현장에서 뵙게 될 때의 심경이 편할 리는 없다. 당신의 지난한 항쟁의 세월 내내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아버님의 우리 옷을 빳빳하게 풀을 매겨 하얗게 다려 내셔온 동갑내기 어머님의 비지땀과 마디마디 불거진 손길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맏사위 역시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사회운동을 한다고 용돈 한번 드려본 적이 없으니 어머님은 당신의 한평생이 딸에게 고스란히 되풀이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제 그만 하고 돈벌이 좀 하면 안 되겠나” 한숨을 토로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가차없이 터져 나오는 아버님의 댓거리,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우리 사위가 얼마나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데 제 식구만 챙기는 속물이 되라니……”
아버님의 지지에 사위는 더욱 민망하기 짝이 없건만 모른 척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세상을 열어내기 위해 끝없는 젊음을 사는 그대. 그 아버지의 딸이기에 오늘도 역사적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살아가야 할 뿐 다른 도리는 없는 것 같다.

“시는 나불대는 게 아니야. 사람 아닌 악질 살육과 싸우는 이들의 꿈을 빚는 거야. 그걸 비나리라고 하지.”
- 백기완 『두 어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