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바라보는 쪽으로 열린다. 화원을 덮고 있는 국화를 뒤로 하고 곱게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 지나 학의천을 따라 청계사로 방향을 잡 았다. 청계산은 서서히 단풍이 도착하고 있었다. 하늘을 벗 삼아 풀 들의 흔들림을 노래 삼아 걷는 발걸음이 바람 소리와 어울린다. “나 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노트에 적힌 문구 가 떠오른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시의 길은 나를 다독이며 방향을 잡는 시간이 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생명과 사람, 상황이 나의 시가 되었다. 그 생명과 사람은 아프고 결핍된 존재이며 주변인이다. 상황은 내 주변 의 일상이며 현실이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곳으로 향했고 시로 표 출되었다. 시골정서를 가지고 있는 나는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날카로운 예각으로 벼려야 하는 언어의 공간에서 가장 따뜻한 글자를 찾아 곁 에 두고자 했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와 돼지, 조류독감으로 파 묻힌 닭, 미혼모, 재소자, 비정규직, 백수, 외국인 노동자, 철거민, 위 안부 할머니 등등 이름을 불러주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부를 수 있 어 다행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 세월호와 촛 불집회,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먼 얘기가 아니라 내가 발 딛고있는 지금의 현실이고 현재였다. 그래서 현실에 늘 깨어 있고자 했다. 사람을 포함해서 동물이든 식 물이든 생명을 가진 우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촘 촘한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사이라고 상기시키고 싶었다. 누가 누구를 연민이나 동정을 하는 사 이가 아닌 공존하고 공생하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나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나는 가끔 서울소년원 아이들이 만든 빵을 먹고 안양교도소에 가 서 세차를 한다. 노숙자 쉼터에서 손을 잡은 아이(그때 그는 23세였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들을 만나고 그들의 글을 보면서 죄는 나쁜 것이지만 편견으로 가득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들을 만나며 오히려 내가 위로 받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말이 편견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가 졌던 편견이 조금씩 옅어짐을 느낀다. 오늘 아침 버섯볶음과 호박전은 교도소에서 받은 그릇에 담 겨 있었고 컴퓨터 옆 연필꽂이도 재소자의 작품이다. 한때 힘든 시기를 보낸 적 있는 나는 조금은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에게 눈이 더 간다. 그들을 한 번 더 호명하고 따뜻한 기운을 전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하나보다는 둘이 살갑지 않은가. 첫 시집을 내고 첫울음을 터트리는 간난아이의 심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처음부터 이 루어질 수 없는 감정이었으니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많은 시집으로 가끔은 이 정도 밖 에 못했다고 자책하다가도 가끔은 이 정도 했으면 수고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자랑스럽게 여겨주는 분들이 계셔 힘을 낸다. 특히 중학교 은사님과의 전화 통화는 잊지 못한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과학 선생님은 시를 쓸 줄은 모르지만 최근에 시를 암송 하는 취미를 가지셨다며 서로 암송하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한시부터 현대시까지 10여 편을 암송하 고 나는 2편을 암송하며 색다른 통화를 했다. 과학을 가르쳤던 선생님과 과학자의 길을 가고 싶었 던 제자의 전화는 시의 향연으로 흥건했다. 내 시를 암송하고 전화를 다시 하겠다는 선생님 앞에 시가 써져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청계산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소나무, 편백나무, 떡갈나무를 지나 청계사에 다다랐다. 길 위에 서 길을 찾듯 만났던 사람과 사건이 삶이 되고 한 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시의 주인공은 모두 유기 적인 관계를 가지고 말끝에 매달린 심장이었다. 나 또한 말끝에 매달린 심장이었다. 먼저 목을 축 이고 대웅전에 든다. 오늘은 108배를 해야겠다. ※ 필자의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7년 시인수첩에서 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