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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주일이 지나가고 백두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침, 나는 이경재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3수끝에 받은 세례였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모래언덕에서 세례를 받던 시간은 지상(至上)의 평화와 아름다움이 비취빛 천지의 물결처럼 넘쳤다.

                  그리고……28년

첫 중국 여행에서였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백두산 정상, 모래언덕에서였다.
처음 성당 문을 찾아들어간 것이 제주에 살고 있을때였다. 이끼 낀 세월 저편, 어느새 마흔이 가까워진 딸이 그때 땅에 끌리는 커다란 스케치북을 들고 미술학원을 다니던 이른 봄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과의 이 첫만남은 예비신자교리를 시작한 지 2달 만에 무너져버렸다. ‘한수산필화사건’이라는 국가폭력에 매몰되며, 국군보안사의 고문 아래 영육이 갈가리 찢어진 채 나는 처절하게 쓰러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성당을 찾아간 것은 가을이 오고 있던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무엇엔가 많이 지쳐있었다. 낡고 때 묻고 너덜거리는 것만 같은 내 영혼을, 할 수만 있다면 욕조에 이불을 집어넣고 밟아 빨듯이 그렇게 영혼을 빨아서라도…… 햇살 가득한 마당에 내다널고 버석버석 소리가 나게 말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곳이 성당이었고, 최석호 신부님이었다.
그때 둘째인 아들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잠을 재우면서 나는 바둑판무늬의 거실 바닥을 사방치기 하듯이 오가며 사도신경을 외웠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하는 그 구절을 외우면서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 팔이 했을 수많은 일, 그 가운데 지금 이 순간 내 팔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는가. 아들을 잠재우며 사도신경을 외우다니.

그러나 그런 감동에도 불구하고 그해 연말 나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를 다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그 ‘재생’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한수산 필화사건’을 일으킨 주체였던 국군보안사의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되는 경악할 일이 벌어졌을 때, 아 이것이 나의 조국이었는가 하는 절망 속에 나는 나라를 떠났다.
일본으로 가 4년을 살고 있을 때였다. 예정도 계획도 없이, 아직 국교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베이징 공항에서 처음 만나는 낯선 분들과 일행이 되어 아홉명이 함께 십여 일을 보내는 여행이었다. 그 여행길을 함께한 분들 가운데 ‘성 라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님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김지상 원장 수녀님이 계셨으니, 그것은 또 무슨 섭리였을까.
여행 1주일이 지나가고 백두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침, 나는 이경재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3수 끝에 받은 세례였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모래언덕에서 세례를 받던 시간은 지상(至上)의 평화와 아름다움이 비취빛 천지의 물결처럼 넘쳤다.
그날 오후 내내 허리가 부러질 듯이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내려와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방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 위해 여행 가방을 풀었을 때였다.
가방 속이 술 냄새로 코를 찔렀다. 중국인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자기 술병이 백두산을 오르내린 버스에서 흔들리며 새어나와 가방 속의 옷을 전부 적셔놓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축축하게 술에 젖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세례를 받고 첫 기도를 드리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느님, 제가 겨우 이렇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된 첫날, 술 냄새를 솔솔 풍기며 이렇게 당신 앞에 엎드렸습니다. 제 삶이야 오늘 이 모습처럼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릴지라도, 주님, 제 믿음만은 비틀거리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것만은, 그것만은 보살펴 주십시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베이징 외곽에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며 쓴 일기에 이런말이 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이 말을 새겨 가슴에 걸었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하고, 내일 떠날 것처럼 준비하자. 오늘 하루를 산 내 발걸음에 이 말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