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예민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잘 자지도 못했다. 때문에 군대에서도 반년정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가 귀국 첫날 새벽에 사람들이 드글드글한 찜질방에서 14시간 정도나 뻗어있었다.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집에 들어온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라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다시 나간 건 참 죄송한 일이다. 잠깐 누웠을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근 하루가 지나있었고 이제야 터지기 시작한 핸드폰의 통화기록에는 수많은 걱정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한 통의, 걱정으로 시작된 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일파만파로 퍼져. 문학기행을 떠난 사이에도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럽은 정말 아름다워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래. 분명 다시 무작정 떠났을 거야.’ 유럽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비행기를 타고 내렸을 때도 막상 돌아왔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는데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그때서야 한국에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의식이 사라진 암전을 통해서야 문학기행이 비로소 끝난 느낌이었다.
문학기행은 끝도 암전으로 끝났지만 시작도 암전으로 시작했다. 5시30분의 너무나 이른 새벽은 눈을 비비면서 출발하게 했고 비행기 안에서 이륙과 동시에 쓰러지게 했다. 눈을 떠보니 첫 목적지인 일본이었고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문자로 도배가 된 세상이 펼쳐졌다. 이처럼 눈을 떠보니 신세계인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80일간의 세계일주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우리는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처럼 정신 차려보면 새로운 세계와 직면해야 했다. 세계와 세계의 간극에는 항상 암전이 있었고 그 암전은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무척이나 극적인 암전이었다.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는 세계에 대한민국밖에 없다더니.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정갈한 선진국이었다. 선진국의 시민의식이라는 건 어떻게 발현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일본은 쓰레기와 쓰레기통의 부재로 무언의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가게 밖까지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 모르면서 욕했던 무지몽매함을 반성했다. 이런 일본사람들의 의식은 훗날 더 돌아본 국가를 합쳐도 분명 수위권의 것이었다. 소설가 온다 리쿠 역시 너무나 정갈한 작가였다. 배우는 입장에서 찾아간 우리보다 예의바른 태도와 호기심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처음에 무척 당황했었다. 온다 리쿠는 줄곧 문학의 엔터테인먼트성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다. 장르문학과 독자 그리고 작가 자신의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도도하고 고고한 문학 혹은 예술관에 집착한 탁상공론이 아닌 현실적이며 실질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온다 리쿠는 자신의 위상에 따른 허례허식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항상 새롭고 다양한 스타일의 글을 쓸 수 있는 힘인 것 같았다.
베를린에서 만난 잉고 슐체는 온다 리쿠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잉고 슐체 역시 대가로서의 위압적인 모습보다 옆 사람의 잔과 음식을 먼저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잔뜩 긴장해있던 우리가 편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다. 잉고 슐체는 문학의 사회성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작가는 지금 우리 옆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산대학문학상 시상식에서 최원식 선생이 말씀하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학의 사회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작가는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었다. 온다 리쿠와 잉고 슐체는 문학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엔터테인먼트와 사회성이라는 서로 다른 비전을 제시했으나 문학은 어려운 것이며 글을 쓰면서 사는 것은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런 고난의 극복이 작가를 좋은 글로 인도한다는 것, 쉬지 않고 쓰면서 정진하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유럽은 오기 전 까지만 해도 환상 그 자체였다. 모든 여행의 기준은 유럽에 가 보았냐 라는 것으로 판가름 나기도 했으며 다녀온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만 들으면 유럽은 가는 모든 곳이 그림인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신천지처럼 묘사되고는 했다. 이번 기행을 통해 정말 좋았던 점과 좋지 않았던 점이 있는데 좋지 않았던 점은,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유럽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졌다는 점과 반대로 가장 좋았던 점은 그래서 유럽이 만만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축물,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사람들, 굳이 보러가지 않아도 보이는 곳곳의 역사 유적들은 인터넷으로 보던 사진들보다 더 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여행 전 사진을 들여다보며 상상했을 때가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정말 유럽의 유럽스러움은 건축물에서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유럽의 기억들 중 가장 강렬하게 남았던 것은 독일의 치우지 않은 눈과, 오후 3시 튈르리 공원 분수 앞에서 책을 읽는 중년 여자, 라로셀 대서양의 석양을 등지고 키스를 나누던 연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눈을 안 치웠다면 난리가 났을 테지만 독일 사람들은 지나갈 수 있는 만큼만 치워놓고 생활하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과 운동하는 사람들 모두 이것에 대해 큰 불편을 못 느끼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그 도로가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뭐든지 전쟁처럼 순식간에 다 해치워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강박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발이 시리긴 했지만 그런 문화에 적응될 때쯤 떠나서 보게 된 게 튈르리 공원의 중년여자였다. 모든 기행문을 보면 건축물과 역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만 그곳 사람들의 풍습에 관해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생활의 발견과 거기서 느끼는 충격이 같은 생명체로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충격인 것이다. 최근에 했던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던 것은 아마존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하는 것보다 아마존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의 일정이 끝난 후 잠깐 만났던, 파리지앵의 삶을 살고 있는 동창생의 말을 들어보면 여기 애들은 다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하다는 것이었다. “왜 당일 날 약속을 하면 나오질 않지? 여기는 다 나와. 하지만 한국은 한 달 전 부터 약속을 해야 하질 않나 너무 복잡해.” 원체 아름다운 파리의 궁극적 아름다움은 난 원래 여기서 이렇게 한가롭게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책장을 넘기고 있는 중년여성의 손에 있었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저 사람은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궁금해 했겠지만 한국 사람이었기에 도대체 이 시간에 뭐하는 사람일까 하는 각박한 생각을 하며, 사실 그것은 저 사람이 즐기고 있는 시간에 비하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며 씁쓸해했다. 또 라로셀 부두 앞 카페테리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천국은 유럽에 있는 게 아니고 사람들 자체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라로셀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한국학과 학생들을 만나 한국어로 이야기 하며 교류를 나누었는데 그 학생들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과 한국 소설책을 받고 사인까지 해달라며 좋아서 애처럼 조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해가 질 무렵 대서양 연안에 갔었는데. 해변과 도로를 구분하는 작은 돌담에서 젊은 남녀가 마주보고 같이 앉아 있었다. 석양이 지는 대서양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기에 몰래 담았다. 하지만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찍을 수는 없었다. 세계적인 예의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냥 머물면 죽을 때까지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라로셀을 떠나는 순간 이곳에 대한 향수는 언젠가 한번 찾아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 번도 영어가 달가워 본 적 없었는데 런던에 와서 영어가 보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간판과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자 이제 막 미개인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런던의 백미는 뮤지컬이었고 극작을 공부했던 내게 기행 중 최고의 수확이었다. 헛돈 쓰지 말고 돈 모아서 런던 뮤지컬이나 보고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정말 정답이었구나 하는 걸 깊이 느꼈다. 극 자체와 배우보다도 관객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렇게 문화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충격이었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부여와 함께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풍토가 조성 될 거라는 미래의 비전이 제시되는 시간이었다.
끝으로 11일간의 여정 후에 이런 자족적인 생각보다도 같이 갔었던 일행들끼리 나누었던 우스갯소리가 더 자주 기억난다는 점을 보면 결국 사람과 같이 간 여행이었고 내가 지금 보고 느낀 것은 그럴 수 있게 다른 일행들이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지켜준 시간 덕분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보고 온 것도 유럽의 사람들만 보고 왔으니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났던 내 나름대로 에게는 뚜렷한 테마가 있었던 여행이었다. 다시 한 번 기간 내 무탈했던 일행들과, 대산문화재단의 인솔자께 감사드린다.
